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에는 없는 나주의 맛

2012-11-01     트래비


1 밤마다 물안개가 자고 가는 나주 영산강 동섬 앞은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봄이면 유채꽃이 만발하는 일출 명소다 

한양에는 없는  나주의 맛

전라도의 두 축은 이름에도 알 수 있듯이 전주와 나주다.
그중에서도 ‘작은 한양’이라고 불렸던 나주는 임 그리듯 항상 도성을 그리워했지만
‘맛’에서만큼은 한양, 그 이상이었다.  

글·사진  천소현 기자

뻥, 뻥 뚫어 주는 맛 
영산포 홍어거리

‘쎈’ 놈부터 시작한다. 영산포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반갑게 달려드는 고얀 냄새들. 그 진원지는 잘 삭은 홍어다. 30여 곳의 홍어전문식당과 홍어판매점이 밀집해 있는 거리의 공식 향수는 암모니아다. 이때의 반응에 따라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홍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홍어 폐인’들과 코부터 틀어막는 ‘홍어 포비아’들. 이 둘 사이에서 수년간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던 기자가 입장 정리를 끝낸 시점은 홍어 저장고에 들어서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 저장고에 동행한 분은 ‘영산강 홍어’의 양치권 대표였다. 젊은 날에는 원양어선을 타고 칠레까지 가서 홍어를 잡기도 했던 그는 30년 넘게 홍어와 동고동락하고 있다. 지금 운영하는 ‘영산강 홍어’는 냉동 홍어를 수입하여 부위별로 분리한 뒤 잘 삭혀서 전국 각지로 배송하는 업체다. 홍어가 맛있게 익는 온도는 김치의 숙성 온도와 같은 4~5℃. 옹기 속에 짚을 깔고 홍어를 보관하던 전통방식에 따르면 20일 정도가 걸린다. 온도를 조금 높여 7℃에 보관할 경우에는 15일 숙성이면 찰지게 먹을 수 있고 10℃에서는 10일 정도면 충분하다. 한층 농도가 짙어진 작업장의 암모니아 냄새는 냉동고로 들어갔을 때 절정인 줄 알았으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플라스틱 용기의 덮개를 확 열어 제친 순간 마치 암모니아수 샤워기를 튼 것처럼 쏟아지던 홍어향의 환호작약을 어찌 잊으랴. 과연 잡균들도 다 놀라서 달아날 만한 그런 냄새였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보관이 어려웠던 돼지고기를 홍어와 함께 먹어서 살균을 했다는 홍어삼합의 유래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작은 테이블 위에 납작하고 균일하게 떠진 홍어회가 붉은 몸을 드러낸 채 가지런히 누워 있었고, 양 대표가 특별히 내주신 곡주가 말갛게 출렁이고 있었다. 홍어 하면 여전히 흑산도 홍어를 최고로 치지만 나주 홍어의 명성도 못지않았다. 흑산도에서 목포로 실려와 팔리고 남은 홍어는 다시 영산강을 따라 호남 최대의 포구였던 영산포까지 올라오면서 푹 삭혀지게 되었던 것. 그래서 전에는 진짜 센 놈을 맛보려면 흑산도가 아니라 나주를 찾아와야 했었다. 지금의 흑산도 홍어는 최상급의 경우 1마리에 40만원을 호가하는 상황이라 대부분 아르헨티나산 홍어를 사용하고 그 삭힘의 정도도 약해졌다. 홍어는 전국 어디에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됐지만 특별히 영산포 홍어거리에서는 홍어의 모든 부위를 튀김, 전, 찜, 탕 등 다양한 조리법으로 요리하는 ‘홍어 정식’을 맛볼 수 있다. 비용은 1인당 2~4만원 사이. 


2 나주영상테마파크 앞, 은빛 수면을 뚫고 올라온 노란 연꽃 3 찰지게 삭혀서 예쁘게 썬 홍어는 전국 각지로 배달된다 4 홍어가 가장 맛있게 익는 온도는 4~5℃. 김치의 숙성 온도와 같다 5 영산강 뱃길복원 추진위원회의 위원장이기도 한 ‘영산강 홍어’의 양치권 대표

역사 속으로 질주하는 황포돛배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73km의 뱃길. 쌀을 가득 싣고 홍어를 삭히며 영산강을 오르내리던 돛배로 목포까지 가려면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가 걸렸었다. 하지만 다시 복원된 배는 7노트의 속도로 씽씽 달리며 한 시간 동안 관광객들에게 나주의 역사를 들려준다. 나주의 흥망은 영산강과 운명을 같이했다. 영산포는 호남에서 가장 중요한 포구이자 해상무역의 거점이었다. 지금 부영아파트가 있던 자리에 호남 2대 곡창 중 하나였던 영산창이 있었는데 기록에 보면 200톤급의 배 53척이 그 앞에 도열해 있었다고 한다. 일제는 이 쌀을 목포로 싣고 가서 탈곡을 마친 뒤 일본으로 빼돌리는 방식으로 호남지역을 수탈했다. 1915년에 일제가 영산포에 국내 유일의 내륙 등대를 세운 것도 그만큼 이곳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뱃길이 끊어진 것은 1981년 하구둑으로 강과 바다가 막히면서다. 만조 때 영산강은 강폭이 지금의 7~8배로 넓어지고 바닷물이 화순 아래까지 차올랐기 때문에 결국 수량 조절을 위해 댐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물이 흐려지면서 갯벌이 사라지고 생태계가 파괴되면서 물고기도, 사람도 많이 줄었다. 앞으로 4대강 개발 사업이 나주의 미래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두고 볼 일이다. 

1,000년 고도의 이야기를 다 옮길 수는 없으니 일단 배에 오르자. 정재상 선장님이 직접 들려주는 나주 역사 이야기는 순풍에 돛단 것처럼 쉽게 귀에 쏙쏙 들어온다. 공민왕 때 실시했던 공도정책으로 섬을 떠나야 했던 영산도(흑산도 옆) 사람들이 나주로 이주하면서 고향 음식이었던 홍어를 먹기 시작한 것이 영산포 홍어의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그동안 나주영상테마파크 앞에서 출발했던 황포돛배는 자리를 옮겨 지난 10월부터 영산포 등대 앞에서 출발하고 있다.    

황포돛배 체험 | 운행코스 영산포~회진 10km, 55분 소요. 하루 6회 운행하는 황포돛배(3.3톤) 요금 성인 8,000원 어린이 4,000원. 28인 이상일 경우에는 1일 2회(오전 11시, 오후 2시) 운행하는 왕건호(96톤)가 편리하며 요금은 성인 1만원, 어린이 6,000원이다. 위치 선착장 영산교 아래 영산포 등대 앞 문의 061-335-7008


1 영산포에서 목포까지, 때로는 한양까지 쌀을 그득 싣고 달렸던 황포돛배가 역사의 순풍을 달고 다시 그 강을 달리고 있다

2 국내 유일의 내륙 등대인 영산포 등대. 강의 수위를 측정하는 역할도 했다


반전과 감탄의 연속 
영산나루 

조부모님 세대의 어린 시절쯤 되는 근대, 손에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옛날이야기에 혹하는 마음으로 나주 동양척식주식회사 문서고의 위치를 수소문한 결과는 ‘찻집이 됐던데’였다. 일제가 토지 수탈을 위해 세운 동양척식회사는 1910년대에 영산포 일대의 땅을 매수하고 포구 앞에 출장 사무소를 설치했다. 1920년대에 사무실이 이전된 뒤에 다른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문서고만 유일하게 남아 개인별장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 

등대에서 5분쯤 걸었을까. 깔끔하고 아담한 단층 주택 앞에 ‘영산 나루’라는 조촐한 간판이 붙어 있었다. ‘여긴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현관으로 들어갔을 때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든 것은 유럽의 고가구와 한국의 전통 가구, 영국의 골동품 찻잔 세트와 규방 수예 소품들이었다. 한국과 서양의 멋이 편안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이미 충격을 받은 상태였지만 반전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통유리 밖으로 내다보이는 안뜰은 끝이 어딘지 쉽게 가늠되지 않았다. 예상의 폭을 넘어설 만큼 넓고 깊었기 때문이다. 오른편의 2층짜리 붉은 벽돌채가 우리가 찾던 문서고였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정원의 풍경이었다. 작은 연못과 정자의 야외 테이블, 공간을 자연스럽게 분리해 주는 돌담 너머에 흐드러지게 가지를 뻗은 수령 200년의 팽나무와 주변의 벤치들까지. 안으로 한 걸음씩 더 걸어 들어갈 때마다 쏟아지는 감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출발하는 기차 시간을 늦추는 데는 이견이 없어졌다. 커피와 홍차, 그리고 꽃으로 장식한 과일접시가 또다시 감탄을 자아냈다. 

이 집을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아서 20년간 관리하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상에 공개한 사람은 광주에서 이비인후과를 운영하는 박재철 원장 부부다. 골동품과 규방공예, 차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아내 이희정 여사의 안목은 문서고의 역사적 가치를 더욱 높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접 와서 보고 반한 사람들이 콘서트를 열고 싶다거나,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는 요청들이 쇄도하고 있기에 저절로 복합문화공간이 될 것 같다.
영산나루 | 주소 전라남도 나주시 영산동 306-10  문의 061-332-2131


1, 2, 3 맛도, 멋도, 정도 남다른 영산나루의 메뉴들 4 조촐한 주택 안으로 들어가자 놀라운 정원의 풍경이 펼쳐졌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문서고는 정원에 들어가야 보이는 붉은 벽돌 건물인데 개인 별장이라서 내부를 공개하지는 않는다 5 규방공예에 관심이 많은 안주인의 안목이 구석구석을 밝힌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명하쪽빛마을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다 보니 때마침 쪽풀들이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황금 들판 한가운데에 깔린 보랏빛 양탄자. 그 뒤로 가을 하늘이 경쟁하듯 푸른 천을 드리우고 있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더 많은 쪽꽃을 기대하며 명하쪽빛마을로 향했다. 하지만 정착 마을에 도착하니 지난주까지 들판을 가득 채웠다던 쪽들이 모두 사라지고 휑한 황토밭만 남아 있었다. 염료를 얻기 위해서는 꽃이 피기 전에 쪽풀을 모두 수확해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아쉬움을 달래 준 것은 때마침 지역 방송국에서 항공 촬영을 하는 바람에 마당 가득 널린 쪽빛 비단들의 부드러운 환영무였다. ‘항공촬영카메라’라는 진귀한 구경을 위해 하교길을 서두른 여섯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경쾌한 음악 같았다.  

2001년 고故 윤병운 옹이 중요무형문화재 115호 염색장으로 지정되면서 유명해진 명하쪽빛마을은 2010년부터 농촌관광테마마을로 운영되고 있다. 지난 10월에는 제1회 명하쪽빛축제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전수교육조교 윤대중 선생이 ‘쪽빛 물을 세상에서 가장 잘 들이는 장인’이셨던 아버지의 명성을 ‘청출어람’으로 이어가고 성격 좋고, 붙임성 좋고, 말솜씨 좋은 여섯 아이의 엄마 최경자씨가 안팎의 살림살이를 챙기고 있다. 

한 해 농사와 마찬가지로 일년 내내 공을 들여야 한다는 쪽 염색. 염색을 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발효쪽을 얻는 과정이었다. 가을에 수확한 쪽을 우려낸 물에서 색소를 빼야 하는데, 횟가루를 넣어 적절한 PH(수소이온지수)를 맞추는 것이 관건이다. 선명한 쪽앙금을 만들기 위해 치대는 작업을 당그레질이라고 하고, 발효된 쪽은 겨울 내내 군불을 땐 아랫목에서 보관해야 죽지 않는다. 그렇게 마련한 발효쪽으로 염색을 했던 것이 이 지역 사람들의 겨울철 부업이었다. 색을 잡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횟가루의 원료는 진도에서 가져온 굴껍질이다. 1년 동안 펼쳐 놓아서 삭아지게 했다가 불순물을 제거하고 1,000~1,500℃로 구운 후 포대기에 보름 정도 담아두면 그 상태로 횟가루가 된다. 하지만 장인의 노하우는 알칼리 성분을 가능한 많이 사용하지 않고 색을 잡아내는 것이다. 옅은 옥색에서 어두운 남색까지, 쪽염천만으로 제작한 색동저고리는 상품이 아니라 작품이었다. 해충을 방지하고 피부를 보호하는 기능뿐 아니라 고운 색 그 자체로 쪽염은 수백년 동안 여심을 흔들어 왔다. 다음 번에는 내 손으로 직접 물들인 쪽빛 스카프 하나, 나만의 작품에 욕심을 내보리라.
명하쪽빛마을 | 주소 전남 나주시 문평면 북동리 608  문의 061-333-5557  명하쪽빛마을.com

꽃이 활짝 핀 들판의 쪽풀들. 하지만 염료로 쓰려면 꽃이 피기 전에 수확해야 한다


쪽염으로만 제작한 색동저고리


고기육수의 진한 맛 
나주 곰탕거리 

새벽부터 서둘러 동섬 너머, 영산강의 일출을 보고 나니 아침 7시에서 5분쯤 지난 시간이었다. 7시부터 영업을 시작하는 노안 곰탕집으로 직행하면 딱 맞을 타이밍이었다. 홍어거리만큼은 아니지만 나주 곰탕거리에서도 비릿한 고기 냄새가 감지됐다. 식욕을 팽창시키는 그 냄새에 홀려 테이블을 자치한 지 5분 만에 뚝배기 한 그릇을 받아들 수 있었다. 

허기진 아침에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장점인가. 하지만 그건 손님의 입장일 뿐. 노안 곰탕을 이어가고 있는 2대 이경자 할머니와 3대 정종필씨의 하루는 이미 새벽 3시 반에 시작됐다. 그 시간에 일어나 고기를 삶기 시작해야 두어 시간 후 고기를 건져내고 말갛게 우러난 육수에 기본양념을 해서 곰탕을 준비할 수 있다. 안심, 등심, 양지, 사태, 머리, 갈비 등의 고기가 사용되는데 부위마다 끓이는 시간이 조금씩 다르다. 주말이면 하루 1,000그릇씩 팔리는 곰탕을 준비하려면 하루 종일 고기 삶기가 반복되지만 그래도 오전 11~12시경의 국물이 가장 맛있다는 것이 이 집 며느님의 귀띔이었다. 고춧가루가 따로 나오지만 노안집에서 추천하는 맛있게 먹는 방법은 깍두기 국물로 간을 맞추는 것이다. 과연 얼큰하면서도 개운했다. 

나주 곰탕의 특징은 뼈가 아니라 살코기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곡창지대가 넓으니 소가 많을 수밖에 없었고 그 소들을 사고팔았던 큰 시장이 바로 함평 우시장과 영산포 우시장이었다. 옛 동헌 자리였던 목사내아 앞 곰탕집들은 ‘함평 할매집’이나 ‘하얀집’이나, 우열을 가리기 힘든 곳이지만 최근에는 ‘노안집’에 대한 선호도가 상승한 편이다. <한국인의 밥상>을 찍을 때에도 잘 웃지 않으시고 일에만 열중하셨던 73세 이경자 할머니의 완고한 원칙주의가 그 비결임이 분명하다.
노안집 | 주소 전남 나주시 금계동 23-5(매일시장입구)  가격대 곰탕 7,000원, 수육곰탕 1만원, 수육 1만5,000원/2만원 육회 3만원. 휴일 매월 2·4주 월요일 문의 061-3333-2053



육수를 내고 고기를 삶은 일은 매일 새벽 3시30분에 시작된다


고춧가루도 있지만 깍두기 국물로 간을 맞추면 더 얼큰하면서도 시원하다 / 고기로 맑은 육수를 내는 나주 곰탕

남도 장어의 저력 
대승장어

바쁜 점심시간을 비껴 간 덕분에 허락을 얻어 부엌을 기웃거릴 수 있었다. 기름진 생선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장어가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었다. 아침에 양념장을 바글바글 끓이느라 가장자리가 검게 눌어붙은 그릇에서 양념을 덜어 장어에 바르고 계신 분이 ‘대승장어’의 김용해 사장님이었다. 20년 넘게 구진포에서 장어를 구우면서 31가지 재료를 섞어 만든 양념장을 개발했다. 양념구이든, 소금구이든 마지막에는 약간의 설탕을 뿌려서 감칠맛을 더해 주는 것이 장어를 맛있게 굽는 요령. 

‘대승장어’는 6년 연속으로 ‘전라남도 남도 음식 명가’로 지정된 집이다. 구진포 장어집 중에서 유일하게 선정된 음식 명가다. 식품과를 나온 29살 막내아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위로 6명의 형님, 누님을 대신해 가업을 잇고 있다. 장어뼈를 우린 하얀 육수는 속을 부드럽게 만들어 기름진 장어를 맞이할 준비를 시키고, 처음 맛보는 장어 내장구이는 담백하면서도 고소하다. 2년차 묵은지와 꼴뚜기젓, 홍어뼈무침 같은 남도의 반찬들은 장어의 느끼함이 머물지 못하게 했다. 장어머리를 푹 고은 육수로 끊여내는 장어탕도 장을 적당히 풀어서 전혀 비리지 않았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속이 편하다. 홍어거리의 홍어는 아르헨티나에서 왔고, 장어거리의 장어는 양식장에서 왔다. 자연산이야 그 옛날 구진포까지 바닷물이 올라오던 시절의 이야기일 뿐 댐이 막히면서 물은 탁해졌고, 장어도 씨가 말랐다. 원래 만만한 가격은 아니었던 장어요리는 요즘 치어 가격이 더 치솟았지만 안 먹고는 못배기는 별미가 아닌가. 구진포삼거리 쪽으로 도로 공사가 시작될 예정이어서 현재 장어거리는 좀 스산한 풍경이지만 장어가 사라진 후에도 꿋꿋이 명맥을 이어온 구진포 장어거리의 생명력이야 힘 좋은 장어처럼 건재할 것이다.
대승장어 | 주소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19  문의 061-336-1265  가격대 장어구이 1인분 2만5,000원, 장어탕 1만원


1 양념구이든, 소금구이든 마지막에 설탕을 약간 뿌리는 것이 장어를 맛있게 굽는 비법이다 2 구진포의 대승장어집은 31가지 재료를 섞어 만든 양념장을 사용한다 3 30년 동안 한결같이 연탄 화덕에 구워내는 송현 불고기는 직접 재배하는 야채와 어우러져 더욱 별미다


불맛이 아닌 손맛 
송현 불고기 

연탄 불고기의 대명사인 나주 송현 불고기집도 정들었던 원조터를 떠나야 했다. 지난여름 태풍으로 낡은 집의 지붕이 날아가 버려서 겸사겸사 근처의 새로 지은 2층 집으로 이사를 마친 것. 처음으로 가족 외에 직원을 고용했고 허름했던 옛 분위기 대신 깔끔하고 넓은 식당이 됐다. 하지만 30년 동안 연탄불 앞에 앉아 매캐한 연기를 모두 마시면서도 가장 맛있는 불고기를 구워 왔던 정정구, 김안자 부부는 여전히 화덕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은 없어졌지만 4개의 연탄 화덕은 옛 방식 그대로다. 굽는 손맛이 변하지 않았으니 불고기 맛도 그대로일 수밖에. 거의 불쇼 수준으로 기름이 떨어질 때마다 활활 올라오는 불기운에도 고기가 타들어 가지 않도록 쉬지 않고 석쇠를 뒤집는 김안자 여사의 손이 바쁘다. 10년 전만 해도 고기를 직접 칼로 썰어야 했지만 지금은 기계로 썰기 때문에 그나마 일이 좀 쉬워진 편이다.  

가격 역시 여전히 ‘착해서’ 1인분에 8,000원. 그것 말고는 다른 메뉴도 없다. 별다른 말이 없던 아들 정성모씨가 불고기 접시를 놓고 돌아서다가 불쑥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상에 올라오는 야채들은 모두 우리가 직접 농사지은 것입니다.” 남도 젓갈과 함께 곰삭은 나박김치, 심심하게 간이 잘 맞은 된장국, 싱싱한 상추, 고추, 양파가 예사롭지 않다 했더니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식당을 운영하기에도 바쁠 텐데 농사는 언제 짓느냐고 묻자 씨익 웃으며 ‘새벽에 하죠’라고 말했다. 그 부지런함이 알찬 밥상을 이렇게 저렴하게 제공할 수 있는 비결이자 정성이라는 생각이 들자 고기는 물론이고, 고추 하나 남길 수 없었다.
송현불고기 | 주소 전남 나주시 대호동 311-33   문의 061-332-6497  가격대 불고기 8,000원


호남을 호령하던 자리 
목사내아 금학헌 & 금성관

금학헌琴鶴軒은 나주에 부임한 목사들이 살던 집목사내아·牧使內衙이다.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학처럼 고고하게 살겠다는 뜻에서 이름 지어진 곳이다. 3.7k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나주 읍성 안쪽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유적지 중 하나다. 983년 고려 성종 때 전국에 설치된 12목 중에서 호남에는 나주, 승주, 전주 3곳이 있었다. 이후 1018년 현종 때 8목으로 줄어들면서 호남에는 나주목만 남았었다. 이때부터 1895년까지 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주는 ‘호남의 작은 서울’이라고 불릴 정도로 전주와 함께 전라도의 중심지 역할을 했었다. 서울의 삼각산은 나주의 금성산을, 영산강은 한강의 지세를 닮았다고 했고, 성북동, 남산 등의 지명도 서울을 본뜬 것이다. 

한양에서 내려온 손님들이 머물던 객사, 말하자면 관료들을 위한 호텔이었던 금성관錦城館이 멀리 있지 않으니 목사내아의 규모는 클 필요가 없었다. 전형적인 ㄷ자 형태의 팔작지붕 집으로 지금은 숙박체험 공간으로 개조해 개방되고 있다. 공동화장실과 욕실을 이용해야 한다는 이유로 한옥 사용을 꺼리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목사내아의 샤워장에는 작은 파우더룸도 달려 있고, 수건도 뽀송뽀송하다. 거실이 딸린 안채 객실들의 이름은 나주를 거쳐간 306명의 목사牧使 중에서 특별히 존경을 받았던 유석증兪昔曾, 1570~1623년 목사와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 목사의 이름을 땄다. 마당 구석 돌담에는 벼락을 맞고도 살아남은 팽나무 한 그루가 기대어 자라고 있는데, 소원을 빌면 이루어 준다고 했다.
목사내아 숙박체험 | 주소 전라남도 나주시 금계동 33-1  관람료 무료  관람시간 오전 9시~오후 6시 숙박료 유석증방 15만원, 김성일방 12만원 인실·의실·지실 5만원, 예실 15만원  문의 061-332-6565 www.najumoksanaea.com


출장 온 관료들의 호텔 격이었던 금성관, 중앙에 정청이 있고 좌우 양쪽에 객사가 맞닿아 있다


금학헌은 나주에 부임한 목사들이 살았던 곳으로 지금은 한옥 체험을 받고 있다

취재협조  나주시 문화체육관광과 www.naju.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