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여자, 서울을 다시 보다 "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6.01.1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청명한 가을날 토요일 오후 도심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 보인다. 친구 사이로 보이는 그들의 대화를 들어 보자. ´우리 오늘은 어디에 가지?´, “그냥 만나서 밥 먹고 차 마시고 영화 보고, 이런 거 말고 뭐 다른 거 없나?”, “서울에서 그런 거 말고 할 게 뭐가 또 있겠어?”, “서울엔 정말 갈 데가 없어.” 등등. 여성테마여행, ´여성의 공간으로서의 서울 체험´을 떠나기 전까지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처지였음을 밝힌다.

 
책상 위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자료들 사이로 ‘서울 체험’이란 글자가 적힌 인쇄물이 눈에 띄었다. ‘서울 체험? 무슨 서울 체험? 별로 재미없겠다’라고 생각하며 치워 버리려는 순간 ‘서울 체험’이란 글자 앞에 붙어 있던 말들이 눈에 쏙 들어왔다. ‘여성테마여행, 여성의 공간으로서의 서울 체험’. 너무나 익숙해져 별다른 재미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서울이란 공간이 여성의 공간으로 재탄생한다니,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세계 각지에서 온 베테랑 여성 여행가들과 한국인 여성들이 더불어 참여하는 여성테마여행길에 함께 동행할 수 있었다.

 
- 베테랑 여성 여행가들과 함께 

화창한 가을, 소풍가는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 주위에 앉은 외국인 여성들과 인사를 나눴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로렐 켄달 미국 자연사 박물관 관장과 본인을 ‘여행 디자이너’라고 소개하는 일본의 유명 여행 기획자 오소도 마사코, 그리고 여성 여행자들을 위한 세계적인 여행 사이트(journeywoman.com)를 창립한 캐나다인 에블린 하논 등 그들은 그야말로 베테랑 여행가들이었다. 이들은 여성주의 문화운동 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에서 주관하고 문화관광부가 후원하는 ´여성과 여행´이란 주제로 열린 국제 심포지엄 참가 차 한국을 방문했다가 여성테마여행에 동참하게 됐다. 평생 동안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살아 온 노장 여행가들의 여행담을 듣는 것만으로도 여성테마여행의 시작이 마냥 즐거웠다.

 

 

-여성 여행가의 혼을 느끼다 l 서울시립미술관

 

노련한 여행가들의 여행담에 넋을 잃고 있을 무렵, 여성테마여행 버스는 첫 번째 목적지인 서울시립미술관 앞에 도착했다. 시립미술관이 과연 여성의 공간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궁금해하고 있는데, 여행 기획자로부터 이곳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서양미술가인 천경자 화백의 작품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천경자는 주로 꽃과 여인, 뱀이라는 독특한 모티브로 다양한 작품을 선보여 온 여성 화가로 특히 스스로 여행자가 되어 지구를 몇 바퀴 돌며 제작한 여행풍물화 및 문학 기행화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직접 그곳을 여행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그랜드 캐년의 경관을 ‘젊은 여인의 살갗처럼 부드러운 분홍빛 바위산’으로 표현한 글귀가 적힌 작품을 들여다보노라면 여성 여행자의 남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시립미술관을 나와 최초의 근대 여성교육기관인 이화여고가 있는 정동 지역을 산책하는데 어묵을 파는 포장마차가 보인다. 싸늘한 날씨 속에 외국인, 한국인 가릴 것 없이 모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어묵을 하나씩 들고 행복해졌다. 그러고 보니 어묵을 파는 포장마차의 주인도 여자요, 손님들도 여자라…. 언어가 통하진 않지만 연신 수다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 트래비

 

1. 어묵을 먹고 있는 로렌켄달. 언어는 통하지 않아도 즐거운 미소가 가득.

2. 국사당 굿판에 제물로 바쳐진 돼지 한마리.

3. <론리플래닛>에도 소개돼있는 인왕산 국사당

4. 북촌 한상수 자수박물관에 전시된 화려한 매듭들

5. 정동길 중고 노점에서 한복을 보고 즐거워하는 에블린 하논

6. 많은 여성들이 출산을 기원하기 위해 찾았다던 인왕산 선바위

 

 

여인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섬세한 아름다움을 맛보다 l 북촌

 

좁고 기다란 골목길 사이로 한옥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북촌 한옥마을에 도착하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회귀한 듯한 느낌이 든다. 북촌은 전통적인 한옥이 보존된 지역인 동시에 천연염색, 매듭, 자수, 궁중 음식 등을 전수한 여성 예술인들의 전시 공간이기도 하다. 중요무형문화재 자수장인 한상수 선생의 자수 박물관에 들어서니 여성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색색의 화려한 아름다움에 절로 감탄사가 쏟아져 나온다. 나이 예순이 넘은 외국인 여성 여행가들도 안경까지 고쳐 끼고 적의, 활의, 골무, 방석 등에 수놓인 화려한 자수를 쳐다보며 “베리 굿(very good)", "원더풀(wonderful)"을 연발한다.

 

“마녀 같다고요?”   l 인왕산 국사당

 

점심을 먹고 일정표를 보니 다음 코스가 인왕산 국사당이란다. ‘독립문역 지하철역 근처에 있는 그 인왕산? 여성의 공간으로서의 서울을 체험하는데 웬 인왕산?’ 정말 생뚱맞다고 생각하며 산을 오르는데 어디선가 방울 소리, 북소리가 들려온다. 소리의 근원지는 바로 인왕산에 위치한 국사당이었다. 무당(巫堂)으로 유명한 국사당에서 한판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굿판을 직접 보기는 태어나서 처음이라 마냥 신기해하며 구경하고 있다가 파란 눈의 젊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한국에서 평생 살아 온 나도 이곳이 처음인데, 저 외국인 여자는 어떻게 이런 굿판을 보러 온 걸까?’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뚜벅뚜벅 걸어가서 말을 건넸다.

 

 

“한국에 사세요?”
“아니요, 미국 뉴욕에 사는데 일 때문에 한국에 왔다가 여행 중이예요.”
“근데 이곳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요?
그녀는 말없이 책 한권을 내게 들어 보였다. <론리 플래닛 한국편(Lonely Planet Korea)>이었다.
“론리 플래닛에 이곳이 소개돼 있어서 찾아왔어요.”
“굿하는 거 보는 느낌이 어때요?”
“좀 낯설긴 하지만 흥미로워요.”
“굿을 하는 무당을 보면서는 어떤 느낌이 들어요?”
“마녀(witch) 같아요.”
  ⓒ 트래비                          “……”

 

오랫동안 굿판이 이어지던 국사당 근처에는 한국인보다 오히려 외국인들이 더 많다. 한국인들도 잘 오지 않는 이곳을 어떻게 외국인 여행자들이 찾아오는지 궁금했는데, 독일에서 혼자 여행 중이라던 남자도, 캐나다에서 온 노부부도, 미국에서 온 젊은 연인도 모두 손에 <론리 플래닛>을 들고 있었다. <론리 플래닛>에도 소개돼 있는 인왕산은 전국에서 온 무속인들의 기도지로 유명한 곳이며 인왕산 국사당이 ‘여성의 공간으로서의 서울 체험’ 일정에 포함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행사를 준비한 측은 “유교가 남성 중심적 사회를 구축한 사상이었다면 토속 신앙인 무속은 여성이 주관하고 여성의 삶 제반에 관여하는 종교이자 일상적인 의례이며 역사적으로 여성 무속인들은 사제(司祭), 주의(呪醫), 예언자로서 다양하게 활동해 왔다”고 설명했다. 국사당 옆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수많은 여성들이 출산을 기원하기 위해 찾았다던 기자암 ‘선바위’가 있다. 우리가 인왕산을 찾았던 그날도 선바위 앞에는 두 손 모아 무언가를 간절히 기원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그렇게 인왕산에서 한참의 시간을 보내고 내려오는 길에서야 왜 인왕산 국사당이 ‘여성의 공간´으로 분류되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여자라서 행복해요 l 여성 전용 카페 및 클럽 그리고 찜질방

 

ⓒ 트래비

조용한 산을 내려와 다시 번잡한 속세(?)로 내려왔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뒷풀이를 하기 위해 여성 전용 카페와 클럽이 모여 있는 홍대 앞으로 갔다. 점원부터 손님들까지 모두 여자들만 있는 여성 전용 카페나 클럽에는 묘한 편함이 있다. 마치 여자고등학교 교실 같은 분위기라고 할까? 여성 전용 카페와 클럽은 여성들끼리 모여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공간으로, 이곳에서는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것 외에도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 전시나 파티, 세미나 등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진다. 카페나 클럽에서 한껏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선 마지막 코스는 여성 전용 찜질방이다. 혼자 여행하는 여자들을 위한 여행 사이트를 운영하는 에블린 하논은 한국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 바로 찜질방이라고 했다.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이자 여성 여행자들이 저렴한 가격에 숙박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그녀는 나중에 한국을 혼자 여행하는 여성들에게 여성 전용 찜질방을 권해 주고 싶다고 했다.

 

서울, 여자들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다

 

이렇게 ‘여성의 공간으로서의 서울 체험’ 하루 일정이 끝났다. 이날 함께했던 한국인 여성 참가자들의 반응은 모두 한결같았다. “서울이 다시 보이는 거 있죠. 엄마랑, 친구랑 다시 한 번 이 코스대로 여행하고 싶어요.” 정말이다. 늘 ‘거기서 거기’ 같던 서울 곳곳을 ‘여성의 공간’이란 주제로 다시 더듬어 다니다 보면 서울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엄마랑, 혹은 언니, 동생이랑, 아니면 친구들끼리 서울 속에 숨어있는 여성들의 공간을 찾아 한 번 과감하게 나서 보자.

 

 

베테랑 여성 여행가들을 만나다

 


인터뷰 1  에블린 하논(´journeywoman.com´ 창립자, 편집위원/ 캐나다)

 

ⓒ 트래비

그녀는 14세 때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20세 때 그 남자와 결혼했다. 하지만 23년 후 이혼을 하고 이혼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42살이라는 나이에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20년 넘게 여행을 하면서 쌓인 노하우로 혼자 여행하는 여성들을 위해 ‘journeywoman.com’이라는 사이트를 개설했고, 2001년 <타임>지가 뽑은 ‘새로운 세기, 혁신적 사고의 인물 100인’ 명단에 올랐다.

 

그녀에게 여성들이 혼자서도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그녀는 처음에 혼자 유럽에 갔을 때, 자신이 입고 있던 눈에 띄는 옷을 벗어버리고 현지 가게에서 차분한 회색 옷을 사 입어 최대한 현지 사람들과 비슷하게 보이도록 했단다. 그 다음에는 슈퍼마켓에 가서 쇼핑백을 얻어 몇 가지 잡화를 산 후 그 가게에서 받은 쇼핑백 안에 카메라와 손가방 등을 넣고 다녔다고 했다. 그녀는 혼자 여행할 때는 남들에게 ‘보여지는 대상’이 되기보다는 내가 남들을 ‘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안전하다고 말했다. journeywoman.com 사이트에 들어가면 그 외에도 다양한 여행 노하우를 배울 수 있다. 그녀의 나이 67세. 그녀는 지금도 여행 중이다.

 

인터뷰 2 오소도 마사코(여행 기획자, ´(주)지구는 좁다´ 대표/ 일본)

 

ⓒ 트래비

그녀는 20대 때 ‘여성들의 홀로 여행’을 추진했다. 29살 때 아이를 가졌으나 여행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녀는 딸이 7살이 됐을 때 함께 배낭을 메고 유럽으로 50일 동안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40대부터 20년 넘게 장애인과 고령층을 위한 여행을 추진하고 있다. 그녀는 장애인들을 데리고 몽골 고비 초원 여행, 아프리카 동물 사파리 여행은 물론 오로라를 보는 북극권 여행도 추진했다. 60대 중반을 넘긴 그녀는 고령층과 장애인들도 여행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며 앞으로도 그들을 위한 여행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인터뷰 3 로렐 켄달(미국 자연사박물관 관장/ 미국)

 

ⓒ 트래비

그녀는 컬럼비아대학교 인류학과 협력 교수로도 활동하며 한국어에도 능숙하고 한국에서도 생활한 적이 있다. 뉴욕 소재 미국 자연사박물관 관장인 그녀에게 뉴욕으로 혼자 여행가는 한국 여성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곳을 물어봤더니, ‘하우징 워크(Housing Works)’라는 비영리단체가 운영하는 ‘북카페’를 추천했다. 새책과 헌책은 물론 희귀도서까지 다양한 책들을 접할 수 있으며 간단한 식사와 맥주 및 와인까지 즐길 수 있단다. 뿐만 아니라 라이브 음악 등 특별한 이벤트도 진행되기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휴식을 취하고 다양한 뉴요커 친구들도 사귈 수 있는 최고의 장소라고 말했다. 큰 돈 들이지 않고 진정한 뉴욕을 맛볼 수 있는 곳이라며 격찬했다.

 

 

 

-주간여행정보매거진 트래비(www.travie.com)
저작권자 ⓒ 트래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트래비 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최신기사
트래비 레터 요즘 여행을 알아서 쏙쏙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