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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형의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12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6.0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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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레 뽈레 킬리만자로 오르기 

  ‘뽈레 뽈레, 트웬데’ 

아프리카의 지붕, 킬리만자로에 오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에요. 무슨 뜻이냐구요? ‘천천히 천천히, 가자’라는 뜻입니다. 킬리만자로 산의 꼭대기 우후루(‘독립’이라는 듯의 스와힐리어) 피크는 5,895m. 뽈레 뽈레 올라가지 않으면 높은 산에 적응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가이드가 강조하는 말이 바로 ‘뽈레 뽈레’입니다. 

킬리만자로에 오르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코카콜라 루트라고 불리는 마랑구(Marangu) 루트와 위스키 루트라고 부리는 마차메(Machame) 루트, 가파른 음브웨(Umbwe) 루트 등 3가지 루트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요, 저는 이중에서 5박6일간 산에 오르는 마차메 루트를 선택했습니다. 

이미 킬리만자로에서 내려온 지 열흘이 지났건만, 아직도 킬리만자로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답니다. 왜냐구요? 이번에는 슬쩍 제 일기를 보여 드릴께요. 그때 그 절절함을 전하기에는 편지보다는 일기가 나을 것 같아서요.  

1일차. 산행 첫날부터 비가 내렸다. 아루샤에서 마차메 게이트까지는 78km. 길이 좋지 않아 2시간을 족히 달렸다. 국립공원 입구는 해발 1,800m.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과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군. 5박6일 4명이 올라가는 데 가이드 4명과 요리사 1명 포터 9명이 동행했다. 4명 오르는 데 14명의 스탭이라, 딸린 식구도 참 많다. 첫날은 울창한 수풀이 많아 산림욕을 하는 기분이었다. 비가 와 더욱 시원해진 공기를 들이마시니 내 가슴까지 청정해지는 느낌이었다. 킬리만자로를 뒤덮고 있는 고목과 수많은 꽃, 풀잎들이 내 가슴 속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4시간쯤 걸었을까. 해발 3,000m에 자리한 마차메 캠프에 도착했다. 왜 이렇게 추운지. 그리고 하늘의 별은 왜 이렇게 많은지. 벌벌 떨면서 텐트 밖으로 머리만 빼곰이 내놓고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별을 보고 앉아 있다. 

2일차. 동행인 네덜란드 아가씨 에바가 토하면서 고산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얼른 나아야 할 텐데 걱정이 앞선다. 가이드 리처드가 화장실을 가리키며 ‘인터넷 하실 분, 이리 오세요’라며 장난을 걸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게으른 산행, 뽈레 뽈레. 킬리만자로는 백만년 전에 형성됐는데 75만년 전 화산활동으로 쉬라, 키보, 마웬지 등 세 봉우리가 생겼다고 가이드 리처드가 상세히 설명해 줬다. 오늘은 키보의 흰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도착한 캠프는 쉬라 캠프로 3,800m. 중국 샹그릴라에서 고생했던 고산병이 도질까 노심초사.

3일차. 지옥 같던 밤을 보냈다. 한숨도 못 잤다. 손도 얼고 코도 얼었다. 밤새 돌아가신 외할머니부터 초등학교 때 짝꿍까지 내 인생에 등장한 모든 인물들이 생각났다. 무슨 이유일까.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났더니 온 세상이 구름에 잠겼다. 어제와 비교하면 겨우 150m 오르는건데, 오르막 길과 내리막 길이 있어 어제보다 더 힘들었다. 끊임없는 구토와 두통. 머리에는 딱따구리가 노래 부르고 배에서는 천둥번개가, 이와 눈은 금방이라도 빠져 나올 것만 같았다. 밤하늘의 별과 달은 나의 이 막막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에 고고하게 박혀 있을 뿐이다. 여전히 숨이 막히는군. 바랑코 캠프 3,950m.

4일차. 3시에 바라푸 캠프에 도착. 그리고 자정에 우후루 피크를 향해 오르는 힘겨운 일정이 4일차의 일정이었다. 그러나 4,600m의 바라푸 캠프에 이르는 길이 나에게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길이었다. 3일간 잠을 못 자고 먹은 것을 다 토해 놓고 나니, 그야말로 ‘탈진하다’라는 동사가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인사불성. 바라푸 캠프 4,600m.

5, 6일차. 산에 오른 지 나흘 째 처음으로 잠이 들었다. 다른 일행들이 열심히 우후루 피크를 향해 올라가고 있을 때, 나는 바라푸 캠프에서 햇살에 빛나는 키보의 신비로운 눈 덮인 꼭대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떠오르는 햇살과 함께 원기도 회복됐다. 결국 우후루 피크에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대신 생을 얻은 기분이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탈진에서 벗어나, 살아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함을 느꼈다. 헤밍웨이가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말했던 ‘응가제 응가이(Ngaje Ngai)’. 마사이어로 신의 집이라는 그곳. 차가 부족어로 ‘오르기 힘든 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킬리만자로. 아쉬움이 남지만, 내 주변의 모든 것에 더욱 감사하게 됐고, 다시 태어난 느낌을 갖게 되었으니, 어쩌면 정상에서보다 더 값진 것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은 이렇게 즐거움과 고통으로 똘똘 뭉쳐진 삶의 축소판이다. 얼른 내려가서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전화 드려야지.  

글+사진=Travie writer 채지형 pinkpuck@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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