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래비스트 유호상의 여행만상] 양의 탈을 쓴 늑대맥주

2016-07-26     트래비
 
내 친구 르네는 벨기에 남동부의 작은 마을 바스토뉴Bastogne에 살고 있다.
내가 도착한 날 저녁에 그녀는 온 동네 친한 친구들을 다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마을 외곽에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간다며 배를 쫄쫄 굶겼다. 느지막해져서야 차 4대에 나눠 타고 향한 레스토랑은 생각보다 멀었다. 도착하자마자 다들 시끌벅적하게 들어갔으나, 웨이터가 불어로 뭔가 중얼거리자 일제히 탄식이 나왔다. 간발의 차이로 저녁식사가 마감됐다는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맥주라도 한 잔씩 하고 가자는 말에 모두들 널찍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등장한 맥주는, 맥주에 대한 내 상식(?)을 완전히 뒤엎었다. 와인잔 모양의 잔도 생소했지만, 양도 많지 않고, 게다가 차갑지도 않았다. 한 잔 하려는 데, 옆 친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그거 좀 센데~” 별 걱정을 다한다는 의미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아니, 이렇게 황홀한 맥주 맛이! 달착지근한 맛과 향, 이건 완전히 맥주의 신세계였다. 양도 적겠다, 그냥 한입에 들이켰다. 나의 화끈한 반응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어느새 한 잔을 추가해서 내 앞에 갖다 놨다. 와우~. 기분 좋게 또 한 잔을 처리했다. 

“자 이제 밥 먹으러 가자~.” 맥주잔을 비우고 다들 주차장에 모였다. 일행 중 에릭이라는 친구의 빨간색 아우디 A4가 눈길을 끌었다. 차를 좋아하는 내가 관심을 보이자 르네는 센스있게도 에릭에게 나와 타고 가라고 한마디 던져 줬다.
 
에릭은 손수 문까지 열어 주며 나를 반겼다. 그렇게 폼 나는 아우디를 타고 출발한 지 5분쯤 되었을까. 아 이런,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다. 방금 전 빈속에 마신 독한 맥주의 알코올이 히터의 열기와 연쇄 반응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여러 대의 차가 행렬을 지어 이동 중이니 잠깐 멈추자고 하기도 난감했다. 행여나 이 럭셔리한 차에 ‘방출’했다가는 나의 품위 손상은 물론,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 것 같았다.
 
영어를 잘 못하는 에릭에게 손짓 발짓으로 설명을 하여 창문을 반쯤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물론 그에게는 바람을 쐬겠다고 하였으나 실은 여차하면 ‘방출’할 자세였다. 비행기가 비상착륙 때 연료 방출하는 광경이 연출되려는 찰나였다. 차고 신선한 공기 덕분이었을까. 최악의 ‘사태’는 오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아, 이제 ‘속’ 편하게 아우디를 느껴 볼까~’ 하려는데, 에릭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레스토랑 도착!”  
1998년, Bastogne, Belgium

▶tip
이 경험으로 벨기에가 맥주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방문할 가치가 있는 나라임을 알았다. 흔히 ‘맥주’ 하면 독일을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진정한 맥주의 나라는 벨기에다. 이 조그만 나라에 수천 가지가 넘는 로컬 맥주가 있다고 한다. 벨기에의 맥주는 워낙 다양해서 한 가지 맛으로 규정할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달콤한 맛에 알코올 도수가 무려 15%가 넘는 ‘겉 다르고 속 다른’ 맥주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글을 쓴 유호상은 낯선 곳, 낯선 문화에 던져지는 것을 즐기는 타고난 여행가다. 현재 여행 커뮤니티 ‘클럽 테라노바’를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