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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비스트 규슈를 가다 ④] 여유만만 천천히 누리는 행복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6.0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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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비스트, 규슈를 가다 ④  신기숙

신기숙씨는 야후와 함께하는 제2기 트래비스트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규슈온천여행 취재를 다녀왔습니다. 느림의 미학과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온 그녀의 여행기를 주목해 주세요.


여유만만 천천히 누리는 행복


ⓒ 트래비

1. 햇빛에 부서지는 긴린코 호수의 눈부신 수면 
2. 아름다운 긴린코 호수를 들여다보는 관광객들의 모습 
3. 많은 관광객들이 있음에도 고요한 긴린코, 저 멀리 마르크 샤갈 갤러리가 보인다.

손으로 전해지는 차의 온기에 얼어붙은 마음까지 스르르 녹아 버린다. 두 손을 그러모아 조심스럽게 쥔 찻잔을 입으로 채 가져가기도 전에 배시시 웃음이 났다. 불과 한두 시간 전만 해도 이렇게 아담하고 깔끔한 방에서 두툼한 방석을 깔고 단정하게 앉아 차 한잔에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을 줄 상상이나 했을까? 오래된 흑백영화 필름처럼 깜깜한 저녁, 비가 죽죽 쏟아지는 낯선 거리에서 감히 한발도 내딛지 못하고 큰 한숨부터 몰아쉬었던 것이 마치 꿈만 같다. 

일본 고유의 숙소, 료칸은 장소마다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짚으로 짜여 있는 다다미 바닥과 단순한 장식품이 걸려 있는 벽, 방 안에는 덩그러니 작고 낮은 탁자 하나만 놓여 있어 단정하고 절제된 느낌이다. 깊은 사찰의 수도승이 머물기라도 하는 것처럼 방 안으로 내디디는 발조차 조심스럽다. 늦은 시간에 도착해서인지 이미 후통(일본 이불)이 깔려 있었다. 네모 반듯하게 펼쳐진 다소 도톰한 모양새가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의 배려로 느껴져 ‘객’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여행 전부터 기대했던 온천욕도 잊어 버리고, 비에 젖어 버린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저 하얗고 따뜻한 후통 속으로 들어가 잠들고 싶다는 유혹을 쉽사리 떨쳐 내기 어렵다.

동화 속 외딴 마을 ‘유후인’


ⓒ 트래비

잉어비늘이 금빛으로 빛난다는 뜻의 ‘긴린코 호수’. 바람 한 점,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한낮의 반짝이는 긴린코에서는 금방이라도 금빛 비늘을 가진 잉어들이 툭툭 하늘로 튀어 올라올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긴린코를 들여다보고 호수 주위를 산책하기도 하며 사진도 찍는다. 오리떼를 보면서 즐거워하는 가족들과 산책하는 연인들까지 그 여유롭고 즐거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욕심에 손이 자꾸만 카메라로 가는 것을 꾹 참고 만다. 긴린코가 한눈에 들어오는 카페에 앉아 느긋하게 한낮의 여유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새벽 안개에 싸인 긴린코 또한 매혹적이라고 한다. 

긴린코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세련되고 아름다운 건물이 한 채 보이는데 이곳은 고즈넉한 긴린코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마르크 샤갈 갤러리’다. 작지만 아담하게 잘 꾸며진 갤러리에는 샤갈이 한때 매료되었다던 서커스 그림 38점이 전시되고 있다. 샤갈은 그림을 그릴 때 상상을 하지 않고 바로 삶 그 자체를 그렸다고 하는데 그가 그린 삶의 모습이 때로는 어렵기만 하다. 의미를 헤아리기 어려운 소와 말, 닭 등을 보면 그림이 난해하지만, 아름다운 여인과 꽃 그리고 화려한 색채는 한참 동안 시선을 붙잡는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갤러리에서 내려다보는 긴린코는 한없이 눈부시다. 샤갈과 유후인 그리고 긴린코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하면서도 묘한 공통점이 있다. 평범한 가운데 아름답게 빛을 내며 사람을 한없이 편안하게 하는 힘이 있다. 

유후인역에서 긴린코를 갈 때에는 작은 냇가를 따라 조용하고 한적한 길로 걸어 들어갔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미술관과 가게가 어우러진 거리를 지나왔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건물과 감탄을 금치 못할 만큼 특이한 소품들을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 여고생들 사이에서 몇 번이나 발길을 멈추고 거리에 진열된 소품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일본이 여성 관광객의 선호 여행지 1위에 꼽히는 이유를 알 만하다. 

천천히 길가의 작은 동상들과 진열된 인형들을 들여다보고 이름 모를 과자도 오물오물 맛보며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물 항아리에 손도 넣어 본다. 그렇게 동화 속 마을, 유후인에 푹 젖어 본다. 낮은 건물들과 가게들, 그리고 그곳에 진열된 아기자기한 물건들, 단풍으로 곱게 물든 나무와 그 아래 벤치,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날리며 지나가는 자동차들까지 동화적 상상력으로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마을인 것만 같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도 마을과 어우러져 더욱 행복해 보인다. 토토로 인형을 부둥켜안고 꼬리를 잡아 흔드는 아이와 엄마, 둘만의 밀어를 주고받는 연인들, 인형 같은 강아지와 산책하는 할머니. 이 평화로운 모든 모습들이 어찌 보면 영화 속 설정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유후인에서는 시나리오 없이 단순히 장면 장면을 영화로 찍어도 한 편의 멋진 작품이 나올 것 같다. 한 편의 그림 같은 유후인. 나도 그 안에서 동화 속, 만화 속, 영화 속 주인공처럼 저절로 행복하게 웃음 짓는다. 

이렇게 사랑스런 마을이 만들어지기까지 유후인 사람들의 정성은 가히 드라마와 같다. 1년 내내 갤러리가 열리고, 곳곳마다 따뜻한 온천욕을 즐기는 료칸과 온천탕이 있고, 그림 같은 건물들과 가게들, 작은 공간도 방치하지 않고 아기자기하게 꾸민 도로와 표지판들. 이 모든 것들이 지진이나 거대한 댐 건설, 대규모 골프장 계획이나 리조트 계획으로부터 유후인을 지켜내고 가꾼 이곳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유후인이 더욱 특별하게 보였다.

뜨끈뜨끈 벳푸온천, 말랑말랑 아기피부 


ⓒ 트래비

1. 모래 온천으로 유명한 다케가와라 
2. 온천 직원은 친절하게 이용법을 설명해주었다.
3. 긴린코 옆 쉼터의 우물
4. 평화로운 분위기의 오호리공원
5. 유후인의 작은 가게 앞에서는 주인의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성격을 알 수 있다
.

떠나올 때는 몰랐는데, 뼛속 깊이 추위가 파고드는 겨울임을 새삼 깨닫는다. 두꺼운 옷을 여미고 목도리까지 둘둘 말아 매도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며 발걸음까지도 종종거린다. 하지만 매서운 바람과 혹독한 추위가 있는 겨울일지라도 여기 벳푸에서는 그 겨울을 좀더 여유 있게 맞이할 수도 있겠다. 왜? 온천이 있으니까!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인 선배에게 논문 끝내면 병원부터 가라 했더니 벳푸로 온천을 즐기러 가겠단다. 관절염에 그만이라나. 하지만 정작 그 벳푸에는 내가 와 있다. 온천이 유명한 일본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온천 여행지 벳푸. 벳푸지역 전체가 온천지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별의별 종류의 온천이 다 있다. 규슈지역에서는 마시는 물도, 세수하는 물도, 지하도에 흐르는 물도 모두 온천수이기 때문에 가격이나 장소와 상관없이 따뜻하고 마음 편하게 온천을 즐길 수 있다. 숙소에 딸린 욕조에서 혼자만의 즐거움을 음미할 수도 있고 공용 온천에서 여러 사람들과 가벼운 담소를 즐기거나 멀리 바다가 보이는 노천 온천탕에서 특유의 여유와 낭만까지 즐길 수도 있다.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모래온센’. 유카타로 갈아입고 조심스레 삽으로 가지런히 고른 자리에 누워 본다. 가볍고 스르르 흩어지는 모래를 상상했는데 검은 색에 물을 흠뻑 머금은 따뜻하고 기분 좋은 모래다. 찜질을 하듯이 얼굴만 빼놓고 모두 모래로 덮는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이 마치 이불을 덮은 듯 묘한 기분이다. 

처음 설명을 들을 때는 10분 정도 소요된다는 말에 ‘겨우? 한 시간은 해야지…’라고 생각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모래의 압박감이 슬슬 밀려와 왜 10분인지 금방 알게 된다. 슬슬 잠이 몰려오고 온몸이 나른해질 무렵 온천의 직원이 모래를 걷어 주어 눈을 떴다. 개운하게 땀을 빼고 꿀 같은 단잠을 자서인지 쾌적한 기분으로 모래를 툭툭 털고 일어선다. 가벼운 샤워로 모래를 씻어내고 온천탕에 들어서자 기분 좋은 따뜻함이 온몸을 감싼다. 추운 바람에 소나무 껍질처럼 까슬까슬했던 피부가 온천수에 아기 피부처럼 말랑말랑해진다.

여행을 많이 다녀 보지는 않았지만 여행에서 얻는 가장 큰 감동은 사람이다. 웅장한 성당이나 가슴 벅찬 뮤지컬, 넋을 잃고 바라보던 명화도 흥미진진하지만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이국의 사람들로부터 느끼는 감동이란 늘 잊을 수 없는 여행의 가장 소중한 추억이 된다.    

캄캄한 밤에 도착해 초조하게 초인종을 누르는 객을 반갑게 맞이해 주던 료칸의 노부부. 길을 잘 못 알려 주었다는 것을 알고 다시 알려 주기 위해 부랴부랴  뛰어오던 지팡이를 짚은 초로의 노인. 거리에서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보여 주던 많은 사람들 덕분에 유후인과 벳푸의 따뜻하고 정겨운 인상은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처음부터 ‘화려한 외출’을 꿈꾸지 않았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똑같은 일상을 보내며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이렇게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날이 밝으면 일터로 뛰쳐 나가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기절하듯 쓰러져 잠들어 버리기를 몇 달. 정말이지 쉬고 싶다는 생각에, 지금의 이 바쁜 생활을 잠시 멈추기 위해 여행을 계획했다. 

이번 여행으로 설레고 낯설고 초조하고 신기하고 행복했던 그 힘으로 또 처음 만난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던 그 정겨움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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