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소도시에 취하다, 묵직하게 그리고 산뜻하게

2017-07-05     김예지
맥주가 독일의 다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독일에서 맥주를 빼놓을 순 없는 노릇이다. 가벼운 에일부터 스모크 향이 진하게 풍기는 흑맥주까지. 맘만 먹으면 맛볼 수 있는 독일 맥주 종류는 그야말로 무궁하다.

여기까진 익히 알고 있었는데 독일에 ‘와인’이라니? 가까운 프랑스나 이탈리아 산 와인을 들여오겠거니 짐작했건만, 그동안 독일 사람들은 이토록 푸른 와인 밭에서 직접 포도를 키워 내고 있었다.
 
결과물은 놀라웠다. 향긋하고 산뜻한 게 달지도 않고 쓰지도 않은 화이트 와인의 향과 맛을 처음 경험한 순간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충격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묵묵한 목 넘김으로 훅 돌진하는 맥주와 가볍게 혀끝을 살살 달래는 와인, 날마다 둘이 번갈아 얼마나 밀당을 하던지. 여행 내내 취하지 않고 배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입호펜의 언덕 위에서의 만찬. 다시 사진 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밤베르크의 맥주는 맛이 진하고 묵직하다. 진국이다
 

●Bamberg 밤베르크
 
비어 코스를 음미하다

초반부터 너무 대놓고 내보이면 김이 새는 법이다. 끝이 뻔한 영화의 결말처럼 말이다. 여행지도 마찬가지다. 유명한 데는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지만, 길 초입부터 노골적으로 ‘나 관광지야’ 하듯 사인을 세워 놓으면 어딘가 모르게 기대감이 확 줄곤 했다. 그런 점에서 밤베르크는 완벽한 포커페이스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관광지가 아니었다. 집과 교회와 가게들이 있는, 그저 평범하고 한적한 동네로만 보였다. 그런데 여기 맥주가 그렇게나 맛있기로 정평이 났단다. 중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덕에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까지 했단다. 도대체 무슨 맛일까, 얼마나 어떻게 톡 쏠까? 난생 처음 보는 맥주의 뚜껑을 갓 따기 전처럼 궁금하고 설레었다.

밤베르크 사람들은 중세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지역 특색이 담긴 맥주를 제조해 왔다. 냉장고와 같은 저장 시스템이 제대로 없던 시절부터 강물을 이용해 맥주를 만들었다. 요즘 한참 인기인 크래프트 비어를 좋아한다면 독일의 ‘맥주순수령(Reinheitsgebot)*’이라는 말을 들어 봤을지도 모르겠다. ‘오직 물, 몰트, 홉으로만 맥주를 만든다’는 양조 원칙. 바이에른의 공식적인 맥주 순수령은 1516년에 반포됐는데, 밤베르크는 이보다 27년 앞서 그만의 고유한 순수령을 제정했던 원조 ‘비어 시티’다. 순서가 아닌 숫자로만 봐도 알 수 있다. 19세기 초반 밤베르크의 인구는 1만7,000명, 브루어리는 65개에 달했다.
 
영화로 말하자면 밤베르크는 독립 영화 같았다. 아주 원석 같은
레그니츠강은 맥주의 원료가 되기도 사람들의 쉼터가 되기도 했다
샐러드와 소시지 맛이 나는 밤베르크의 맥주는 코스 요리 와도 맞먹었다
거품을 낸 스모크비어는 그 향이 더욱 진하게 올라온다
 

백문이 불여일견이 아니겠는가. 비어로텍(Die Bierotheck) 브루어리로 향했다. 300여 개가 넘는 맥주 종류를 자랑하는 비어로텍은 각종 실험적인 맥주를 생산하고 있는 브루어리다. 브루마스터 데이비드는 맥주를 마치 하나의 코스 요리처럼 선보였는데, 그가 선보인 첫 번째 맥주는 샐러드 맛이 나는 맥주(Gusken Gose)였다. 일명 ‘오이 맥주’로 오이와 고수, 소금으로 만든 애피타이저 격 맥주라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채소 맛이 감돌았다. 메인 요리는 밤베르크의 명물 스모크 비어(Mohrs Brau)로 장식했다. 8.7도의 다소 강한 맥주로, 훈제 소시지 맛이 난다. 마시는 방법도 재밌다. 뜨겁게 달군 쇳덩이를 맥주가 담긴 잔에 넣어 카푸치노 같은 거품을 낸 다음 재빨리 마신다. 위 거품은 따뜻하고 아래 맥주는 차가워 마치 맥주와 소시지를 한 번에 먹는 것 같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조금씩 이 맥주 저 맥주를 맛보다 보니, 점점 배가 불러 왔다. 취기는 진작 올라 얼굴이 후끈했다. 바깥 공기가 필요했다. 산책이 하고 싶다. 데이비드가 디저트는 굳이 권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맥주 순수령│1516년 독일 바이에른 공국의 빌헬름 4세가 시행한 맥주 양조 법령.
 
비어로텍
오픈: 월~금요일 12:00~20:00, 토요일 10:00~20:00
주소: Die Bierothek Untere Konigstraße 1 96052 Bamberg, Germany
홈페이지: www.bierothek.de
 

수수한 마을에 도발적인 빨간 집. 초록 덩굴과의 조합이 맘에 든다
입호펜에는 드넓은 포도밭이 펼쳐진다. 은은한 와인 향이 코끝에 맴돈다

●Iphofen 입호펜
 
싱그러웠던 그날의 언덕

아직도 선연하다. 그날 오후의 기억이.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주변에 말하고 다녔었다. 그때 그 바람이 어떻게 살살거렸는지, 그때 그 와인은 어찌나 입에 착착 감기던지, 그때 그 시간이 멈추길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 이야기를 막바지에야 꺼내게 됐다. 평소 무엇이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을 맨 뒤로 두는 습성이 있다.

독일의 와인이 이리도 매력적일 줄은 몰랐다. 아니, 정확히 독일의 프랑켄(Franken) 와인이라 해야겠다. 프랑켄은 바이에른주의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독일 내에서도 와인 산지로 유명한데 레드 와인보다는 주로 화이트 와인을 생산한다. 프랑켄 와인을 단번에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다. 흔히 보는 보편적인 와인 병 대신 아랫부분이 둥글고 납작한 모양의 독특한 병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리즐링(Riesling), 피노누아(Pinot Noir) 등의 품종도 있긴 하지만 40%의 와인을 실바너(Silvaner) 품종으로 만든다는 것 또한 이 지역의 특징이다. 아이스바인 같은 독일의 달달한 와인과는 달리 그 맛이 드라이하다. 

프랑켄 와인에 제대로 맛을 들인 건 슈반베르크(Schwanberg) 남쪽에 위치한 입호펜에서다. 낮이 그리 덥지도 밤이 그리 춥지도 않은 적당한 날씨에 언덕의 경사 또한 볕이 들기에 적절해 포도 재배에 제격인 곳이다. 숲으로 폭 둘러싸인 아담한 마을 중심에는 시청과 교회, 와이너리, 공원 등이 있고 약 3,000헥타르에 이르는 땅에는 3개의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마을을 찬찬히 둘러본 후 경사진 굽이 길을 따라 마침내 한 언덕 위에 올랐다. 이럴 수가. 저기 저 멀리 초록 밭이 내다보이는 언덕 위에 어느새 와인 한 상이 거뜬히 차려져 있는 게 아닌가. 솔직히 이후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머리로 생각하는 대신 온 감각을 곤두세운 탓이다. 모든 게 싱그러웠다. 햇빛과 바람이, 화이트 와인의 향이, 그날의 언덕과 기분이 그랬다. 비좁은 캐리어 속을 비집고 집으로 공수해 온 와인 한 병은 아직 따지 않은 채로 고이 모셔 뒀다. 가장 좋은 것은 늘, 마지막 순간까지 남겨 두는 탓이다.
 
입호펜 와인 투어
전화: +49 9323 1221
홈페이지: www.iphofen-erleben.de/vineyard_tour
 
 
와이너리 운영자가 직접 전수한
프랑켄 와인 즐기는 법
와인 병을 잡을 때는 아래를 손 전체로 감싸 쥐고, 잔에 와인을 따를 때는 넓적한 면이 바닥을 향하도록 한다. 잔에 담긴 와인을 맛보기 전 충분히 코로 들이마셔 향을 느낀 후, 다함께 건배를 외친다. ‘춤볼(Zum Wohl)!’ 여기서 유의할 것 하나, ‘프로스트(Prost)’는 맥주를 위한 건배사다. 
 
▶travel info
AIRLINE
루프트한자 독일항공이 인천-뮌헨, 인천-프랑크푸르트 직항 노선을 운항한다. 뮌헨까지 소요시간은 약 11시간 30분, 프랑크푸르트까지는 약 11시간 10분 정도 걸린다.
홈페이지: www.lufthansa.com
 
TIME  &  WEATHER
독일은 한국보다 7시간 느리다. 날씨는 비 소식이 잦고 변화무쌍해 여행시 겉옷을 챙겨 가는 편이 안전하다. 계절별로 봤을 때 전반적으로 우리나라보다 3~5도 정도 낮은 기온이다.
 
글·사진 김예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