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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그만해, 이러다 다 죽어”

  • Editor. 이우석
  • 입력 2021.12.01 0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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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겁이 늘었다.
30년 전 해병대를 나왔지만, 귀신이고 뭐고 겁부터 난다.
뭔가 꺼려지는 일은 그동안 충분히 해봤다. 
그러니 제발 그만해, 나 너무 무서워. 

나도 우아하게 와인 테이스팅 체험하는 것 좋아한다. 제발 스카이다이빙 이런 것 좀 그만하고 싶다고
나도 우아하게 와인 테이스팅 체험하는 것 좋아한다. 제발 스카이다이빙 이런 것 좀 그만하고 싶다고

●애벌레 먹방이 잘 어울리는 사람


번지점프, 로프에 몸을 묶은 채 고층 빌딩 바깥을 걷는 스카이 워킹, 겁이 난다. 강원도 인제군 번지점프에서는 후한 강원도 인심(?) 덕에 곤란을 겪은 적이 있다. 한 번 값에 무려 2번이나 태워 주는 것도 모자라, 끈도 다소 넉넉히(?) 풀어 줬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한참 떨어졌다.


과거 해외로 여행 취재를 다닐 때의 일이다. 보통은 현지 관광협회의 실무자가 나와 다양한 취재 거리를 소개한다. 그중 마지막 즈음엔 연신 엄지를 치켜세우며 ‘아주 특별한 액티비티’라며 강조하는 게 있다. 주로 익스트림 체험이다. 멕시코 칸쿤의 식인상어 피딩 체험이나 피지 군도를 내려다보며 해발 1만4,000피트 항공기에서 떨어지는 고공낙하 같은 것들이다. 나도 뉴욕 뮤지컬 체험이나 샌디에이고 브런치 즐기기 같은 것을 좋아한다고. 갤러리 투어와 파인다이닝 만찬을 얼마나 기대했는데. 왜 나를 낙타에 태워 사막으로 보내는 것인지, 가다가 파리떼 사이에서 병아리콩 수프만 먹이는 것인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왜 현지 가이드나 국립공원 레인저들은 하나같이 내게 애벌레 먹이기를 주저하지 않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애벌레는 몇 마리 없는데 하필 그 많은 군중에서 왜 나를 골랐을까. 이제 곧 나비(혹은 커다란 하늘소)가 되어 훨훨 날아다닐 애벌레를 날로 먹을 만큼 잔인한 사람이 나였던가. 아무래도 내 인상 탓일까? 같은 곳을 가더라도 항상 위험과 직면해야 하는 ‘아주 특별한 액티비티’는 거의 항상 나의 몫이다.

원시림 속 늪 다이빙이라니. 이런다고 키 크는 꿈따윈 꾸진 못했다
원시림 속 늪 다이빙이라니. 이런다고 키 크는 꿈따윈 꾸진 못했다

 

●456번 참가자


몇 해 전 어느 여름 스위스였다. 나와 동행했던 여행작가 이모씨, 기자 박모씨에겐 ‘치즈 만들기’나 ‘쿠킹 클래스’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그랑 크뤼(Grand Cru, 프랑스 와인 등급으로 특급 포도원이라는 의미)급 와인 시음과 공연 감상은 내가 정하기도 전 이미 다른 사람들의 몫이었다. 우아한 체험거리의 정원(定員)은 앞선 동행들로 채워지면서 나중엔 ‘아주 특별한 액티비티’만 남는다. “이건 정말 재미있어. 안 해보면 누구나 후회하지!” <오징어게임>의 프론트맨 같은 숭고한 미션 분배자는 혼자 남은 내게 깎아지른 피르스트(First) 암벽 트레킹과 오금 저리는 절벽 위 슈톡호른(Stockhorn) 번지점프 등을 설명하며 한쪽 눈을 찡긋한다. ‘하면 더 후회하겠지.’ 들리지 않는 항변을 떠올렸으나 이내 체념하고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난 언제나 456번 참가자였으니까.


“그래, 넌 해봤더니 어땠어?” 가이드에게 내가 물었다. 그는 황급히 답을 회피했다. 그는 안 해본 것이 분명했지만 별수 없었다. 그날 오후 나는 우비를 입고 비 오는 암벽에 찰싹 붙어 발목만 움직여가며 잔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 기후와 일정상 번지점프는 취소됐다. 그 덕에 나와 내 유품(?)은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서호주에선 근사한 정글 탐험선을 타고 애벌레를 먹으러 다녔다
서호주에선 근사한 정글 탐험선을 타고 애벌레를 먹으러 다녔다

 

●Flying Octopus


남태평양 피지에서의 일이었다. 아름다운 바다에 기막힌 해변을 품은 333개의 섬들이 총총 박힌 남태평양 피지 군도. 그 로맨틱한 정취에 흠뻑 취해 있던 나날. 인솔자가 그 아름다운 모든 것을 한번에 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그때 난 “싫다”라고 단호히 거절했어야만 했다. 그들은 몰래 고공낙하 체험을 계획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들은 하지 않을 계획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스카이다이빙이란 무척 어리석은 일이다. 솔직히 항공기가 정상궤도에 오르면 밥을 나눠 줘야지, 문을 활짝 열고 승객을 내던진다는 것이 과연 말이나 되는 일인가. 안 그래?

경비행기를 타러 작은 비행장을 갔다. 해병대 전우회처럼 컨테이너 박스에 사무실을 둔 ‘피지다이빙’ 회사는 굉장히 허름하고 옹색했다. 커다랗게 ‘웰컴’이라 적힌 간판 아래 문을 열었다. 해병대 전우 대신 누군가 사장으로 보이는 호주인이 인도인 직원에게 화를 내고 있다가 나를 보자 황급히 미소를 지었다. 상황을 살펴보니 바닥에 놓인 직원이 낙하산을 잘못 개는 바람에 혼쭐이 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알고 있기론 낙하산을 제대로 접어놓지 않으면 나중에 펴지지 않는다. “이거 똑바로 하지 않으면 이따가 올 그놈이 4,000m에서 떨어져 죽는다고. 걘 애도 어리다는데, 책임질 거야? 앙?” 아마도 분명하진 않지만 들어오기 직전 사장이 그 서툰 직원에게 지른 소리란 내게 그렇게 들렸다. 사장은 온갖 미소를 지으며 ‘웰컴’이란 말을 퍼부었다. 웃음 가득한 얼굴과는 달리 굉장히 단호한 내용이 적힌 각서를 내밀며 사인하라고 했다.

추울 땐 난로 앞에 앉아 커피를 마셔야지. 빙벽 클라이밍 따위라니
추울 땐 난로 앞에 앉아 커피를 마셔야지. 빙벽 클라이밍 따위라니

 

낙하산과 몸을 연결하는 고정 장치인 하네스를 착용했다. 군대 있을 때 이후 근 25년 만에 처음이었는데 별반 믿음직해 보이진 않는다. 끈은 낡았고 스냅링크 고리는 뻑뻑했다. 핏자국이 없나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다행스럽게 없었다. 그 인도인이 세탁했을까. 이윽고 경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렸다. 비행기가 하늘로 솟구쳤을 때 비로소 알게 됐다. 내겐 낙하산이 매달려 있지 않다. 주낙하산과 보조낙하산은 교관의 하네스에만 붙어 있고 나는 교관과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도 고작 쇠고리 4개만으로. 게다가 굉장히 신경 쓰였던 것은 교관의 허리춤에 내 엉덩이가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겹쳐’ 있단 이야기다. 가을의 잠자리 한 쌍을 떠올리면 쉽다. 그날의 최악 포인트였다. 아주 특별한 액티비티. 

비행기란 모름지기 이착륙이 있어야 한다. 사람만 먼저 내려오는 게 어딨지
비행기란 모름지기 이착륙이 있어야 한다. 사람만 먼저 내려오는 게 어딨지

나중에 동영상을 보고 안 사실이지만, 활주로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1만4,000피트까지 오르는 약 25분간 나는 마치 당첨된 로또라도 잃어버린 사람처럼 넋이 빠져 있다. 일단 방풍 고글 탓에 안경을 벗어 흐릿하니 보이지 않았고, 보였다 해도 비행기 문을 여는 순간 눈을 감았을 것이다. 마침 그 순간이 왔다. 기장은 문을 열었다. 영화 <승리호>에서 레이저빔을 맞아 구멍 뚫린 우주선처럼 바람이 와락 들이닥쳤다. 내 뒤에 붙어 있는 교관이 하체로 자꾸 밀어붙였다, 빌어먹을. 이 순간 나는 동승했던 선배 한 명이 까마득한 지상으로 추락하는 것을 봤다. “아악!” 비명을 지르더니 1초 만에 사라졌다. 머리 짧은 놈이 그를 떨어뜨렸다. 뒤돌아서 교관을 쳐다봤다. 그는 윙크를 건네더니 비행기 밖으로 나를 반쯤 밀어냈다. 바로 떨어뜨려야지. 왜 나를 반만 내놓았을까.

내가 ‘촬영 동의란’에 체크 했던 것이 그때서야 기억났다. 나는 촬영을 위해 해발 1만4,000피트 상공에서 시속 350km로 비행하고 있는 작은 알루미늄 깡통 바깥에 몸을 내놓고 2분 정도 앉아 있어야 했다. 허공 위에는 발을 올려놓을 곳도 없다. 나도 모르게 연신 괴상한 신음이 터져 나오더니 이내 몸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촬영이 끝나고 그놈이 밀어냈다. 하체로. 낙하가 아니라 추락이며 자발적 레저가 아니라 거의 ‘집행’ 수준이다. 아무튼 나는 떨어졌고 눈부신 바다를 봤다. 중력에 대해 고마움을 느꼈고 추락하고 있었지만 날아오르는 듯한 착각도 했다. 비행기로 30분을 올라간 후 대략 6분 정도 만에 내려왔다. 1만 피트(3,300m)를 약 1분 동안 자유낙하했고 4,000피트(700m) 정도는 둥실둥실 낙하산과 함께 착륙했다는 설명이다. 그렇게 짧았나?


낙하, 아니 추락은 짧았지만, 그 악몽(?)은 길었다. 기억이란 것이 대상포진과도 같아서 갑자기 나타난다.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바라볼 때면 ‘아주 특별한 액티비티’의 순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억울한 것은 매년 떨어지는 꿈을 꾸었음에도 키는 전혀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만 6분의 그 경험을 평생을 두고 우려먹을 사진과 동영상이 남았으니 억울하진 않다. 각서보다 더 화려한 그날의 ‘추락 인증서’가 집 어딘가에 있을 테니. 다시는 하지 않을 테지만, 어쨌든 내겐 자랑거리가 남았다. 누가 한 번 더 해볼 것을 권유한다면 솔직히 말할 것이다. “제발 그만해. 나 너무 무서워! 이러다간 다 죽어!”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인스타그램 playeatlab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강화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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