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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새해에 만나는 국내 근대문화유산 1호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7.01.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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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라는 숫자가 유난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새해 첫 주, ‘늘 하던 그런 거’ 말고 뭔가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을 벌이고 싶다 울부짖던 트래비씨.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 고민하던 끝에 머릿속에 번뜩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1월, 각양각색의 1호들을 찾아 떠나 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우리나라 자장면집 1호는? 호텔 1호는? 지폐 1호는? 대중가요 1호는?…. 수많은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글·사진   김수진 기자

☞ 트래비씨가 인천으로 간 까닭은

1호를 찾아 어디로 떠나 볼까 고민하던 트래비씨가 선택한 여행지는 인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알기 힘들지만 트래비씨가 인천으로 간 까닭은 분명하다. 개항장이었던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 역사의 중요한 무대로, 인천에 가면 근대 역사 현장과 근대문화유산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거리 곳곳에 근대문화유산이 가득한 인천은 누구의 말처럼 ‘지붕 없는 근대유산 박물관’이었다.

최초 자장면집 공화춘


ⓒ트래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국민 음식’ 자장면. 중국 음식이란 이름을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중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음식이 바로 자장면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장면은 중국 음식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지극히 한국화된 중국 음식이기 때문이다.

누가 언제 처음으로 자장면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100여 년 전 인천에서 자장면의 생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천항 개항과 함께 각국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중국인을 비롯한 많은 외국인들이 인천으로 들어오게 됐고 그와 함께 중국요리(당시로서는 청요리)가 인기를 끌게 됐던 것. 값비싼 청요리들이 주를 이룬 가운데, 부두 노동자들을 위한 값싸고 먹기 편한 중국요리가 태어났으니 그게 바로 자장면이다. 돈도 별로 없고 식사에 긴 시간을 투자할 수 없는 부두 노동자들에게 자장면은 일명 3박자(싸고, 빨리 먹고, 배가 부르다)가 고루 맞는 음식이었다. 

볶은 춘장에 국수를 비벼 먹는 이 중국요리가 자장면이란 이름을 달고 처음으로 판매되기 시작한 곳이 인천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공화춘으로 알려져 있다. 호화롭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공화춘에서 값싼 자장면을 팔았다는 게 이치에 맞지 않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자장면 역사는 1905년 공화춘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2005년을 ‘자장면 탄생 100주년’으로 경축했던 것도 바로 이를 근거로 했다. 

최근 그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246호로 등록된 공화춘은 1983년까지 영업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폐허처럼 허름한 건물만 남아 있어 그 옛날 화려한 중국요리점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 규모만큼은 당시의 번성을 말해 주고 있다. 현재는 건물 내부로 들어갈 수 없고 외관만 볼 수 있지만, 인천 중구청이 이곳을 자장면 박물관으로 바꾸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만큼 이후에는 자장면집 1호, 공화춘을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자장면집 1호는 사라졌어도 자장면은 남아 있다

자장면집 1호, 공화춘은 현재 건물만 남아 있고 영업은 하지 않기 때문에 아쉽게도 이곳에서 자장면을 맛볼 수는 없다. 하지만 공화춘이 위치한 차이나타운 내 다른 중국집들에서 자장면을 맛볼 수 있다. 우선 차이나타운 본통에 위치한 화려한 건물의 ‘공화춘’을 볼 수 있다. 옛날 공화춘과는 별다른 연관성은 없고 이름만 같지만 어쨌든 그 이름 덕에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또 주목할 만한 곳으로는 태화원이 있다. 이곳은 옛 공화춘 주방장 후손이 운영하는 곳으로, 부친으로부터 중국요리 비법을 전수 받아 벌써 3대째 가업을 이어 가고 있다. www.ichinatown.or.kr

ⓒ트래비

인천에 자장면만 있나~ 쫄면도 있고 사이다도 있다!

자장면 외에도 인천에서 태어난 것들은 생각보다 많다. 

쫄면 쫄면의 원조가 인천이라는 사실, 알고 있었는지. 쫄면의 탄생 배경이 재미있는데, 1970년대 초 인천시 중구 경도에 있는 광신제면이라는 냉면공장에서 직원이 면을 뽑는 사출기 구멍을 잘못 조절해 원래보다 굵은 면이 나오게 됐던 것. 버리기는 아까워서 인근의 ‘맛나당’이란 분식점에 그 면을 줬고 분식점 주인은 그 면에 고추장 양념을 곁들여 팔았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이렇게 탄생한 음식이 바로 쫄면이다. 쫄면이란 이름은 분식점 주방장이 면이 쫄깃쫄깃하다고 해서 ‘쫄면’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됐다.

성냥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란 노래가 괜히 탄생했을까? 우리나라 최초 성냥공장이 바로 인천에 존재했다. 인천에 성냥공장이 들어선 시기는 1886년. 초기에는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했으나 1917년 이후 인천에서 성냥 산업이 크게 번창하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의 성냥공장이 사라진 상태지만 한때 성냥은 인천을 대표하던 산업으로 꽃을 피웠다.

사이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 있어도’라는 구절도 있듯이 인천과 사이다는 큰 관련이 있는데, 바로 사이다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샴페인사이다가 인천탄산수제조소에서 탄생했고 이후에도 인천에서 만들어진 사이다가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초 서구식 공원 인천 자유공원

어느 지역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공원이지만 인천 자유공원은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 서구식 공원인 자유공원은 서울에 위치한 파고다공원보다 9년 앞선 1888년 조성됐다. 인천항 개항과 함께 응봉산 일대에 일본, 청나라,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여러 나라들이 만국지계를 형성하면서 공동명의로 각국공원(만국공원)이란 이름으로 공원을 조성했고 1914년 각국 거류지가 철폐된 이후에는 서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 동상이 세워진 1957년 10월3일, 지금의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인천 시민들이 모여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고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자유공원은 공원이 주는 한가로운 이미지보다는 뼈아픈 우리 역사를 보여 주는 격정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지금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과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문제로 논란의 한가운데 서 있는 자유공원. 100년도 훨씬 넘는 세월 동안 인천 앞바다를 굽어보며 격동의 역사를 지켜본 자유공원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까?
 
최초 등대  팔미도 등대

우리나라 바다를 밝히고 있는 수많은 등대 중 가장 먼저 불을 밝힌 등대는 바로 인천 앞바다에 자리한 팔미도 등대이다.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8km 지점에 위치한 바위섬인 팔미도에 우리나라 최초 등대가 들어선 시기는 1903년. 정확히 말하자면 1902년 5월 건축에 착수, 1903년 4월 준공, 같은 해 6월1일 한국 최초의 등대가 불을 밝혔다. 

팔미도에 최초의 등대가 세워지게 된 역사적 배경을 보자면, 인천항 개항과 함께 일본 및 서구 열강들이 인천항을 전진 기지로 삼고자 했고 결국 일본인들이 프랑스 표지 회사 기술을 이용해 팔미도에 등대를 설치했다. 팔미도 등대는 일본에 의해 러일전쟁 당시 이용됐고 이후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의 신호탄이 되기도 했다. 

처음 건립 당시에는 90촉광짜리 석유등을 사용했으나 1954년 9월부터 자가 발전시설을 갖추고 백열등으로 불을 밝혔고 1967년에는 수은등으로, 1981년 할로겐으로, 마침내 1992년에는 태양광발전 장치로 변화했다.

인천 앞바다 내항과 외항을 구분하는 분기점 역할을 하며 한국의 역사를 온몸으로 밝혀 온 팔미도 등대는 현재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40호로 지정돼 있다.


ⓒ트래비

최초 호텔   대불호텔

개항과 함께 많은 외국인들이 출입하던 인천에 우리나라 최초 호텔이 생긴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인천으로 들어온 이들 중 상당수는 서울이 목적지였으나 교통편이 좋지 않던 당시로서는 바로 서울로 이동하기가 어려워 인천에서 하룻밤 정도 머무르곤 했다. 이에 호텔의 필요성을 느낀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가 1888년 일본 조계지에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을 건립하고 영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철도 개통과 함께 호텔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1918년 중국인에게 넘어가 ‘중화루’라는 중국요리집으로 바뀌었고 결국 1978년 건물이 철거됐다. 

현재는 이 터에 다른 건물이 서 있으며 건물 앞에 있는 안내판만이 이곳에 우리나라 최초 호텔이 존재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곳도 있어요!

최초 감리교회  내리교회 ㅣ 1885년 7월19일 아펜젤러에 의해 창립된 인천 내리교회는 우리나라 최초 감리교회이다.
최초 근대식 초등교육 기관 영화학당 ㅣ 인천 동구에 위치한 영화초등학교는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초등교육 기관이었던 영화학당이 있던 자리다. 영화학당은 1892년 내리교회에서 설립했으며 현재는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최초 독(dock) 인천항 독 ㅣ 일제강점기시대 일본에 의해 인천항에 한국 최초의 독이 만들어졌으며 당시 이는 동양 유일의 독이었다.

최초 근대 기상관측소 인천관측소 ㅣ 우리나라 최초 근대 기상관측소는 1904년 일본에 의해 건립된 인천관측소다. 인천관측소는 중앙기상대 역할까지 담당했으나 광복 후에는 중앙기상대 업무가 서울로 이전되면서 그 기능이 점점 축소됐다. 자유공원에서 제물포고등학교 쪽을 바라보면 산 위로 우뚝 솟은 흰색 건물이 보이는데 이 건물이 인천기상대(옛 인천관측소)다.

최초 서양식 주택  세창양행 사옥 ㅣ 독일계상사 세창양행이 1884년 인천에 건축한 사옥이 국내 최초 서양식 주택으로 알려져 있다.

알찬 탐방을 위해 기억해야 할 곳!

인천 근대건축물을 한눈에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인천 중구 일대를 돌며 역사적인 근대 건축물들을 찾아보는 탐방을 마친 후 꼭 들러봐야 할 곳이 있는데 바로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이다. 옛 일본18은행 건물에 들어선 이 전시관은 개항기 인천 중구의 모습과 현존 및 실존 건축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힘들었던 근대 건축물들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의미가 있다. 

2006년 9월 개관. 운영시간은 하절기는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동절기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매주 월요일은 휴관. 입장 무료. 032-760-7549

지킴이와 함께 배우며 돌아본다  해반문화사랑회



자세한 설명과 함께 인천의 역사 현장을 탐방하길 원한다면 인천 해반문화사랑회에 연락을 해보자. 해반문화사랑회는 인천에 존재하는 수많은 근대문화유산을 보존 및 관리하기 위해 인천근대문화유산지킴이를 양성하고 있는데 이들 지킴이들이 학생 및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안내 활동을 해주고 있다. 해반문화사랑회에 연락을 하면 지킴이의 설명을 들으며 인천에 존재하는 근대문화유산들을 돌아볼 수 있다. 

032-761-0555/ www.haeban.org




ⓒ트래비

다른 곳엔 어떤 1호들이 있나?

최초 근대묘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은 우리나라 근대화에 앞장섰던 많은 유명 외국인들이 그들의 자녀와 함께 안장된 곳으로 17개국 약 430기 묘가 조성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 근대묘지로 알려진 이곳은 근대 묘지 형성 과정과 비문의 변천사를 연구할 수 있는 역사 학습의 장이 되고 있다.

위치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144/ 지하철 2호선, 6호선 교차하는 합정역 7번 출구 근처

최초 해저터널
통영 해저터널

통영 해저터널은 1927년 일본에 의해 착공돼 5년 만에 완공된 한국 최초이자 아시아 최초 해저터널이다. 길이 483m, 폭 5m, 높이 3.5m 규모로 통영과 미륵도를 연결하고 있다. 구조 자체도 견실하고 보존 상태도 양호해 현재도 많은 이들이 이용하고 있다.  

위치  경남 통영시 당동에서 통영시 미수2동 사이

최초 다목적댐
섬진강댐

국내 최초로 건설된 다목적댐은 전북 임실군 강진면과 정읍시 산내면 사이에 위치한 섬진강댐이다. 1965년 완공된 섬진강댐은 콘크리트 중력식 댐으로 댐 높이 64m, 제방길이 344.2m, 저수용량 4억6,600만톤이다.

최초 철도교
한강철도교

1900년 건립된 한강1철도교가 국내 최초 철도교이자 한강 최초 다리이다. 이후 2철도교가 1912년에, 3철도교가 1944년에 건립됐다. 규모는 1철도교가 폭 5.6m, 길이 1,113.6m이고 2철도교가 폭 5.6m, 길이 1,110.07m, 3철도교가 폭 10m, 길이 1,113m. 한국전쟁 당시 3개 교량 모두 폭파된 이후 3철도교는 1957년, 1철도교와 2철도교는 1969년에 오늘날의 모습으로 복구됐다.  

위치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에서 동작구 노량진동 사이

최초 대중가요 희망가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앉아서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풍 중에 또다시 꿈같도다“
우리나라 최초 대중가요로 추정되는 ‘희망가’다. 외국 곡에 우리말 가사를 붙여 만든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시대 민중의 정서를 잘 담아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큰 인기를 누렸다.

ⓒ트래비

최초 지진 방지 건물
남대문로 한국전력 사옥

1928년 경성전기주식회사 사옥으로 건립한 건물로, 한국 최초로 내화·내진설계를 적용하고 엘리베이터가 설비되고 유리블럭이 건축 재료로 사용돼 눈길을 끌었다. 광복 후 2개 층이 증축되었고 현재는 한국전력 사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우리나라 등록문화재 1호에 올라 있다.  위치  서울시 중국 남대문로 2가 5

근대문화유산 동산(動産) 분야 1호
순종어차와 순종황후어차

순종황제와 순종황후가 타던 어차가 근대 동산 유산으로는 처음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순종어차는 미국 GM사가 1918년 제작한 캐딜락 리무진, 순종황후어차는 영국 다임러사가 1914년 제작한 리무진으로 두 차 모두 내부에 황실문장인 이화 문양이 곳곳에 장시돼 있다. 국내외 전문기관에서 수년간에 걸쳐 어차를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한 후 2001년부터 항온항습시설이 설치된 창덕궁 어차고에 보존 및 전시하고 있다. 물론 일반인도 관람 가능하다.

최초 지폐
100원짜리 조선은행권

옛 조상들의 생활상을 보여 주는 사극 등을 보면 엽전을 사용하는 풍경은 있어도 지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지폐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언제쯤일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제작됐던’ 지폐는 호조태환권(1893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제작만 됐을 뿐 전혀 사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최초의 지폐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당시 정부가 호조 관장 하에 이 지폐를 만든 목적은 당시 화폐로 사용되던 엽전을 회수하고 새로운 화폐를 정착시키려 목적에서였다. 하지만 당시 화폐 업무를 담당한 일본인들의 운영권 다툼 때문에 한 장도 사용되지 못한 채 모두 소각되고 말았던 것. 이후 나온 지폐는 모두 일제강점기시대 일본에 의해 제작된 지폐로 우리나라 돈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결국 우리나라 최초 지폐는 광복 후 가장 먼저 사용됐던 100원짜리 조선은행권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도 화폐업무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모두 일본인이었으므로 액면, 모양, 도안도 그들의 주도하에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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