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령의 우주여행] 고추장 단지

2017-08-29     트래비
친구가 보내 온 선물 상자를 열어 보니 주먹 반만 한 유리단지 네 개다. 네 개의 단지에는 각각 다른 고추장이 담겼다. 황태를 다져 넣은 고추장, 잔멸치를 소복이 넣은 고추장, 쇠고기볶음고추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굴비 고추장이었다. 이 앙증맞고 호사스런 고추장 선물에 입이 헤벌어져선 당장 모락모락 김 오르는 뜨거운 밥 한 공기 푸고 싶었지만 겨우 눌러 참았다. 이런 건 적어도 두 달 이상 떠나는 긴 여행길에서나 뚜껑을 열어야 하는 법이다. 나는 팬트리 선반에 고추장 단지 네 개를 가만히 올려 두었다.
 
나에게 여행은 그저 두 가지로 나뉜다. 짧은 여행과 긴 여행. 아무거나 잘 먹는 나는 짧은 여행을 떠날 때면 어떤 먹을거리도 챙기지 않는다. 여행지의 음식을 집어먹기에도 바쁜 여정이니 말이다. 그래도 긴 여행을 떠날 때면 꼭 챙기는 것이 있다. 자른미역 50그램짜리 한 봉지. 건미역을 아주 작게 잘라놓은 자른미역은 외국 여행 중에는 무척이나 유용하다. 여행지의 아무 슈퍼마켓이나 가도 살 수 있는 일본 미소된장 한 통만 준비하면 된다. 자른미역을 한꼬집 집어 물에 비벼 씻은 뒤 끓는 물에 퐁당퐁당 넣고 미소된장 한 숟갈 떠 넣으면 그걸로 끝. 멸치랑 다시마 넣고 호박 썰고 양파 썰고 두부랑 마늘도 넣어야 하는 우리나라 된장찌개와는 비교도 안 되게 쉬운 레시피다. 공기째 들고 호로록 마셔 버리면 끝나는 미소된장국 한 그릇이면 긴 타국생활에서도 속 든든히 지낼 수 있었다. 
 
독일에서 두 달 넘게 지내며 소설을 쓰던 때에는 동네 빵집에서 열 개들이 크루아상을 한 봉지씩 사두었다. 아침이면 크루아상을 반 갈라 얇은 햄 두 장을 끼워 넣고 전자레인지에 딱 1분 30초를 돌렸다. 그러면 빵에서 반질반질한 버터물이 배어 나오기 마련이었고, 미소된장국 한 공기를 옆에 두고 오물오물 샌드위치를 먹었다. 베를린에서는 꽤나 단조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노트북을 챙겨 간 카페에서 다섯 시간쯤 원고를 쓰고 돌아오는 길에 베트남 식당엘 들러 국수를 먹거나 태국 식당에서 새우가 잔뜩 들어간 그린커리를 먹었다. 늦은 저녁은 건너뛰고선 밤이 오기를 기다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었다.
 
호주 브리즈번에서는 꽤나 살이 올랐다. 나는 그곳에서 직장을 다니던 중이었고 퇴근길이면 으레 마켓엘 들렀다. 오후 다섯 시 반이면 클로징 세일을 하던 곳이었는데 그러면 손바닥 두 개를 합친 크기만 한 스테이크용 쇠고기를 반값에 살 수 있었다. 바질과 로즈마리를 뿌려 프라이팬에 스테이크를 굽는 저녁이면 너무 배가 불러 미소된장국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영어가 서툴러 TV 프로그램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저녁 여덟 시도 안 되어 잠이 들었다. 그런 후면 새벽 다섯 시도 안 되어 또 눈이 떠졌고 하도 할 일이 없어 브리즈번 강변을 뛰었다. 
 
길게 떠나면서 자른미역 50그램 봉지를 챙기지 않은 건 미국으로 떠나던 때뿐이었다. 호텔에서 석 달을 넘게 지내야 했는데 전기주전자 외에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대신 아시안 마켓에서 인스턴트 미소된장국을 한 상자 샀다. 미소가루를 털어 넣고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는 거였다. 근처의 중국 식당에서 덮밥 요리를 포장해 와 나는 호텔방 테이블에 펼쳐 놓고 머그잔에 담긴 미소된장국을 마셨다. 잠이 안 오는 밤이면 위스키 한 잔씩을 따라 마시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멸치 한 마리 집어 고추장에 푹 찍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앙증맞은 고추장 네 단지를 팬트리 안에 넣어 두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긴 여행을 언제 또 떠날까 싶다. 아기가 한참 더 자라야 할 텐데. 그렇다면 고추장 단지에는 푸르고 흰 곰팡이가 피지 않을까. 그러기 전에 먹어 치워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자꾸만 아깝다. 고추장 단지에 곰팡이가 피기 전까지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 주었으면. 좀 그래 주었으면.  
 
소설가 김서령
별 수 없이 가까운 이웃나라의 수영장 딸린 리조트 호텔만 뒤적이고 있는 아기엄마 소설가다. 사실 그것도 자신이 없다. 며칠 전 고작 40분 거리에 있는 물놀이장에 다녀오고도 나는 두 살배기 아기의 뒤치다꺼리로 진을 다 뺐다. 그래도 여전히 여행잡지는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유혹. 아가야, 엄마의 노마드라이프를 위해서라도 빨리 자라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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