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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철의 하얼빈에서 온 편지 ③ 코레아 우라!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7.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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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09년 10월22일. 북국의 겨울은 이미 당도해 있었고, 만주벌판을 거침없이 내달리던 바람은 도시의 구석구석을 후비며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열차는 대륙의 찬 공기를 가르며 어둠이 깃든 하얼빈으로 숨어들 듯 미끄러져 들어온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열차에서 플랫폼으로 내려서는 한 사내, 유순한 눈빛을 가졌지만 날렵한 콧수염이 그를 오래 기억하게 한다. 

26일 오전 9시. 그는 하얼빈 역 대합실에서 차를 마시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군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 사이로 한 노인이 걸어 나온다. 어느새 대합실을 빠져 나와 백발의 노인을 응시하던 사내는 일순 눈을 빛내더니 품속에서 브라우닝 권총을 빼어들었다. 얼어붙은 하늘을 깨어 부술 듯 메아리치는 몇 발의 총성,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지고, 그 사내는 두 손을 높이 올려 외친다. “코레아 우라(대한독립만세)!”

내가 하얼빈에 도착한 이후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하얼빈 역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 서 있던 자리를 꼭 한번 쓰다듬어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대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는 지금의 하얼빈 역은 최근 신축공사를 한 듯 그의 발자취를 더듬기가 쉽지 않았다. 플랫폼으로는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후 기차표를 예매하기 위해 가까운 대행소를 마다하고 다시 하얼빈 역을 찾았을 때도 헛걸음이었다. 짧은 중국어와 온갖 몸짓을 동원해 역 직원들에게 안중근을 설명하고 그 장소를 물었지만 잘 모르겠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옌볜으로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출구로 향하는 대열에서 빠져나와 플랫폼을 걸었다. 어디쯤이었을까? 가지고 있던 정보라고는 플랫폼 바닥에 세모와 네모로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위치를 표시해 놓았다는 것뿐이었다. 12시간의 기차여행으로 몸은 피곤했고 이제 그만 포기할까 하던 순간, 네모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네모를 향하고 있는 세모의 꼭짓점은 꼭 안중근 의사의 날렵한 콧수염만 같았다. 

사실 하얼빈 역의 신축공사가 진행되면서 그의 흔적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지난해 여름 하얼빈시 당국은 한국 주간 행사를 실시하면서 시내 곳곳에 안중근의 자취를 엿볼 수 있는 기념물을 세우는 한편, 거사 현장인 역사 내에도 ‘세모와 네모’라는 성의(?)를 보였다고 한다. 허나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한 탓인지 세모와 네모 주변에는 아무런 표지도 없었다. 말이 없는 세모가 지나가는 이들의 발목을 붙들지 않는 이상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었다. 난 쭈그리고 앉아 가만히 세모에 손을 올려 보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졌던 네모와의 거리는 10m가 채 되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하얼빈을 찾은 것은 그의 나이 서른하나의 일이다. 2007년 내가 세모 위에 선 것도 서른하나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 이토 히로부미 저격 등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서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분명 부끄러움이었다. 31살의 그가 하얼빈을 방문한 목적과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너무나 달랐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외칠 수 있는 한 마디는 무엇일 수 있을까, 혹은 무엇이어야 할까 자문해 보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안중근 의사가 거사 직전에 지었다는 <장부가>의 한 구절이다. 물론 모든 시대가 영웅을 필요로 하는 것도, 모든 이들이 영웅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일말의 주저함이나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삶의 당위와 확신은 있어야 했다. 아침 7시, 난 텅 빈 1번 플랫폼의 세모 위에 서서 네모를 향해 검지를 빼어들고 ‘탕’하고 소리 내어 보았다. 내 무딘 손가락 끝에서부터 발사된 가상의 총알이 어디로 날아가고 있는 것인지 난 ‘아직’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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