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인제에는 가을이 성큼

2017-09-27     양이슬
나뭇잎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이틀 전 시원하게 쏟아진 빗물 덕분이었을까. 
산 속을 걷는 틈틈이 흐르는 물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이따금씩 뺨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은 덤.
그렇게 인제는 한 발짝 먼저 내 품에 가을을 안겨줬다.
 
 
자작나무 숲에는 여행객들을 위한 길이 마련돼 있다
 
●산속 깊이 숨어있는 새하얀 숲

자작나무 숲이라고 했다. 분명 ‘숲’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왜 가벼운 산책쯤 일거라 생각했었을까. 3년 전 처음 자작나무 숲을 찾았을 때 이야기다. 한여름이라 옷차림은 가벼웠고 샌들까지 신었더랬다. 2시간 이상 자작나무 숲을 둘러보고 나오니 샌들은 끊어졌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온통 땀으로 가득했다. 가장 뜨거웠던 7월말이었으니, 제 아무리 시원한 숲이더라도 뜨거운 열기를 식히는 건 어려웠을 테다.

다시 자작나무 숲을 찾았을 땐 3년 전 기억을 더듬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여름보다 가을에 가까운 8월 말을 선택했고, 운동화를 신었다. 쏟아질 땀에 대비해 손수건까지 챙겨 원대리로 갔다. 혹시 몰라 자그마한 휴대용 선풍기도 주섬주섬 담았는데 가방 속에서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전날 시원하게 내린 비로 인제에 가을이 찾아온 덕분이었다.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이라는 이름의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산림청이 인정한 산림 생태 탐방 숲이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 관광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축구장 193개에 달하는 면적인 138헥타르에 심어져 있는 자작나무 69만본은 입구에서부터 1시간은 이동해야 볼 수 있다. 자작나무 숲까지 이동하는 길도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길은 원정임도다. 주차장의 이정표가 가리키는 입구와 이어지는 길로 3.2km 가량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자작나무 숲까지 보통 걸음의 속도로 약 1시간. 어린 아이들도 곧잘 따라 오를 정도로 완만한 산책길로, 이 곳을 지나야 비로소 자작나무 숲을 볼 수 있다.
 
하얗고 윤이 나는 나무껍질로 유명한 자작나무는 태울 때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탄다고 한다. 그래서 자작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나무는 단단하고 결이 고와 가구로 만들기도 하고 조각도 하는데, 벌레도 잘 먹지 않아서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경판 일부도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높고 길게 뻗은 자작나무 한, 두 그루가 보이기 시작한다. 어느새 주변이 하얀 겉살을 드러낸 자작나무로 가득하게 되는데, 그 한 가운데에는 벤치와 자작나무로 만든 움막 등이 마련돼 있다. 비로소 자작나무 숲에 도착한 것이다. 넓은 공터를 기준으로 숲을 둘러볼 수 있는 길은 4개다. 1, 2코스는 어렵지 않게 중심지 주변을 둘러볼 수 있고, 3코스는 숲을 헤치며 출발했던 초입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반대 방향으로는 숲으로 갈 수 있다. 오고 가는 길을 다르게 이동하면 자작나무 숲과 함께 원대리 숲길의 재미도 느껴볼 수 있다. 인제 자작나무 숲은 입산 시기와 시간이 정해져 있다. 산불 위험이 높은 봄, 가을에는 철저하게 입산을 금지하고 있는 것. 하절기인 5월부터 10월까지는 오후 3시, 동절기인 12월부터 1월에는 오후 2시까지만 입산이 가능하다. 올해 가을 입산 통제 기간은 11월1일부터 12월15일까지다. 
 
한 시간 여를 걸어 도착한 자작나무 숲에는 쉴 수 있는 벤치와 자작나무로 만든 움막 등을 볼 수 있다
자작나무 숲길. 길을 걷다 보면 가족 단위 방문객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하추리 도리깨마을의 특산물 판매장. 찰옥수수의 껍질을 벗겨 만든 도리깨뻥이요는 고소함이 가득하다
 
 
●굽이굽이 산촌마을 ‘하추리’

“자작나무 숲은 사실 숲 하나 만으로도 하루 코스나 마찬가지예요. 산이 험하진 않지만 천천히 둘러보더라도 다녀오면 온 몸에 힘이 쭉 빠지거든요.”

오전에 자작나무 숲을 다녀왔다고 하니 하추리 도리깨마을의 강성애 체험학교 사무장이 웃으며 말했다. 역시나 같은 날 오전에 단체 관광객들과 자작나무 숲을 다녀왔는데 그중 몇몇은 구두를 신고 숲을 향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하추리 도리깨마을은 자작나무 숲에서 자동차로 약 10분 정도면 닿는 산촌마을이다. 다양한 자연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구성했고, 인제군에서 선정한 행복마을 1호이기도 하다. 설악산과 내린천 사이에 자리 잡은 청정마을로 친환경 우렁이쌀, 감자, 찰수수, 찰옥수수 등 토종 잡곡과 느타리, 표고, 송이버섯 등 다양한 먹거리를 특산품으로 판매한다. 마을에는 총 66가구가 모여 살고 있는데, 하추리에서 생산되는 모든 먹거리의 수매, 도정, 가공, 판매는 전 주민이 조합원인 하추리 영농조합법인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그만큼 확실하게 믿고 먹을 수 있는 제품을 생산하고 제공한다는 얘기다.

작은 마을이지만 이력은 상당하다. 농어촌공사에서 지정하는 농촌관광사업에서 4년 연속 ‘으뜸촌(Best Rural Village)’에 선정됐고, 지난해 농협중앙회에서 선정하는 전국팜스테이마을 등급 평가에서 3위를 기록했다. 농림축산식품부 선정 농어촌인성학교(청소년들의 창의적인 체험활동을 제공할 수 있도록 지정된 마을 권역)이자 미래 창조 귀농귀촌 우수마을로 지정되는 등 재능도 다방면으로 갖췄다. 그래서인지 하추리를 방문하는 관광객들 역시 해가 거듭할수록 증가하고 있다. 2012년 1,600여명이 불과했지만 지난해에는 8,200여명이 다녀갔다. 체험학교의 강성애 사무장 역시 취재차 하추리를 방문했다가 그 매력에 빠져 8개월 전 이곳으로 귀촌을 결정했다. 하추리의 매력이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방증하는 산 증인이라고나 할까. 지금은 하추리의 매력을 더 많은 여행객들에게 전달해주고자, 또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지내고 있다.  
 
1 하추자연체험학교는 어린 아이부터 청소년, 어른까지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곳이다 2 자작나무, 가래, 찰옥수수 등을 활용한 공예활동
아궁이를 이용한 가마솥 밥짓기는 가장 인기 있는 체험활동이다
계곡물로 운영되는 수영장. 계곡물의 특성 상 며칠만 받아둬도 이끼가 껴서 그때그때 새로 물을 받는다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하추리의 자연

하추리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하추자연체험학교’다. 66가구 중 60가구가 출자해서 설립한 자연체험학교는 폐교를 리모델링해서 숙소를 만들고 수영장과 바비큐장, 야외공연장, 체험장, 식당에 세미나실까지 갖췄다.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체 여행객부터 기업 워크숍, 동창모임 등 다양한 단체 여행객들이 체험학교를 방문한다.

하추자연체험학교에서는 자연 속에서 나는 그 무엇 하나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름철 수영장의 물은 체험학교 옆에 있는 하추리 계곡물로 채우고, 체험프로그램에서 사용하는 자작나무, 가래 등은 마을 인근에서 자라는 나무와 나무 열매 등을 활용한다(물론 자연을 손상시키지 않고 떨어진 것을 줍거나, 버려진 것을 재활용하는 방식이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노력이 곳곳에 숨어있다. 산촌 체험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체험은 아궁이 가마솥 밥짓기다. 직접 아궁이에 장작을 넣어 불을 떼고 하추리에서 나는 잡곡을 섞어 가마솥밥을 짓는 활동으로,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에게도 인기 체험이다. 청정 자연에서 나는 잡곡과 맑은 물로 지은 밥은 더할 나위 없이 맛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체험학교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최소 15명 이상이 모여야 한다는 점이다.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다보니 언제 방문할지 알 수 없는 개인 관광객들을 위해 상시 오픈하는 데에는 시간적, 인력적 한계가 따르기 때문이다. 자연체험학교가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는 이유다. 그럼에도 최근에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고, 한 번 다녀간 사람들의 재방문도 이어지고 있다. 

가을에는 놓치지 말아야 할 축제도 있다. 2013년부터 매년 실시한 ‘도리깨 축제’다. 도리깨 축제에서는 한해 농사의 결실인 농산물 수확의 기쁨을 축제로 보여주는 자리다. 하추마을 어르신들의 추수감사제를 시작으로, 곡물들을 수확한 후 어떠한 과정을 거쳐 식탁에 오르는지를 마당놀이를 통해 볼 수 있고 지역문화 단체와 자매단체의 각종 공연도 펼쳐진다. 올해는 11월21일부터 22일까지 이틀간 진행된다. 
 
박인환 시인의 품안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마련된 전시작
전시관은 시인의 일생을 돌아볼 수 있도록 꾸며졌다

●인제의 중심에서 만난 박인환 시인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 살아있는 것이 있다면…. 인제에서 나고 자란 박인환 시인의 대표작이다. 인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박인환 시인의 짧은 여생을 전시해놓은 박인환문학관이 있다. 

박인환 시인은 모더니즘 시의 대표시인으로 꼽힌다. 20대 초반의 청년 박인환은 한때 서점을 운영했고, 서점을 그만두면서 신문사에 입사해 기자로 근무하기도 했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슬하에 자녀도 뒀다. 김병욱, 김경린 등과 동인지 <신시론(1948년)>을 발간하고 김차영, 김규동, 이봉래 등과 부산에서 동인 ‘후반기(1950년)’ 모임을 결성해 모더니즘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가 서른 살 되던 해, 첫 시집인 <박인환선시집>을 냈지만 이듬해 심장마비로 요절했다.

문학관은 박인환 시인이 운영했던 서점 ‘마리서사’를 시작으로 동료들과 자주 들르던 선술집 ‘유명옥’, 고전음악 전문점이자 명동 부근에 처음으로 개업 한 다방이자 문인들, 예술인들이 모여 문화행사까지 열었던 ‘봉선화 다방’, 예술인들의 집합처 역할을 했던 ‘동방싸롱’ 등을 재현했다. 그중 박인환 시인이 죽기 얼마 전 선보인 작품인 ‘세월이 가면’이 탄생한 곳은 대폿집 ‘은성’이다.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약 10년간 운영했던 곳으로, 영화제작자인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외동아들인 최불암을 데리고 은성을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박인환 시인을 비롯해 이봉구 소설가 등이 단골이었다. 박인환문학관에서는 박인환과 그의 시, 그리고 그가 머물던 장소에 얽힌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그중 대표적인 시가 세월이 가면이다.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 시인의 외상값으로 태어난 시다. 은성에 밀린 외상값을 갚지 않고 계속 술을 요구하자 주인이 술값부터 갚으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박인환은 은성 주인(이자 최불암 어머니)의 슬픈 과거를 시로 표현했고, 함께 있던 이진섭 작곡가에게 작곡을 부탁했다. 곡이 완성되자 인근에 있던 가수 현인을 불러 노래를 부르게 했다고. 노래를 듣던 은성 주인장은 외상값은 안 갚아도 좋으니 노래를 부르지 말아달라며 눈물을 쏟았다는 일화다.

문학관 한 편에는 박인환의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시인이자 기자였던 그의 실제 사진들을 전시했다. 문학관을 나오면 박인환 시인의 대표작인 목마와 숙녀를 조형적으로 디자인해 시인 박인환의 거리를 꾸몄다. 알록달록한 조형물과 선선한 바람이 마치 잠시 앉아서 쉬었다 가라고 잡는 것 같아 조금 더 그곳에 머물게 된다. 
 
*기자가 체험한 우수여행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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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양이슬 기자 ysy@trave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