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루체른, 애매한 풍경을 통과한 산악 열차

기차 타고 유럽 여행 Switzerland Luzern

2018-06-18     노중훈
플뤼엘렌을
스위스

물. 21년 만에 다시 만난 스위스에 대한 호감정은 물, 정확히 말해 루체른(Luzern)의 한 호텔 객실 수돗물에서 비롯됐다. 항공기의 인천공항 지연 출발, 광활한 모스크바공항에서 헐레벌떡 걸어서 환승, 취리히공항에서 기차 타고 9분 걸려 취리히 중앙역으로 이동, 중앙역에서 기차 갈아타고 45분 지나 루체른역 도착, 역에서 호텔까지 약 550m 도보 이동. 첫날 숙소인 호텔 앙커(Hotel Anker)에 체크인하기까지 긴 여정을 감내해야만 했다. 목이 말랐다. 게다가 항공사 실수로 인천공항에서 부친 짐이 도착하지 않아 더 목이 탔다. 호텔 방에는 생수병이 없었다.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냥 수돗물을 틀어 곧바로 마시면 됐다. 벌컥벌컥. 청정 환경의 대명사 알프스산맥을 끼고 있는 스위스답게 물맛이 좋았다. 물비린내나 텁텁함은 조금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산뜻하고 상큼했다. 비로소 갈증이 해소됐다.

유럽에서

다음날 아침 산책에 나섰다. 몇 분 걷지 않아 루체른을 상징하는 카펠교(Chapel Bridge)가 눈에 들어왔다. 14세기 초 건립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긴 목조 다리가 새롭게 떠오른 해를 등지고 실루엣으로 빛이 났다. 로이스강을 건너지르는 또 다른 다리 위 벤치에서 누군가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햇살의 세례를 만끽했고, 누군가는 샌드위치를 우적거렸다. 그 뒤를 출근길 시민들이 총총걸음으로 지나갔다. 관광객의 비일상과 현지인의 일상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성당

온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카펠교의 이면에는 엄중하고 비상한 사연이 흐른다. 다리는 루체른 요새의 일부로 세워졌다. 적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말이다. 워터 타워(Water Tower)는 다리 중간쯤 솟아 있는 34m 높이의 팔각형 탑인데 보관 창고, 감옥, 고문실 등으로 사용된 전력이 있다. 지난 1993년에는 담배꽁초가 원인으로 추정되는 불의의 화재가 발생했다. 다리 지붕 안쪽에 걸린 17세기 판화 그림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복원의 과정을 밟아야 했다.

노천카페에서

애연한 사연을 보듬고 있는 또 하나의 상징물은 빈사의 사자상(Lion Monument)이다. 프랑스혁명 당시 루이 16세를 지키다 몰살당한 786명의 스위스 용병을 추모하기 위해 암벽에 새긴 부조물이다. 고통스런 최후를 맞이하는 사자의 모습이 사실적이면서 처연하다. 사실주의 문학을 개척한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이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 감동적인 작품’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신음하는 사자를 뒤로한 채 무제크 성벽(Musegg Wall)을 걷기 시작했다. 수목이 푸르렀고, 봄꽃이 화사했다. 새들의 지저귐만이 일요일 오전 같은 고요함에 기분 좋은 균열을 냈다. 현지 가이드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안겼는데, “스위스 사람은 연평균 22kg의 치즈와 12kg의 초콜릿을 먹는다”는 대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리기산

콧등에 땀방울이 맺힐 즈음 성벽에 올라서니 겨울에도 얼지 않는 루체른 호수와 여름에도 녹지 않는 만년설을 이마에 두른 알프스 봉우리, 그리고 오밀조밀한 시가지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성곽에는 모두 합쳐 9개의 탑(4곳만이 일반에 개방)이 자리하는데, 그중 한 곳은 1535년에 제작된 루체른 최고령 시계를 보유하고 있다. 박물관 속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부지런하기까지 해서 시내의 다른 시계들보다 1분 먼저 시각을 알린다. 시티 투어를 끝마치고 돌아서는 우리 일행에게 가이드는 이런 당부의 말을 남겼다. “오후에 리기산 가는 거 맞죠? 기차 탑승 시간에 절대 늦지 마세요. 제시간에 옵니다. 기차가 1분만 늦어도 스위스 사람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납니다.”

루체른에서

가이드의 말마따나 스위스 기차는 정확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간표에 적힌 대로 출발과 도착을 반복했다. 루체른역에서 기차로 30분 가량을 달려 아트골다우(Arth-Goldau)역에 닿은 다음, 산악 열차로 옮겨 타고 해발 1,797m의 리기(Rigi)산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열차는 애매한 풍경 속을 통과했다. 4월 하순은 설경과 녹음의 어느 쪽에도 몸을 온전히 의탁하지 않았다. 산 아랫녘 눈은 대부분 녹아 사라졌고, 산 중턱의 수목은 아직 왕성한 초록을 보여 주지 않았다. 산꼭대기인 리기쿨름(Rigi Kulm)과 키가 더 큰 주변 산봉우리에는 눈이 함초롬하게 쌓여 있었다. 어중간한 계절 속에서도 중첩한 산들과 구김살 없는 호수가 빚어내는 풍경은 장쾌했고, 시선은 멀리까지 뻗어 나갔다. 다소간의 섭섭함은 리기쿨름 한 정거장 전인 리기 슈타펠(Rigi Staffel)역의 작은 카페에서 맥주 한 잔으로 달랬다. 맥주 자체의 맛이 빼어났다기보다 웅장한 경관을 발아래 두고 마시는 느낌이 각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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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협조: 루체른관광청 www.luzern.com, 루가노관광청 www.luganoregion.com, 이탈리아관광청 www.italia.it, 밀라노관광청 www.comune.milano.it, 토스카나주관광청 www.visittuscany.com / www.toscanapromozione.it, 피렌체관광청 www.firenzeturismo.it, 피렌체컨벤션뷰로 www.destinationflorence.com, 유레일 한국 홍보 사무소 www.eurail.com

글·사진 노중훈  에디터 천소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