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음식단상] 여름을 씹다- 5가지 음식에 대한 단상

2013-08-05     트래비

<맛골목 기행>, <서울문학기행>의 저자, 장태동 작가의 맛깔스러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들끓는 산, 강, 바다를 건져 밥상에 올린다. 무르익은 초록을 씹으면 봄부터 자라난 풋풋한 맛, 그 기억의 뿌리에 닿는다. 밥상머리 사람들과의 추억이 맛을 더 깊게 만든다.

비 바람 햇볕 먹고 자란 나물과 약초가
한 그릇에 담겨 버무려진 초록의 향연이
속리산 산채비빔밥 거리에 펼쳐진다
.

충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 입구 약초산채비빔밥
신토불이약초식당 043-543-0433

속리산 산채비빔밥의 역사는 40년이 넘는다. 80년대 중반까지 열 집 남짓 되던 식당거리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90년대에 들어서다. 특징 없는 기념품들은 손님들에게 외면 받았고 IMF 금융위기에 기념품 판매점들이 식당으로 전업했다. 93년 기념품판매점에서 식당으로 업종을 바꾼 집이 있는데 그 집은 약초산채비빔밥과 약초산채정식으로 특허까지 받았다. 비빔밥에 인삼, 마, 능이버섯, 호두, 잣, 밤, 두릅, 애기꽃바래기, 당귀 등 보통 스물 한두 개 정도의 재료가 들어간다. 말티재에 우마차 길만 있던 시절 아버지 손잡고 약초며 나물을 캐던 기억을 되살려 주인아줌마가 개발했다.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약초산채비빔밥과 약초산채정식을 만들게 됐다는 아줌마와 약초산채비빔밥을 한 입 물고 봄비와 봄 햇살의 맛까지 음미하는 여행자는 그 맛 하나로 또 다른 추억의 터미널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포도주를 좋아하고 시를 좋아했다던 신 ‘오딘’의 날,
수요일엔 포도주보다 더 맛있고 좋은(개인적으로) 동동주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도토리묵밥을 먹는다.

대전시 유성구 봉산동 동동주와 도토리묵밥
구즉할머니묵집 042-935-5842

신탄진 구즉 마을은 예로부터 묵마을로 유명했다. 돌담길 옛집들이 참 푸근하고 예쁜 마을이었다. 그중 가장 오래된 집은 50년도 훨씬 더 됐다. 지금은 재개발로 마을의 옛 정취가 다 사라졌다. 물론 묵집들도 다 뿔뿔이 흩어졌다. 그중 몇몇 집은 현재 북대전 톨게이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모여 ‘묵마을’을 만들었는데 단골집인 ‘할머니묵집’은 다시 생긴 묵마을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할머니묵집 동동주는 막걸리에 밥알 띄운 식의 동동주가 아니다. 약간 탁하지만 맑은술에 가깝고 그 맛은 입에 착착 감긴다. 한 잔 두 잔 먹다 보면 한 되 먹는 건 일도 아니지만 조심해야 한다. 술 잔 놓고 일어나면서 ‘휘청’ 한 번 하게 된다.
동동주와 함께 풋풋하고 탱글탱글한 도토리묵밥을 먹는다. 묵채와 함께 김가루, 깨소금, 양념장, 지고추 다진 것 등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그 맛은 먹어 본 사람만 안다. 쌉싸름한 묵 맛과 김가루의 구수한 맛, 깨소금의 고소한 맛, 곰삭은 지고추의 매콤짭짜름하면서도 잘 발효된 깊은 맛, 양념장의 각종 양념맛 등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거다. 거기에 공기밥을 말아서 먹으면 그 맛이 끝내준다. 묵밥에 동동주, 배부르게 취하고 대청호 호반길을 지나 잔잔한 물가에 누워 한 잠 잤으면 딱 좋은 수요일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뭘까? 뭐였을까?
아버지 어머니가 사십대 중반 정도 되셨던 때였다.
밥상은 5색 찬란한 식물성 밥상이었다.

충남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 시골밥상
외암리 민속마을 신창댁 041-543-3928

건강이 안 좋으셨던 아버지를 위한 병원의 권장 식단은 ‘스님의 밥상’이었다. 무를 채 썰어 들기름에 볶은 무나물과 배추김치, 고추장, 된장 그리고 호박잎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국민학생이었던 나도 스님처럼 먹어야 했다. 어린 내 입맛에도 ‘스님의 밥상’은 기똥차게 맛있었다. 단칸방 툇마루에 앉아 까칠한 호박잎에 밥 한 술 얹고 고추장과 된장을 반반 넣어 쌈을 싸 먹었던 기억. 흙마당 사철나무 해바라기 포도넝쿨을 스치고 온 바람의 향기 때문이었을까? 없는 찬에 고봉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는 나를 보고 “밥 더 줄까?”라며 함박 웃으시던 엄마 얼굴도 생생하다. ‘소반’에 차려진 소박한 밥상의 추억, 어린 나이였지만 그날 그 밥상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충남 아산 외암리민속마을에 가면 마을 안에 ‘시골밥상’이라는 밥집이 있다. ‘시골밥상’이라는 이름보다 ‘신창댁’이라고 하면 마을 사람들이 다 안다. 일반 한옥에서 밥을 파는 거다. 그 집 청국장 백반 소박한 밥상이 생각난다. 부모님과 함께했던 행복했던 밥 한 끼를 추억해 본다. 밥이 행복이다. 


어느 날 하루는 느닷없이 남해로 차를 달려
지족해협 죽방렴도 보고 고등어 맛 같은
멸치찜을 한번 먹어도 좋겠다.
 

경남 남해 멸치쌈밥
여원식당 055-867-4118

언젠가 남해 남쪽 바닷가 도로를 따라 한 바퀴 돌던 길에서 만난 음식이 멸치찜이었다. 전골냄비에 은비늘 번쩍이는 싱싱한 멸치를 넣고 갖은 양념을 얹어 푹 쪄서 만든 멸치찜은 그냥 먹어도 되고 쌈을 싸서 먹어도 맛있다. 통영 멸치공장 옆을 지날 때 맡았던 그 고약한 멸치냄새 때문에 ‘멸치찜’이라는 메뉴를 보고는 큰 걱정을 했는데 멸치찜에서는 그 고약한 냄새는 안 나서 다행이었다. 처음 먹어 보는 음식이라 어떤 맛일까 궁금했는데 꼭 고등어조림 같았다. 양념은 조림이 아니고 찜이기 때문에 풋풋한 향기 그대로 살아 있었다. 
멸치를 통째로 쪄서 먹기 때문에 뼈 씹히는 느낌이 있다. 그게 또 멸치찜의 독특한 식감이다. “아니! 멸치가 좀 비싸네!”라고 했던 게 기억난다. 하지만 멸치찜은 남해에 가야지만 맛볼 수 있는 남해만의 맛이기 때문에 남해 여행 중 꼭 먹어 봐야 할 음식이다. 지금 저 멀리 남해 지족해협에서는 번뜩이는 은비늘을 뽐내며 멸치떼가 몰려오겠다. 


정선을 정선답게 만들어 주는 음식,
메밀국죽은 정선에 가야지만 먹을 수 있다.
다른 데는 전혀 없다.

강원도 정선 메밀국죽
정선5일장 안 물레방아집

정선에서도 이 음식을 파는 집이 아주 드물어서 시장통에 두 집밖에 없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식당 중 딱 두 곳에서만 파는 음식인 거다. 이렇게 귀한 음식의 맛은 어떨까? 아주 토속적이다. 멸치가루와 된장으로 국물을 내고 거기에 두부, 콩나물, 주재료인 메밀 등을 넣고 끓여 만든다. 거칠면서도 구수한 맛이 우러난다. 햇볕 좋은 가을, 누렇게 익어 가는 벼 포기의 향기 같기도 하고, 풀 먹인 할아버지 삼베옷 향기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고향 마을 저녁 짓는 굴뚝 연기의 향기 같기도 하다. 기호에 따라 다진 고추와 고추장양념장을 넣어 먹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다진 고추를 넣어 먹는 게 가장 맛있다. 집에서 담근 된장으로 국물을 내기 때문에 약간 짤 때도 있다.  ‘심심하게 해주세요’라고 말하면 짜지 않게 해준다. 
메밀국죽은 정선옥수수막걸리와 궁합이 잘 맞는다. 메밀국죽은 주문과 동시에 요리가 시작되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린다. 기다리는 시간에 정선옥수수막걸리 한 잔 하는 거다.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쭉 들이키면 속이 시원하게 뻥 뚫리고 입맛도 돈다.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장태동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