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주후면(先酒後麵)이라는 말이 있다. 고기와 술을 먹은 후에 면을 먹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고기 집에서 고기를 먹으면 냉면이 따라 나오는 경우가 많다.

냉면으로 가장 유명한 것이 평양냉면이다. 그러나 남한에서 평양냉면이라고 불리는 물냉면은 대개가 원래의 평양냉면의 맛과는 상당히 다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원래 평양냉면은 담백하다. 이것을 대다수의 남한사람들은 밍밍하다고 느낀다. 어느 것이 좋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밍밍한 것 같지만 깊은 맛’에 중독되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강남에서 평양냉면의 정통적인 맛을 볼 수 있는 곳으로는 안세병원 뒤에 있는 ‘평양면옥’이 있다. 평양의 대동냉면으로 시작해 이곳에 이를 정도로 정통의 맛을 자랑하는 집이다. 메밀이 많이 들어간 까칠하지만 고소한 면과 시원한 육수가 잘 어우러진 맛이 일품이다. 그에 비해 삼성동에서 대치동으로 가는 길에 있는 ‘우래옥’은 훨씬 세련된 맛을 낸다. 육수나 면도 밍밍하지 않다. 연륜이 느껴지는 맛이다.

우래옥이나 평양면옥은 강북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이어오다가 강남에 분점을 낸 경우이다. 평양냉면을 제대로 하는 집들은 전부 북한 분들이시다. 왜 남한사람들은 그런 맛을 못 낼까. 아마도 맛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이 달라서일 것이다. 평양냉면이 가진 ‘찡한’ 맛의 본질을 남한사람들은 유전자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강남에 새로 생긴 평양냉면집 또한 독특한 곳이다. 레스토랑 이름은 ‘그릴 에이치(Grill H)’다. 평양냉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과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다. 위치한 곳도 청담동이다. 한우등심과 호주산 스테이크 그리고 평양냉면이 3대 메뉴이다. 평양냉면의 맛은 정통에 가깝다. 육수가 만만치 않다. 양지육수와 동치미국물에 꿩육수를 섞었다. 복잡하고도 깊은 맛이 우러난다. 육수의 온도도 역시 적당하다.

육수만큼 중요한 면도 메밀이 많이 함유되어 뚝뚝 끊어진다. 직접 찬물에 반죽해서 뽑아낸 면이다. 육수가 적당히 스며들어 면의 고소함과 까칠함이 배가된다. 면에 조예가 깊은 오너의 철학이 배어 있다. 같이 먹는 겉절이도 독특하고 달다. 설탕의 단맛이 아닌 좋은 배추의 달달한 맛이 냉면과 잘 어울린다.

냉면만 먹기에는 아까운 집이다. 스테이크가 일품이기 때문이다. 이 집의 자랑 중에 하나인 티본스테이크를 ‘미디움 웰던’상태로 먹어 보았다. 향이 미각을 자극한다. 소금과 후추, 그리고 올리브 오일만을 향신료로 사용했다. 그만큼 고기에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다.

티본은 뼈를 경계선으로 등심과 안심을 먹는 재미가 있다. 등심은 ‘터프’(호주인 쉐프가 사용한 말이다. 안심에 비해 퍽퍽하다는 의미다)하다. 등심에 붙은 기름 부분과 먹는 맛이 색다르다. 안심 부분은 적당한 질감과 부드러움이 고기 먹는 맛을 제대로 내준다. 스테이크를 먹고 나서 물냉면을 먹는 색다른 경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전화: 02-3446-55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