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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철의 하얼빈에서 온 편지 ⑩ 하얼빈, 짜이찌엔!"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7.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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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비는 지난 2월 중국 하얼빈으로 ‘조금 긴 여행’ 길에 오른 Travie writer 서동철 기자의 ‘하얼빈에서 온 편지’를 이번 호부터 약 10회에 걸쳐 격주로 연재합니다. 서기자를 통해 듣는 중국의 현지 문화와 생활 체험담, 그리고 속 깊은 여행 단상들이 독자 여러분들께 간접 체험의 즐거움을 안겨 드릴 것입니다.    

 




여름이 되면 하루해가 길어지기 마련이지만 하얼빈은 백야를 방불케 한다. 늑장을 부리던 해가 서편으로 넘어가면 새벽 3시가 되기도 전에 날이 밝아 와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하곤 했다. 듣기로는 헤이룽장성의 북쪽 끄트머리, 러시아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모허라는 국경도시는 6월경이면 하루 22시간 동안 해가 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즈음에는 오로라까지 바라볼 수 있다고 하니 북극이 따로 없을 정도다.


태양은 떠올랐지만 모두가 잠에 취해 있는 시간, 잠을 이룰 수 없을 때 산보를 나서면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 속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는 거리엔 휴지조각만이 바람에 날리고, 이미 지평선을 넘보는 해는 도시의 구석구석을 비춰내지만 텅 빈 도로와 골목은 스산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동토라 알려진 하얼빈도 여름은 뜨겁고 활기차다. 성소피아 성당 앞 광장에선 조명을 받은 분수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아이들은 옷이 흠뻑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줄기 사이를 뛰어다니며 장난을 친다. 어른들은 빙 둘러서서 화려한 빛깔의 중국 제기를 차거나 양고기 꼬치구이에 맥주를 마시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젊은 남녀들은 세상 한가운데 저희들만 있는 듯 한국에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진한 연애행각을 벌인다. 

겨울의 끄트머리에 도착해 여름의 한복판에 하얼빈을 떠나는 심정은 처음 한국을 떠나올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또다시 긴 여행길에 오르는 것 같았다. 지나온 시간들은 몇 장의 사진처럼 인상적인 장면들로만 기억에 남아 아련하고, 한번도 가보지 못한 목적지는 미지의 것에 대한 설렘과 낯선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뒤범벅된 채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불어난 짐을 택배로 먼저 붙이고 다롄(대련)행 기차에 올라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데 여든은 족히 돼 보이는 한 노인이 맞은편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구릿빛 피부에 주름살 가득한 노인의 얼굴에 햇볕이 비쳐들어 골을 더욱 깊게 만들어 주었다. 시간은 분명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두었건만 난 그 노인이 걸어온 길을 가늠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는데 그때 해주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이제부터 시간은 쏜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갈 것이라고, 지금의 1년은 20년의 20분의 1이지만 서른이 되면 30분의 1, 마흔이 되면 40분의 1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그렇게 가속도가 붙어 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불확실한 선택을 해야 하고, 선택한 그 길을 가야 하며, 후회할 시간도 모자란 채 또 다른 갈림길 앞에 서야 할 것이다. 그 와중에 만나고 헤어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 가볍거나 때로는 육중한 인연을 만들며 여정을 이어간다. 

할아버지는 호기심에 가득 찬 것 같기도 하고 공허한 것도 같은 눈길을 창밖에 던지고 있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어떠한 시선을 보내는가의 문제라고 할아버지는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것이 인생이건 여행이건 주어진 길을 걸으며 따뜻하고 호기심 어린 눈길로 세상을 본다면 그만큼 세상은 흥미롭고 훈훈할 것이라고 말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오늘 내가 묶어야 할 숙소도 알지 못한 채 열차는 다롄이 속해 있는 랴오닝(요녕)성에 들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 땅은 넓고, 사람은 많고 많았다. 걱정할 것이 없었다. 

내가 하얼빈 행을 결정한 이유가 ‘만주벌판과 안중근’이라는 두 단어에 불과했던 것처럼 다롄으로 향하는 동기는 단순했다. 중국의 많은 도시들과는 달리 깨끗한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다는 것과 꼭 한번은 바다가 있는 도시에서 살아 보고 싶다는 오랜 소원이 그것이었다. 베이징 사람들이 여름휴가지로 즐겨 찾는다는 다롄. 아닌 게 아니라 짐을 짊어 메고 역을 나서니 하루짜리 관광 상품이나 자기네 숙소 사진을 들고 달려드는 호객꾼들로 왁자지껄하다.
 
방향을 잡지 못하고 멍하니 서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어디선가 바다의 짭조름한 냄새가 싱그럽게 묻어나고 있었다. 시간이 제아무리 무섭게 흘러간다 한들 새로운 것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신선하고 재미있는 것. 문득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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