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근현대사의 흔적을 좇다, 마르코스 투어

2018-04-03     이승철
일로코스는 필리핀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곳이다. 독재자였던 마르코스(Marcos) 전(前) 대통령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가 살았던 저택과 박물관에는 과거의 흔적이 아직도 짙다. 마르코스의 흔적을 좇다 보면 필리핀의 근현대사가 또렷이 들여다보인다. 
 
마르코스 부부의 젊은 시절은 사진으로만 기억된다
야외 정원에서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다

●마르코스의 흔적을 따라가다

라왁국제공항에 내려 현지 여행사에서 준비한 밴에 올랐다.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은지라 일로코스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곧바로 마르코스가 떠올랐다. 일로코스는 그의 고향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곧잘 비교되는 그의 삶이 궁금해졌다. 

공항에서 20여 분을 달려 파오아이 호수(Paoay lake) 북쪽에 위치한 2층 저택 말라카냥(Malacanang of the North)에 도착했다. 마르코스가 대통령이던 시절 가족과 함께 거주했던 곳이다. 지금은 일로코스주에서 관리하며 주말에는 시민들을 위한 파티와 결혼식 장소로 많이 쓰인다.
 
저택에 들어서니 북쪽 벽면이 탁 트인 응접실 너머로 푸른 잔디마당과 너른 파오아이 호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침 야외 정원에서 누군가의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정원에 가득 찬 새하얀 테이블이 눈부시게 빛나 보였다.

말라카냥에는 마르코스 가족이 살았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르코스 일가가 사용했던 의자와 테이블, 침대 등 가구들도 모두 그대로 놓여 있다. 아들인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가 썼던 방 안에는 그가 직접 그린 그림도 걸려 있다. 주인 없는 방이지만 ‘손대지 마시오’라고 적힌 경고 표지판이 왠지 모를 괴리감을 불러일으킨다. 이곳에 살며 21년간 독재자로 군림했던 마르코스는 1986년 민주화를 염원하며 일어난 피플파워(People Power) 혁명으로 인해 자리에서 물러난 후 하와이로 망명했다.
 
예전 대통령 집무실로 이용되었던 공간
마르코스 부부가 사용했던 침대와 잠옷
 
저택 곳곳에는 마르코스 대통령의 업적이 전시되어 있다. 농업 진흥을 위한 품종개량 사업과 북부에서 남부까지 건설한 고속도로, 하와이 파견 노동자 사업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머릿속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꾸 오버랩 되었다. 새마을 운동과 경부고속도로, 독일 파견 노동자까지 둘의 행적이 너무나 비슷했다. 1917년생 동갑내기인 마르코스와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계엄령 선포와 독재까지 정치 인생도 비슷하다. 많은 이들이 왜 두 인물을 비교하는지 이번 투어를 통해 확실히 알게 되었다. 
 
Malacanang of the North
주소: Laoag-Paoay Road, Paoay, Ilocos Norte, Philippines
입장료: 어른 30페소, 어린이 10페소
전화: +63 927 834 9824
 
 
바탁에 위치한 마르코스 박물관

2차 세계대전 때 사용됐던 차량. 기름만 넣으면 당장이라도 다시 달릴 듯하다
박물관 입구에 세워진 마르코스 흉상
 
●인간 마르코스를 만나다

말라카냥에서 약 25분 정도 달린 후 작은 2층 집 앞에 차가 멈췄다. 입장료 표시가 없다면 박물관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주변 집들과 차이가 없었다. 

이곳은 마르코스 박물관(Marcos Museum)으로 실제 그가 유년기를 보낸 집이기도 하다. 부유했던 어린 시절부터 1965년 대통령으로 취임하기까지 그의 전 생애가 전시되어 있다. 필리핀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한 마르코스는 젊은 시절 아버지의 정적을 암살한 혐의로 17년 4개월을 선고받은 적도 있다. 그는 형 집행 기간 변호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후 직접 자신을 변호해 6개월 뒤 무죄판결을 이끌어내 세간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당시 신문 보도들이 벽면에 빼곡하게 붙어 있다. 이 밖에 박물관에는 항일전쟁에 참여한 일들과 이멜다 마르코스와의 로맨스, 1949년 하원의원 선거에 당선되면서 정치를 시작하게 된 과정들이 시기별로 정리되어 있다.

마르코스 박물관은 대통령 마르코스가 아닌 인간 마르코스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단지 독재와 망명지에서의 죽음뿐이었기에 박물관에서 본 그의 삶이 더욱 새롭게 다가왔다. 마르코스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니 조금이나마 필리핀이 보였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몰락 그리고 민주화 혁명이 필리핀을 지금 이 모습으로 이끌고 왔다는 것을 말이다. 
 
 
Marcos Museum
주소: Marcos Ave, Brgy. 10-N Lacub, Batac City, 2906 Ilocos Norte, Philippines
입장료: 어른 50페소, 어린이(12세이하) 30페소, 노인 30페소, 장애인 무료 
전화: 077 677 2657
 
 
일로코스 현역 의원인 이멜다 마르코스

마르코스를 이야기하면서 그의 부인인 이멜다 마르코스(Imelda Romualdez Marcos)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와 관련한 일화가 많지만 그중 3,000켤레의 구두가 가장 유명하다. 마르코스 가족이 해외로 망명한 이후 집에서 명품 구두 3,000켤레가 발견되었는데,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이멜다는 지금까지도 사치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고 있다. 현재 마르코스 박물관 옆 저택에 살고 있는 이멜다는 놀랍게도 일로코스 현역 의원으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마르코스 부부는 만난 지 11일 만에 결혼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필리핀 미인 대회 출신인 이멜다가 아름답기도 했지만, 마르코스가 볶은 수박씨를 먹고 있던 이멜다를 보고 자신에게 윙크한 것으로 착각해 한눈에 반해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죽어서도 잠들지 못한 영혼  

1989년 망명지에서 사망한 마르코스는 죽어서 편히 안장되지 못했다. 필리핀에는 우리나라의 국립묘지 같은 다기그 영웅묘지 (Libingan ng mga Bayani in Taguig) 가 있다. 대통령이나 주요 인사들이 이곳에 안장되지만 마르코스는 사망 당시 부정적인 여론에 따라 영웅묘지에 안장되지 못하였다. 이에 마르코스 가족들은 그의 시신을 방부 처리해 유리관에 안치한 후 박물관 옆에 별도 시설을 만들어 일반인들이 친견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두테르테(Duterte) 대통령이 당선된 후 2016년 11월18일, 마침내 마르코스의 시신은 다기그 영웅묘지에 묻히게 된다.
 
글 이승철 사진 주동원
 
일로코스 원정대
Date 2018년 1월26~30일 4박 5일
Member 김희진, 이승철, 주동원, 전수미, 정은주 기자
Cites 마닐라(1박)▶일로코스 라왁, 바탁(2박)▶비간시티▶마닐라(1박)
 
일로코스 Iiocos 알아보기
필리핀 북부지방 루손섬에 위치한 일로코스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과 오랜 역사 문화를 간직한 매력적인 여행지이다. 라왁국제공항이 있는 북쪽을 일로코스 노르테(Ilocos Norte), 비간 시티가 자리한 남쪽을 일로코스 수르(Ilocos Sur)라 부른다. 바다는 물론 드넓은 사막과 거대한 풍력발전 단지, 세계문화유산 등 볼거리, 즐길거리가 풍부하며 미식 코스로 잡아도 좋을 만큼 음식들이 다채롭다. 필리핀 전(前) 대통령인 마르코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일로코스 가는 법
아쉽게도 현재 일로코스를 직항으로 연결하는 항공편은 없다. 마닐라에서 일로코스 노르테의 주도인 라왁(Laoag)까지 현지 국내선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편하다. 약 1시간 정도 소요된다. 마닐라에서 라왁 사이를 오가는 버스도 있다. 마닐라 시내 교통상황에 따라 약 10~12시간 정도 소요된다. 
 
글·사진 필리핀원정대 일로코스팀 에디터 정은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