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순간> 저자 윤경희 디자이너 - 여행, 느리게 그리고 천천히"

2009-07-22     트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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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듣는’ 것은 ‘하는’ 것만큼 맛있다. 같은 곳을 여행했음에도 느낀 것이 달라 깜짝깜짝 놀라거나 혹은 연신 맞장구를 치며 다시금 그때의 기억으로 회귀하는 재미. 이런 연유로 인터뷰를 즐겨 하는 기자는 카페에 앉아 오래전 함께 여행한 친구를 만난 듯 수다를 떨며 그녀가 안내하는 여행길에 올랐다.

  이민희 기자   사진제공  윤경희


#1. 디자이너 윤경희의 여행

그녀의 직업은 디자이너. 글 쓰는 직업은 가져 본 적이 없어서인지 흔히 ‘글 쓴다’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오묘한 기운도 없었다. 특이점이 있다면 인터뷰는 해도 사진만은 안 찍겠다는 고집 정도. 여행에 미쳐, 여행만 하며 산 것도 아니다. 사진을 배운 적도 없다. 카메라도 충무로의 비좁은 카메라 골목에서나 찾아봄직한 중고 필름 카메라에 50mm 단렌즈를 끼운 게 전부다. 그런 그녀가 ‘책 한 권 쓰는 게 소원’이라며 여행책을 냈다. 당장 짐을 싸게 할 만한 대단한 사진도 없고 낯선 길을 인도할 친절한 설명도 없다. 

그녀의 책에 또 하나 없는 것은 관광명소다. 여행책이 맞나 싶을 정도로 뮤지엄, 카페, 각종 소품, 골목 풍경, 자유로운 사람들의 표정만 가득하다. 근데, 신기하다. 이런 여행도 있구나 싶다. 여행이라기보다는 산책하듯 걸어온 길. 느릿느릿 걷고, 지치면 쉬면서 사람들과 눈을 맞추곤 했던 그녀의 시선이 사뭇 신선하고 정감 있게 느껴진다. “언젠가부터 관광명소는 잘 가지 않게 됐어요. 대신 낡은 화력 발전소를 개조해 만든 영국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Museum)’, 파리의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같은 개성 있는 갤러리를 찾아다니는 편이에요. 신진 디자이너들과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보며 그들 문화의 흐름을 느끼는 거죠.”

#2. 시선에 물들다

여행 중 그녀가 곧잘 찾아다니는 또 하나의 스폿은 인테리어가 예쁜 카페와 오래된 서점이다. 그녀에게 있어 이국의 카페는 여행자의 시간이 아닌,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같은 속도로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뉴욕에 머물면서 가장 많이 찾은 곳 역시 카페였어요. 가야 할 곳도 많고, 봐야 할 것도 많은 뉴욕이지만 가끔은 그런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순간이 있거든요. 그럴 땐 산책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에요.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하게 먹을 빵과 음료수를 살 겸 거리에 나서면 출근하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요. 카페테리아에 앉아 아침을 먹으며 신문을 보는 사람도 있고 바삐 뛰어가는 사람도 있죠. 그런 도시의 일상을 느끼다 보면 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져요.”

그녀의 여행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비행기표만 끊어서, 때로는 숙소조차 잡지 않고, 꼭 해야 할 무엇도 계획하지 않은 채 느리게 걷고 천천히 사진 찍는다. 그래서일까. 7년 전 중고로 구입했다는 콘탁스 아리아로 찍은 그녀의 사진이 맛깔스럽다. 조급하게 찍고 지우기를 반복하기보다 조리개를 열고, 일일이 초점을 맞추는 동안 피사체에 녹아든 그녀의 따뜻한 시선 때문일 거란 생각을 해본다. “우연히 어느 사이트에서 이 콘탁스로 찍은 사진을 봤는데 그 느낌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때부터는 이걸로만 찍어요. 물론 핀이 나가는 경우도 있고, 노출을 못 맞출 때도 있어요. 하지만 어때요, 더 공들여서 찍으면 되죠. 책에 실린 사진들도 다 이 카메라로 찍은 거예요.”
 
#3. 삶은, 여행

어떤 장소에서건 관대한 눈으로 바라보고 따스한 마음으로 품을 것 같은 그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곳을 꼽으라니 망설임 없이 뉴욕 브루클린의 윌리암스버그를 말한다. 그 좋다는 맨해튼을 놔두고 하필 이름도 생소한 동네라니. “처음 소호에 갔는데 아무런 감흥도 없고 그냥 명동 어디쯤에 온 줄 알았어요. 오히려 브루클린에서 마음을 익숙한 장소에 내려놓은 듯한 기분을 느꼈어요. 청년 예술인도 많고, 안쪽 길엔 공장 같은 건물 사이로 아기자기한 숍들이 많아서 재밌기도 하고요.” 

정해진 길도, 정해진 룰도 없는 여행. 그녀는 여행을 ‘삶’에 비유했다. “내가 하는 여행은 내가 계획하고, 어떤 방향으로 갈지 고민하잖아요. 가다가 샛길로 새는 경우도 있고, 남들이 가지 않은 길도 갈 수 있죠.  그런 순간순간의 모습이 우리네 삶과 비슷한 것 같아요.”

인터뷰를 끝내고, 다시금 책을 펼쳐 들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듣고 보니 뉴욕, 도쿄, 런던이 아닌 윤경희의 삶이 보이는 듯하다. 낡은 카메라 하나 들고 오래된 서점 혹은 한가로운 카페에 앉아 있는, 지구별에서 가장 마음 편한 여행꾼의 어느 오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