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오붓하게 단양·영주·영월

2018-09-05     전용언

우연찮게도 이번 여정은 오래 전 어머니의 손을 잡고 떠났던 여행과 같은 길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섬섬옥수였던 손에는 시간의 흔적이 묻어 주름이 새겨졌고, 그 손이 움켜잡았던 고사리손 또한 울퉁불퉁해졌다는 것. 
머리가 큰 이후로 어머니와 단둘이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었으니 어색하진 않을까 살짝 긴장했건만, 완전한 기우였다. 이십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다시 찾아온 여행지에서 어머니는 소풍을 떠나온 소녀가 되어 작은 꽃 하나에도 기뻐하시곤 했다.

 

●단양팔경의 맏형 도담삼봉 

처음 당도한 곳은 단양의 자랑인 도담삼봉이었다. 단양군보다도 더 유명한 단양팔경, 그중 맏이인 도담삼봉은 정도전을 필두로 선비들의 짝사랑을 받았던 명승지다.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 사이로 6m 높이의 장군봉이 우뚝 솟아있었고 장군봉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첩봉과 우측 처봉이 점잖게 앉아있는 모양새였다. 비가 오래도록 찾아오지 않아 수심이 낮았던 덕을 봤을까, 평소라면 남한강을 비단옷처럼 두르고 있어야 할 도담삼봉의 속살 같은 부분까지도 볼 수 있었다. 물이 닿았던 부분에만 풀이 자라지 않아 마치 삼봉이 푸른색의 갓을 쓴 듯 한 모습이었다.

장군봉(가운데)을

어느 명소에나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있는데, 도담삼봉 이야기의 주인공은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다. 본래 강원도 정선군에 위치한 삼봉산이 홍수로 인해 떠내려 와 이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당시 정선군에서 삼봉에 대한 세금을 단양 백성들에게 요구했다. 이 부당한 과세에 정도전은 ‘삼봉을 정선에서 떠내려 오라 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반박했다는 것. 어린 정도전의 기지 덕분에 이후로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단양의 대표 명소로 자리를 잡게 됐다. 자칫 매정하게 보일수도 있지만 유년시절 도담삼봉을 자신의 벗이라 여겼던 정도전은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고 명명했을 정도로 이 곳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자신의

도담삼봉을 감상하며 그 일대를 한 바퀴 돌아본 뒤에 어머니는 “강산이 두 번도 더 변했을 세월 동안 사람은 어영부영 청춘을 다 써버렸건만 단양은 정작 바뀐 것이 없다”는 짧은 감상평을 던졌다. 많은 선비들이 도담삼봉을 사랑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흐르는 강물에 바위가 깎이고 흘러온 모래가 쌓이는 치열한 과정이 매순간 벌어지고 있음에도 도담삼봉의 외관만큼은 꼿꼿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옛 선비들은 그 강직함을 닮고 싶은 마음으로 도담삼봉을 향해 애정을 표했던 것은 아닐까.

도담삼봉이

●자연이 만들어낸 창 

단양팔경의 둘째인 석문은 도담삼봉과 그리 멀지 않았다. 다만 강의 상류 쪽으로 향해야 했기에 산을 오르는 수고를 감수해야만 했다. 연신 거친 숨을 내뱉으며 우거진 숲길을 10분쯤 걸었을까, 벼랑 끝에서 쏟아지는 빛이 석문에 다다랐음을 일러줬다. 석문의 태생은 까마득한 옛날 석회 동굴이 무너진 후 동굴천장의 석주(돌기둥)가 지금의 무지개 모양으로 남은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동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석문으로, 명승 45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단양 석문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지만 때로는 빛을 담으며 자연이 빚어낸 창문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도, 프레임 안에 남한강과 강 건너 마을의 모습을 그리며 한 폭의 수채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건너편

 

●고민할 필요 없이, 마늘정식 

단양이 반가웠던 건 도담삼봉과 석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석회암 지대와 약산성의 토양에서 자란 단양 육쪽마늘은 맛과 향이 독특하기로도 유명하다. 지역의 특산품인 만큼 마늘을 이용한 요리도 다양하다. 마침 일정 중 중식을 해결하는 곳은 충북 제6호 향토음식기능 보유자의 집이었다. 온갖 종류의 마늘 음식이 한상 가득 차려지는 ‘마늘정식’으로 육회와 수육부터 만두, 옥수수샐러드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채로운 음식들을 한 번에 맛볼 수 있으니 어떤 메뉴를 선택해야 할까 고심할 필요도 없다. 

마늘
마늘

●한국을 넘어 인류의 유산으로 

단양을 떠나 두번째로 향한 곳은 영주. 이곳의 자랑은 단연 부석사다. 부석사는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새롭게 등재되며 인류의 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676년 의상 대사가 창건한 이래 1,400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선 지금까지도 한국 불교의 명맥을 이어온 곳이다. 목조건축의 시초이기도 한 무량수전 외에도 국보 5점, 보물 6점, 도 유형문화재 2점 등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석양이

숲길을 지나 108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선 다음에야 부석사의 백미인 무량수전에 닿을 수 있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 창건과 함께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외세에 의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수차례 복구를 거쳤다. 그 과정에서 신라와 고려, 조선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살아간 민중들의 손때가 차곡차곡 쌓여있는 셈이다.

국보

때마침 노을이 질 때였다. 건물들은 산등성이 뒤로 차츰차츰 넘어가는 붉은 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민낯을 드러냈다. 부석사의 풍경은 곱게 나이든 어르신의 얼굴처럼 자연스러운 주름살이 패여있는 듯 했으니, 부석사라는 건물 자체에서 연륜이 풍겨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부석사

 

●연민이라는 힘 

영주와는 마구령을 경계로 맞닿아 있는 영월이 마지막 목적지였다. 조선시대 가장 비극적인 왕이라면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을 떠올리곤 한다. 단종은 왕위에서 쫓겨나 상왕이 되고, 사육신의 복위 시도가 끝끝내 실패로 돌아가며 노산군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지금의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17세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사망할 당시에도 마을 사람들은 세조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 시신조차 거두지 못해 강물에 유기되었다고 하니, 그의 삶은 비극으로 점철돼 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단종을 딱히 여긴 영월호장 엄흥도는 시신을 수습해 지금의 장릉에 암장했다고 한다. 단종의 능호인 장릉도 숙종 때인 1698년에 이르러서야 붙여지게 됐다.

매년 4월 말이면 장릉과 영월읍 일대에서는 단종문화제를 열어 단종국장을 재현하는 행사를 진행한다. 행사의 규모는 1,0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할 정도로 크다. 자칫 단명한 왕을 위한 의식으로 생각해 의문을 품었건만, 발걸음을 맞춰 걷던 어머니는 “단종국장의 방점은 왕이라는 권위가 아닌 한 인간에 대한 연민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일러주셨다. 영월읍의 사람들은 왕위를 빼앗긴 왕이 아니라,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한 인간을 기리고 있는 것. 그러니까 영월의 장릉은 연민으로 만들어진 공간인 셈이다. 

단종에

장릉에 다다르지 않았다면,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동행하지 않았다면 미처 깨닫지 못했을 사실이다. 어머니와 함께 손을 붙잡고 장릉을 거닐며 오래 전 우리와 같은 풍경을 바라봤을 17살의 단종을, 그가 품었을 억울함과 애석함을 짐작했다.

 

▶영월의 자연명소

신선암이라 불리는 선돌 
장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영월 선돌도 각광받는 명소다. 방절리 서강가에 위치한 선돌은 두 갈래로 우뚝 솟아있는 70m 높이의 두 절리를 일컫는다. 흐르는 강 사이로 자리한 층암절벽의 모습이 마치 신선같다 하여 신선암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서강에

한반도 지형 선암마을 
한 번만 봐도 강렬하게 남는 인상 때문인지 이미 국내여행지로 유명세를 탄 곳이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땅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풍경으로, 동고서저의 지형 또한 닮아있다. 그 유명세를 기반으로 본래 서면이었던 선암마을 일대의 행정구역 지명이 2009년에 한반도명으로 바뀌었다.

한반도의

기자가 체험한 우수여행상품
홍익여행사 [백두대간 협곡열차와 함께하는 3도여행]

 

글·사진=전용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