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여행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2018-09-03     김예지

한때 기획자로 일하던 ‘그림 비전공자’ 이미영 작가는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했다.
그동안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여행이 될 거라며 스케치북을 꺼내 보였다.

●여행의 새로운 방식


으레 스튜디오나 작업실이겠거니 했더니만. 뜻밖에도 이미영 작가는 서울 삼청동의 한 과학책방에서 만나자고 했다. 갈릴레오와 다윈의 앞 글자를 딴 ‘갈다(Galdar)’는 천문학자인 이명현 대표가 주택을 개조해 만든 책방 겸 커뮤니티 공간이다. 벽화 작업 의뢰를 받은 것도 아니고, 이미영 작가는 지금 갈다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커피를 내리고 차를 내주고 손님들과 대화를 한다. 물론 그림도 그린다.  

  
어쩌다 과학책방에서 일을 하게 됐냐 하면, 두 다리 건너 이어진 인연 때문이다. 그녀의 책 <어슬렁어슬령 여행드로잉>의 출판사 대표의 소개로 알게 된 이명현 대표가 좀 ‘특별한’ 책방을 오픈한다기에 동참했다.

“그냥 그때그때 끌리는 일을 따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웃음).” 진짜다. 이미영 작가는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산업공학을 전공하고 사회학 석사를 마친 그녀는 저작권 공유 NGO인 ‘크리에이티브 커먼즈(CC, Creative Commons)’에서 기획자로 일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가의 작품을 자유롭게 보고 누릴 수 있도록, 창작자에게 저작권을 공유할 것을 권하고 실행하는 사람. “그러다 직접 창작자가 되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그들을 설득할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만들고 내가 공유하는 거죠.” 

 

창작의 대상이 하필 여행 그림이 된 건 순전히 타이밍 때문이었다. 여행을 좋아하고 취미로 사진을 찍던 이미영 작가는 잘 보지도 않을 여행사진을 폴더에 잔뜩 쌓아 놓는 일에 슬슬 싫증이 나던 참이었다. “맨눈으로 오래 깊이 볼 수 있는, 뭔가 새로운 여행의 방식이 필요했어요.” 때마침 인권 만화가 이동수 선생의 ‘글씨를 쓸 수 있으면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말이 와 닿았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벗어나 내 손이 어디까지 사용될 수 있을까, 호기심이 일었다. 결국 하던 일을 그만 둔 그녀는 본격적인 자가 실험에 돌입했다. 명제는 ‘누구나 예술가, 모두가 창작자’, 부제는 ‘비전공자의 그림 그리기 도전’, 실험대상은 이미영. 실험배경은 여행, 설레게도 변수는 수없이 많았다.

 

●두 번의 실험으로 남은 것, 사라진 것


창작자가 되기로 한들 기획자의 감이 어딜 갈까. 2011년 당시만 해도 클라우드 펀딩(Cloud Funding)이라는 게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았던 때, 이미영 작가는 ‘어슬렁의 여행 드로잉북’ 프로젝트로 펀딩을 시도했다.

폴란드, 체코, 헝가리, 오스트리아, 그리스, 터키까지. 약 한 달간의 여행 동안 그린 그림으로 <동유럽과 지중해> 책을 펴낼 요량이었다. “책을 만들려고 보니 워드로만 작업하는 데 한계가 있더라고요. 유튜브 강의를 찾아보며 직접 인디자인(Indesign)을 배웠어요. 하다 보니 이런 걸 독립출판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뚝딱뚝딱 인쇄한 책을 독립서점에 입고하고, 이북(E-book)도 발간했다. 당연히 누구나 무료로, 출처를 밝힌다는 전제 하에 자유롭게 공유CC할 수 있도록. “나도 그림이 그리고 싶다, 독립출판을 해 보고 싶다는 반응들이 신기했어요.” 여기저기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힘입어 그녀는 단편이 아닌 시리즈를 도모했다. 또 한 번 펀딩을 걸고, 이번엔 조금 더 길게 두 달 반. 2013년 남미로 날아갔다. 


첫 번째에 비해 탈이 많은 여행이었다. 노트와 지갑, 여권, 노트북이 든 가방을 통째로 도둑맞았다. “그게 그렇게 되려고 그랬던 건지, 잃어버리기 일주일 전에 모든 그림을 다 스캔해 놨었어요.” 어쨌거나 가진 건 달랑 아이폰 하나. 게다가 추운 남미 고산지대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틈틈이 사진을 찍고 핸드폰 일기장에 감상을 끄적이는 것이 전부였다. 남은 그림은 한국에 돌아와 그리는 수밖에. “현지에서 그리는 것만이 답이라 생각했는데, 돌아와 그리는 그림도 나름 의미가 있더라고요. 여행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기분이었어요.” 덕분에 <남미-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페루>는 전작보다도 감정이 실렸다. 여행 중에 모든 그림을 그려 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덜었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명제에는 자신감이 붙었다.

 

●누구나 그릴 수 있다


그림은 사진엔 없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빨빨거리고’ 돌아다니지 않고도 여행이 훨씬 깊고 풍성해졌다. “짧게는 30분, 길게는 2~3시간 동안 한곳에서 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 순간 그 장소의 햇빛, 바람, 소리, 지나가는 사람들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요.” 더 많은 이들이 이 좋은 걸 경험했으면. 남미 여행에서 돌아온 이미영 작가는 지인이 운영하는 서울 상암동의 한 서점에서 여행 드로잉 클래스를 시작했다.

“그림은 본능이에요. 모든 사람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잘 그려야 한다는 생각에 못 그린다고 지레 포기하잖아요. 남한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냥 내 그림을 그리면 돼요.” ‘잘’ 그리지 않아도 되니 그녀는 수강생들에게 스킬을 먼저 가르치지 않았다. 일단 그려 보기를, 그리는 과정 자체를 즐기기를 바랐다. “선을 완벽히 반듯하게 그어야 할 필요도, 꼭 다 완성해야 할 필요도 없어요. 그린다는 걸로 충분해요.” 그렇게 말해 놓고 선생님의 작품이 너무도 칼같이 딱 떨어지면 배신감이 들 뻔했다. 다행히(?) 이미영 작가의 스케치북에 그려진 그림들은 그녀가 말한 그대로다. 바람처럼 흩날리는 선들. 비행기 티켓, 맥주 라벨과 덕지덕지 콜라주를 이룬 손글씨. 기차 시간을 놓칠세라 그리다 만 밑그림에는 물 만난 색들이 자유로이 노닐고 있다. 본능적으로.

 

●그림 그리고 사람


‘땡기는’ 일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이미영 작가에게는 주기적으로 ‘땡기는’ 사건이 하나 있다. 2016년 영국 런던·브라이튼, 2017년 미국 시카고, 올해 7월 포르투갈 포르투까지, 어느새 3년째 ‘어반 스케쳐(Urban Sketcher)’에 참가했다. 어반 스케쳐는 쉽게 말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프랜차이즈 그림 모임 같은 거다. “기본적인 기준만 충족하면 누구든 모임을 열어 운영할 수 있는 오픈소스 같은 개념이죠. 세계 어딜 가든 그림이라는 공통의 목적으로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어요.” 이런 어반 스케쳐가 1년에 한 번 작정하고 여는 이벤트가 ‘어반 스케쳐 심포지엄(Urban Sketcher Symposium)’이다. 전 세계 그림쟁이들이 모이는, 글로벌 대규모 그림 잔치 같은 거랄까. 올해 포르투에서 열린 심포지엄에는 46개국 800여 명의 스케쳐들이 참가했다.  


이미영 작가가 어반스케쳐 심포지엄에 꼬박 참가하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사람 때문이다. “같은 장소에 사람들이 함께 모여 그림을 그리면 정말 재밌어요. 혼자 그릴 때보다 에너지가 배가되는 느낌이거든요.” 단체로 우르르 다니면 주민들이 불편해 하진 않을까 싶지만, 의외로 반응이 호의적이란다. “그림을 그리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박물관 앞에 줄을 서 있는데, 한 주민이 와서는 그러지 말고 자기 출입증으로 같이 들어가자고 하더라고요.” ‘우리 동네를 그려 줘서 고맙다’고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또 하나 유리한 점. 분명 사람들은 사진에 비해 그림에 더 관대하다는 사실이다. 설상 누군가를 그리다 걸린다 해도, 막상 그림을 보여 주면 불쾌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최근 포르투에서도 이미영 작가는 아주 뽀송한 인연을 만났다. 골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와중에 할머니 한 분이 다가와서는 그림을 가리키며 무어라고 한참을 열 올려 설명하셨다고. “모르긴 몰라도 ‘저기가 우리 집인데 말이지~’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어요. 할머니 얼굴을 그려 드렸더니 어찌나 좋아하시던지(웃음).” 그 그림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글쎄 그걸 본 할머니의 손녀가 댓글을 달았다. 할머니의 이름은 리디아(Lidia), 이미영 작가를 만났을 때 그녀는 87번째 생일을 1주일 앞두고 있었다며. “할머니에게 분명 행복한 선물이 됐을 거예요. 다음에 올 땐 우리 집에 묵어요. 고맙습니다.” 그림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통한다. 


당연지사, 2019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어반 스케쳐 심포지엄에도 이미영 작가는 참가할 계획이다. 그전에 가깝게는 올해 네팔 여행을 간다. “그림 그리러 가세요?” “아뇨, 그냥 휴가로요. 그런데 아마도 그림이 그리고 싶어지겠죠.” 그리고 싶다는 건 그만큼 오래도록 바라보고 깊이 새기고 싶다는 의미다. 어슬렁 팬심으로만 봐도, 네팔은 적절한 선택인 듯하다. 

포르투에서

*이미영 작가는 ‘어슬렁’이라는 닉네임으로 그림을 그린다. 저작권 공유 NGO ‘크리에이티브 커먼즈(Creative Commons)’의 기획자로 일하던 중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겨 직접 창작자가 되어 봤다. <동유럽과 지중해>를 시작으로 <남미-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페루>, <어슬렁어슬렁 여행드로잉>, <훌쩍 떠남>까지, 그녀의 모든 책은 그 말이 과연 사실임을 끊임없이 보여 준다. 
인스타그램: traveldrawing
 

글 김예지 기자  인터뷰 사진 강화송 기자  그림 및 여행사진 제공 이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