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지형의 여행유전자] 작은 것이 아름답다

2018-01-31     채지형
 
2018년 첫날은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를 보며 맞이했다. 오렌지 빛과 보랏빛이 어우러진 일출을 기대했지만, 텔레파시가 통하지 않았는지 화려한 하늘은 등장하지 않았다. 어둠에 쌓여 있던 안나푸르나 봉우리가 시간이 흐르면서 윤곽을 드러내는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만,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좁은 의자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지그시 감았다. 히말라야의 에너지를 몸과 마음속 깊은 곳까지 불어 넣고 싶었다. 

새해 첫 아침이지만, 트레킹 마지막 날이었다. 하산 출발점은 촘롱(Chomrong). 내려오는 동안 자꾸 뒤를 돌아봤다. 산이 부르는 것 같았다. 숨을 헐떡거리느라 올라갈 때 보이지 않았던 앙증맞은 꽃들이 눈에 밟혔다. 한겨울에 초록을 뽐내고 있는 우거진 풀, 히말라야를 관통하며 내려오는 모디강(Modi Khola)의 장쾌한 울림, 나무 뒤에 숨어 지켜보고 있는 원숭이, 깊은 산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발길을 한없이 더디게 만들었다. 

‘히말라야여, 안녕’을 살랑살랑 흥얼거리며, 계단을 설렁설렁 내려오는 내 앞에 폭탄이 떨어졌다.
“빨리 내려가서 쉬어야지. 지금 여유 부릴 시간이 없다구.” 참다못한 남편의 가시 돋친 말이었다. “마지막까지 구석구석 히말라야를 누리고 가야지. 저 작은 꽃 좀 봐. 이쁘지 않아?” ‘포카라’라는 목표까지 직진하려는 남편과 목표에 도달하는 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나의 간극.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히말라야의 꽃은 엄마를 생각나게 했다. 여행길에서 엄마가 반응하는 지점은 언제나 작고 사소한 것이었다. 파리 에펠탑 앞에서는 “멋지다” 한마디 하시곤, 숙소 앞에 피어 있는 조그마한 꽃 앞에서는 감탄사를 아끼지 않았다. 캄보디아에 갔을 때도 그랬다. 웅장한 앙코르와트보다는 사원 안에 뿌리내린 작은 풀 앞에 발걸음을 한참 동안 멈춰 계셨다. 그런 엄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작고 사소한 것들에 쉽게 마음을 주는 이유가. 

엄마의 ‘작은’ 유전자는 나에게 전해지면서 더 커졌다. 작은 인연과 사소한 즐거움이 주는 기쁨을 쫓아다니는 여행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거창한 이름이 붙은 여행보다는 소소한 여행에 마음이 끌린다. 여행을 계획할 때는 몸에서 힘을 빼고 목표를 줄이고, 일정은 최소한으로 잡는다. 여백을 충분히 넣어서 ‘우연’에 시간을 맡긴다.  
 
돌아보면, 여백에 들어온 일들이 더 마음에 오래 남았다. 만리장성을 걷던 기억보다는 허름한 음식점에서 베이징 덕을 맛보던 기억이, 어마어마한 빅토리아 폭포를 보며 느낀 감동보다는 아프리카 친구들과 맥주를 기울이며 수다를 나누던 추억이, 런던이나 파리 같은 큰 도시보다 이름 모를 작은 기차역에 내려 어슬렁거리며 맞았던 바람이 마음속 앨범에 더 크게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도쿄 여행에서 들렀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스튜디오만 해도 그렇다. 하야오의 작업실을 보는 것은 물론 흥분되는 일이었다. 아름다운 이야기와 그림이 어우러지는 과정, 아기자기한 주인공들의 세계, 애니메이션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까지 구석구석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러나 그곳을 떠올리면 스튜디오의 작품보다 미타카 숲에 융단처럼 펼쳐진 낙엽이 먼저 생각난다. 마치 젊음의 샘물을 마시고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았다고나 할까. 자판기에서 뽑은 캔 커피를 오른손에 들고 낙엽을 사각사각 밟으며 한참을 서성댔던 기억이 난다. 
 
올해도 작고 사소한 재미를 쫓아다니는 기조는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앙증맞은 기쁨을 누리고 깨알 같은 재미를 모아, 가까이 있는 이들과 함께 나누며 사는 것. 2018년 히말라야에서 내려오면서 다이어리에 쓴 작은 목표다. 
 
P.S. 남편과의 다툼은 어떻게 되었냐고요? 
옥타브 높은 대화가 몇 번 오갔지만, 금방 풀었습니다. 
작은 원칙이 하나 있거든요. ‘싸우더라도 밤 12시 전에 풀 것’. 
다행히 아직까지는 잘 지키고 있답니다.  
 
*글을 쓴 여행작가 채지형은 기꺼이 헤맬 줄 아는 아버지와 나누기 좋아하는 어머니의 유전자를 받아, 신나게 헤매며 행복을 나누는 삶을 살고 있다. 캠핑홀릭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올해는 어디로 여행할까 고민하며, 지구본을 하염없이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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