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달인] 그림 여행의 달인 김물길-여행은 멀리 있지 않다

2016-09-06     고서령
 
 
물길처럼 졸졸졸 세계여행을 하고 온 그녀가,
다시 물길처럼 졸졸졸 국내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여행길에서 그린 사랑스런 그림을 한 아름 안고서.
 

달인은 대학생 때 세계일주하면서 그린 그림으로 <아트로드>라는 책을 펴내 이름을 알렸다. 어린 나이에 대단하다. 대단하다니, 사실 난 뛰어난 적이 없었던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때 어떤 과목은 거의 0점을 받았을 정도로 공부를 못했다. 모든 걸 잘했던 언니에 비해 콤플렉스가 많았다.
 
그림 실력이 이렇게 뛰어난데, 뛰어난 적이 없다니. 그림이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거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정말 좋아했다. 단 한 번도 그림 말고 다른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미대를 지원했고, 실기시험 덕에 운 좋게 합격했다.
 
세계여행을 한 것도 그림 때문이었나? 그렇다. 좋은 기회로 국제봉사단체의 대학생 해외 워크캠프에 참가했다. 프랑스에서 한 달 동안 외국인 친구들과 지냈는데, 그냥 카페에 가서 커피를 내려 마시는데도 그 환경이 너무 낯서니까 그림의 영감이 막 떠오르더라. 거리의 녹슨 구조물도 색이 아름다워 보이고, 풍경 하나하나가 다 영감을 줬다. 그림을 그리려고 떠난 게 아니었는데도 그림을 엄청나게 많이 그리고 왔다. 그래서 세계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 평생 그림을 그리면서 사는 게 인생의 목표이자 꿈인데, 여행하면서 그림을 그리면 그 시작을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악착같이 일하면서 여행경비를 모았다.
 
어떤 일을 했나? 처음 6개월은 학교를 다니면서 학원 보조강사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렇게는 돈을 얼마 못 모으겠더라. 대학 3학년 올라가면서 아예 휴학을 하고, 당시 대학로 골목에 있던 양말 만드는 회사에 인턴으로 취직했다. 월급이 110만원이었다. 주말엔 일당 15만원씩 받고 벽화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평일에 벽화 야간작업을 하고 회사 근처 찜질방에서 3~4시간만 자고 출근했다. 또 소소하게 캐릭터, 로고 만드는 아르바이트도 다 받아서 했다. 점심값을 아끼려고 매일 아침 도시락을 싸 갔고 쇼핑도 한 번 안 했다.
 
한참 꾸미고 싶고 먹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였을 텐데. 그때가 살면서 최고로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꿈꿨던 것 같다. 22살 겨울부터 24살 겨울까지, 2년 동안 그렇게 해서 2,500만원을 모았다. 그 돈으로 22개월 동안 세계여행을 했다. 여행하면서 그린 그림과 매일 쓴 일기가 2014년 <아트로드>로 출간됐고, 관련해 개인전시회와 강연 등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
 

이번엔 국내 구석구석을 여행하며 그린 그림으로 책을 낸다고. 솔직히 세계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한국 여행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22개월 동안 정말 치열하게 여행하다 보니 한국이 너무 그리웠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비행기 안에서 얼마나 벅차고 설레었는지 모른다. 한국 사람, 한국 말, 한국어 간판, 하나하나가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한국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해 보니 어땠나? 예전엔 한국은 어딜 가도 너무 작고 빤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세계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눈을 갖게 된 것 같다. 한국의 풍경이나 유적지가 외국과 비교해 절대로 작고 빤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한국적인 소박한 정서이고 우리의 역사를 생각할 수 있는 시작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한국을 그리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세계여행이 나에게 준 큰 선물이다.
 
 
세계여행과 국내여행, 무엇이 달랐나? 처음에는 세계여행 때처럼 국내여행도 효율적인 루트를 짜서 여행하려고 했다. 서울을 출발해 알파벳 U자를 그리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북쪽으로 올라오는 루트로 2015년 여름 두 달 동안 배낭여행을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국내여행을 할 때는 꼭 그렇게 효율적일 필요가 없겠더라. 그 다음 겨울엔 일주일 단위로 떠났다가 돌아와서 재정비를 하고 다시 떠나는 방식으로 여행했다. 목적지도 그때그때 꽂히는 곳으로 정했다. 일단 짐을 싸 놓고 잠들기 전 지도를 보다가 마음에 드는 이름이 있으면 버스표를 예매하고 다음날 아침 무작정 떠났다. 그래서 겨울 여행 루트는 완전히 뒤죽박죽이다.
 
사전정보 하나 없이 목적지를 정했다고? 그렇다. 생전 처음 봤는데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간 곳도 있고, TV를 보다가 우연히 지나가는 화면에 꽂혀 찾아가기도 했다.
 
막상 가서 실망하지는 않았나? 그렇게 갔는데 특별한 것이 없었던 곳도 있었고, ‘여기까지 가야 되나’ 투덜거리면서 갔는데 ‘대박!’이었던 곳도 있었다. 여행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한국인으로서 한국을 여행한다는 것은 엄청난 특혜를 누리는 일이더라. 외국을 여행할 때는 내가 가는 그 계절의 풍경만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선 원한다면 사계절의 풍경을 모두 볼 수 있고, 신기하게도 같은 장소에서도 계절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과 느낌이 든다. ‘아, 이게 사계절을 가진 한국의 매력이구나!’라는 것을 29살 먹은 이제야 알았다.(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는 어디였나. 우선 첫 여행지를 어디로 할 것인지가 너무 중요했다. 고민 끝에 내가 정말 사랑하는 할머니 댁이 있는 충남 서산으로 정했다.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기특하게 보였는지 첫 여행지까지 같이 가자고 하시더라. 그런데 가는 길에 엄마의 중학교 모교를 만났다. 완전히 폐교가 되어 있었다. 꼭 공포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운동장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농구골대가 쓰러져 있고, 과학실 생물 표본도 그대로 있고 곳곳에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혹시 무섭지는 않았나? 낮이었고, 엄마의 학교라고 생각하니 무섭지 않았다. 행정실에서 엄마의 졸업앨범을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며 좋아하기도 했다. 이곳저곳 살펴보다가 교실에서 풍금을 발견했다. 엄마가 그 풍금을 치기 시작했다. 페달이 다 빠져 소리도 나지 않고 건반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는데, 엄마에겐 그게 추억이니까 더럽지가 않은 거다. 그 모습을 보는데, 저 풍금이 엄마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엄마가 손을 댔을 때 건반들이 행복해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나의 첫 번째 국내여행 그림이 풍금 그림이다.
 
결국 그 폐교가 첫 여행지가 된 셈이네. 맞다. 그때 느꼈다. 여행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 여행지가 굳이 관광지일 필요는 없겠다는 것. 누가 그 폐교를 여행지라고 생각했을까? 엄마의 학교라는 것만으로 나에게는 온가족이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정말 특별한 여행지가 된 거다.
 
 
+ 여름에 초록색의 순천 갈대밭을 처음 찾았다. 초록풀이 이쪽저쪽으로 눕는 모습을 보면서, 이 바람은 여름의 갈대를 얼마나 사랑하고 예뻐하기에 이렇게 쓰다듬을까, 생각했다. 마치 초록 갈대가 바람의 애완동물 같았다. 그래서 초록색 털을 가진 삽살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겨울에 온통 갈색으로 변한 순천 갈대밭을 다시 찾았다. 갈대술이 사람의 머리 스타일로 보였다. 같은 장소이지만 계절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졌다.
 
달인의 그림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다. 독창적이기도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그렇게 봐 주면 너무 감사하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 배터리가 부족하면 “힘을 내! 너는 할 수 있어!”라고 말한다. 그러면 정말 더 오래 버티는 것 같다. 어쩌면 좀 창피하고 웃긴 행동일 수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재미있다. 여행하면서 보는 풍경에도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 그림 중에는 의인화된 작품이 많다.
 
그림 그리는 게 그렇게 좋은가? 아무리 좋아하는 일도 직업으로서 하게 되면 힘들 때가 있지 않나. 그림은 정말 내 것인 것 같다. 나는 그림으로 웬만한 해소와 충족을 다 한다. 스트레스도 그림으로 풀고, 행복도 그림으로 표현한다. 그림 말고는 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정말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앞으로는 무얼 하고 싶은가? 지금 나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주는 것이 여행이어서 여행을 하는 것일 뿐, 여행가가 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앞으로 1~2년은 여행을 더 할 것 같다. 이번엔 중국 여행을 할 계획이다. 얼마 전 친구를 만나러 중국에 갔었는데, 중국의 매력을 엄청나게 많이 느꼈다. 중국을 몇 달 동안 여행하면서 그린 그림으로 중국에서 전시회를 여는 것이 2018년까지의 목표다.  
 
+ 세계여행 당시 킬리만자로(해발 5,895m)를 등반한 이후 다시는 산을 타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 많았던 겨울, 지리산 2박 3일 종주에 도전했다. 보통 2~3시간 걸리는 하산을 6시간 걸려 하면서 발톱 3개가 빠질 정도로 힘들었지만, 산행을 마친 후 자신을 정말 많이 사랑하게 됐다.
 
 
+ TV를 보다가 우연히 지나가는 화면에 꽂혀 찾아간 작은 섬. 마을 이장님이 운영하는 민박집에 4박 5일 동안 현지 사람처럼 머물렀다. 3일째 되는 날엔 동네 슈퍼마켓 주인이 ‘누구네 집 딸이냐’고 궁금해했을 정도. 매일같이 물질하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며 소중한 추억과 인연을 만들었다.
 
 
김물길 달인
본명은 물 수水, 길 로路, 김수로. 작가명인 ‘물길’은 할머니가 지어 주셨다. 달인이 세계여행 중일 때 할머니로부터 받은 편지에 ‘수로니까 물길이지. 졸졸졸 가고 있다가 추우면 할미가 해님 되어 줄게. 할머니 뒤에 숨어’라고 적혀 있었다고. 언제나 생글생글 맑은 웃음을 짓는 긍정적인 29살. 진심을 담은 그림으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아티스트. 8월 말, 한국을 여행하며 그린 그림을 모은 책 <아트로드, 한국을 담다> 를 출간한다. 또 오는 9월2~12일 서울 서촌 팔레드서울에서 한국 여행 그림으로 개인전을 연다.
 
 
<아트로드, 한국을 담다>
김물길 | RHK | 1만3,800원

글 고서령 기자 사진제공 김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