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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땀 한 땀, 위대한 창신동의 모험

  • Editor. 천소현 기자
  • 입력 2021.10.18 11:34
  • 수정 2021.10.18 11:3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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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의 동쪽 경계를 이루는 종로구 낙산 너머로 애잔한 동네가 하나 있다.
일제강점기엔 아버지가 마을 돌산 채석장으로 일 나가고, 1970년대엔 소녀들이 새벽까지 미싱을 돌리며 생활을 깁던 창신동이다.

▶서울시·서울관광재단 마을관광 우수상품
올해 7월에 서울시와 서울관광재단은 공모를 받아 마을관광 우수상품을 선정했다. 자치구에서 2013년부터 2019년까지 개발한 마을관광 상품 중 3개의 상품이 최종 우수상품으로 선정됐다. 종로구 창신동 봉제거리, 성북구 성북동 문화예술길, 강북구 너랑나랑우리랑 스탬프 힐링투어가 그 주인공들이다.
 
▶창신동 봉제거리 마을여행
코스│여성역사공유공간 서울여담재→창신 숭인 채석장전망대→ 창신소통공작소→산마루놀이터→봉제거리박물관→이음피움봉제역사관→백남준기념관
소요시간│3시간

 

●창신동의 선택, 그 후


실제로 창신동에 집을 보러 다닌 적이 있다. 살아 볼성싶어서였다. 구구절절 설명은 못 해도 일찌감치 창신동의 남다른 매력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인데, 뜻을 이루진 못했고, 그로부터 5년 만에 다시 창신동을 찾았다. 골목마다 언덕마다 소소한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창신 숭인 채석장전망대와 산마루놀이터가 새로 문을 열었고, 봉제거리박물관 안쪽에는 이음피움봉제역사관이 호스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백남준 생가터에 세워진 백남준기념관뿐 아니라 여성역사공유공간 서울여담재 등 문화공간이 꽤 늘어나 있었다. 마을이 한 땀 한 땀씩 변해 왔음을 확인하니 다행스러운 기분이다.


숱한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는 마을의 역사는 캐내기만 하면 되는 금맥인지라, 창신동에 필요한 건 여행자들이 적당히 쉬고, 먹고, 체험할 공간들이었다. 이렇게 더해진 창신동의 새로운 명소들이 많으니, 다시 창신동 첫 여행의 마음이다.


●여성의 역사 그리고 창신동


“올라가실래요? 내려가실래요?” 후자를 택했다. 경이로운 비탈로 이뤄진 창신동 여행을 위해 동묘역에서 출발하는 마을버스를 선택했다. 하차 지점은 한성대 후문 앞. 나름 한성여고 졸업생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변한 동네는 아파트에 철저히 포위된 모습이다. 그 사이에 고립된 듯했던 원각사는 지난해 절집의 모습을 유지한 채 여성역사공유공간 서울여담재로 바뀌었다. 서울 근현대사를 관통한 여성의 이야기가 책으로, 전시로, 강의로 전해지는 공간이다.

서울 여성의 이야기가 담긴 집, 서울여담재
서울 여성의 이야기가 담긴 집, 서울여담재

한양도성과 맞닿아 있는 창신동은 조선시대 두 마을인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에서 이름을 얻었다. 낙산 주변에 양반들의 별장이 있기는 했지만, 한양의 그린벨트였던 성저10리(城底十里, 묘도 쓸 수 없고 벌목도 금지된 도성 밖 약 4km 구역) 안 마을이라 조선시대에는 거주 인구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창신동은 종로구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

●아파트는 가고 사람이 왔다


창신 숭인 채석장전망대에 올라서니 빽빽한 다세대 주택으로 이뤄진 창신동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탁 트인 전망이지만 자세히 보면 상처투성이다. 일제강점기 창신동 돌산에서 캐낸 화강암으로 서울역, 서울시청, 조선총독부를 건축했다는 건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단면이 생생한 창신동 절개지와 반쯤 잘려나간 동망봉(東望峰)이 증거다.

유난히 맑은 날의 창신 숭인 채석장전망대 옥상테라스
유난히 맑은 날의 창신 숭인 채석장전망대 옥상테라스

창신동 곳곳의 쌈지공원과 주차장은 1970년대에 세워진 시민아파트가 있던 자리고, 창신 숭인동을 한눈에 바라보는 채석장전망대도 그런 자리에 세워졌다. 한양도성과 DDP를 포함한 풍경 외에도 전망대 카페 ‘낙타’의 저렴한 음료 가격이 장점이라니, 조금 외져도, 가팔라도 꼭 가 볼 곳이다.

창신소통공작소에 있는 임옥상 작가의 조형물 '천개의 바람'
창신소통공작소에 있는 임옥상 작가의 조형물 '천개의 바람'

창신소통공작소와 산마루놀이터도 시민아파트가 있던 쌈지땅에 세워졌다. 서울시와 종로구 여러 기관과 단체들이 관여한 마을 재생 사업의 성과들이다. 2015년 종로구문화재단에서 공공미술시범사업을 의뢰받은 임옥상 선생은 작품 전시공간 대신 창신소통공작소를 제시했다. 덕분에 주민들은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누리고 있다.

동네 꼬마들의 소원으로 만들어진 산마루놀이터
동네 꼬마들의 소원으로 만들어진 산마루놀이터
오픈하자마자 인기폭발이었던 산마루놀이터 정글짐
오픈하자마자 인기폭발이었던 산마루놀이터 정글짐

고깔 모양 황토 건물 안에 고층의 정글짐을 심은 산마루놀이터는 창신동 꼬마들의 바람이 실현된 장소다. 구청장은 안전하게 마음껏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지켰고 2019년 대한민국 국토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어린이 놀이 활동 전문가가 아이들을 반겨 주고 있어서 엄마들이 잠시 숨을 고르는 장점도 있다고.

●실과 바늘로 기운 마음


창신동의 클라이맥스는 내려가는 길 위에 있었다. 오죽 가파르면 ‘회오리길’이라 했을까. 대문을 나서면 바로 45도 경사면이지만, 균형을 잃지 않고 살아온 노부부가 천천히 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땅밑에 흐르는 복자천 물길 따라 휘어진 골목이 나왔다는 건, 드디어 평지라는 뜻이다. 창신골목시장을 지나는 순간 확 달라진 공기를 채우는 것은 오토바이 소음이다.

24시간 분주한 창신동 봉제공장과 오토바이
24시간 분주한 창신동 봉제공장과 오토바이

창신동 647 일대 봉제거리박물관은 마을 재생의 초기사업이었다. 평범해 보이는 다세대 주택의 내부는 온통 봉제공장들인데, 그 숫자가 1,000여 개에 이른다. 동대문 의류패션 산업을 돌리는 힘은 사실상 창신동에 있다.

일제강점기 동대문 일대 광장시장에 대규모 포목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이주민과 피난민들이 판잣집을 지으며 몰려들었고 1970년대 평화시장 봉제공장이 이전해 오면서 창신동은 의류산업의 배후기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여성들, 10대에 시작해 60~70대가 된 지금도 재봉틀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어머니들이 창신동의 영웅들이다.

이번 창신동 여행을 안내해 준 손경주 이사(창신숭인 도시재생 협동조합)의 어머니도 그렇게 삶을 기워 아들을 키웠다. 손 이사는 창신동에서 나고 자랐고, 서울대에서 도시설계 박사 과정까지 밟으며, 어머니와는 다른 창신동의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

실제 봉제공장이 밀집한 거리에 조성된 봉제거리박물관
실제 봉제공장이 밀집한 거리에 조성된 봉제거리박물관

창신동 장인들의 손을 빌려 봉제 산업의 미래를 그려가는 건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 젊은 디자이너들이다. 철저한 분업으로 휘갑치기만 하는 집, 단추만 다는 집 등 공장마다 전문 분야가 있고, 이 가내수공업 공장들을 이어주는 컨베이어 벨트가 바로 밤낮없이 원단과 의류를 싣고 달리는 오토바이들이다. 무슨 거리 박물관이냐고 냉소하던 주민들을 설득해 간판겸 안내판을 제작했던 과정은 창신동 봉제업 종사자들과 마을 주민들의 조각난 자존감도 함께 기워 주었다.

공장에서 이음피움봉제역사관으로 옮겨 앉은 재봉틀
공장에서 이음피움봉제역사관으로 옮겨 앉은 재봉틀
봉제역사를 기워 만든 이음피움봉제역사관
봉제역사를 기워 만든 이음피움봉제역사관

그리고 이윽고 들어선 이음피움봉제역사관은 실과 바늘의 정서를 담고 있었다. 셔츠 등판에 수놓은 층별 안내도 같은 디테일이 포근함을 입혀 주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꼼꼼히 살펴봐야 할 전시와 직접 체험할 것들도 있다.

●부를 쌓는 법, 부를 쓰는 법


해방 후 창신동은 판자촌이 가득한 저소득 노동자들의 촌락이었지만, 시간을 더 거슬러 가 보면 늘 가난했던 것은 아니다. 1920년대 창신동 일대에는 당대 최고 부자들의 궁궐 같은 집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화제성으로 꼽는 투 톱이 임종상, 백낙승의 집이다. 약 2만2,000m2(6,700여 평), 260칸이나 되었다는 고리대금업자 임종상의 집은 소문이 나서 시골에서 일부러 구경하러 올 정도였다고. 우리나라 최초의 재벌로 불리는 백낙승의 집도 1만 평방미터(3,000평)가 넘는 저택이었다.

창신동 생가터에 조성된 백남준기념관
창신동 생가터에 조성된 백남준기념관

으리으리했던 집보다 더 오래 남은 건 잘 키운 아들 하나.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년) 선생이 이곳에서 나서 10년 넘게 살았다.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어린 시절부터 문화예술의 자양분을 흡수한 그는 고등학교 때 유학을 떠나, 일본과 독일, 미국에서 미술, 음악, 철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가 태어난 창신동 생가터는 이후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 복원할 수 없지만 2017년 작은 한옥을 털어 백남준기념관을 열었다.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기록들이 상설전시에 담겨 있고, 주민들이 운영하는 카페가 아늑하다.

그의 삶과 작품이 차곡차곡 요약되어 있다
그의 삶과 작품이 차곡차곡 요약되어 있다

처음 같았던 두 번째 창신동 여행은 한층 여행지다워진 창신동의 면모를 살피는 것이었다. 조금씩 오랫동안, 건강하고 단단하게 변해 가는 창신동이지만, 첫 번째 여행에서 신중진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에게 들었던 당부는 여전히 유효하다. “창신동을 구경하지 말고 살펴 달라”는 그 당부 말이다.

 

글 천소현 기자 사진 김민수(아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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