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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ie with┃Movie - 공항의 지루함을 견디는 방법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8.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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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 여행자에게 공항은 필요악과도 같은 공간이다. 공항은 목적지에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긴 하지만, 귀찮은 절차와 지루한 기다림이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다. 환전에 휴대폰 로밍, 탑승 수속, 보안 검색, 출국 심사로 이어지는 과정을 110미터 허들 경기의 주자가 된 기분으로 통과하고 나면 보딩 시간까지의 황량한 여유가 느닷없이 밀려온다. 스스로 흡연실에 유폐돼 기내에서 소진될 혈중 니코틴을 미리 꾸역꾸역 폐로 밀어 넣거나 딱히 살 물건도 없는데 면세점을 어슬렁거리며,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된 폐쇄 공간에서의 자유 시간을 ‘죽 때리고’ 있어야 한다. 긴 비행 여행을 마치고 나면 목적지 공항의 지루함이 아가리를 쩍 벌린 악어처럼 여행객을 맞는다. 콱 국적을 바꿔버릴까 싶을 정도로 한산한 내국인 줄과 달리 외국인 줄은 왜 늘 그다지도 길기만 한지. 수화물 찾는 곳에선 주인 손에 들린 공에 시선을 붙박은 고양이마냥 비슷비슷하게 생긴 여행 가방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숨바꼭질을 해야 한다.

나 역시 공항은 늘 소중한 여행 시간을 좀 먹는 시간 낭비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밴쿠버에 갔을 때는 하필 불법 체류 의심을 받은 한 동양인 여성의 뒤에 서는 바람에 꼬박 두 시간을 허비해야 했고, 뉴욕의 JFK 공항에선 입국 카드를 잘못 쓰는 바람에 ‘줄 맨 끝에 다시 서라’는 형벌을 두 번이나 받아야 했다. 모스크바 공항에선 느려 터진 전산망 때문에 하마터면 비행기를 놓칠 뻔 했다. 이러다 보니 비행기 안에서의 스무 시간은 참겠는데, 공항만큼은 생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짐을 챙길 때마다 그냥 도시에서 도시로 ‘휘리릭’ 순간 이동하는 초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할 정도다. 특히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 경유지 공항은, 따로 해병대 캠프 따위에 가지 않아도 될 정도의 무한대의 인내심이 필요한 공간이다. 여행 경비를 아끼기 위해 과감히 시간을 버릴 수 있다고 작심한 가난한 여행자들이라면, 어쩔 수 없이 이 지루함의 지존적 시공간을 견디는 지혜가 필요한데, 내 경우 경유 공항에 내리기 직전 최대의 피곤한 상태로 몸을 혹사시키는 방법을 택하곤 했다. 술을 마시든가, 잠을 아끼든가. 그러면 경유지 공항에서 까짓 외국인들 시선쯤 무시하고 과감히 노숙자 자세로 뻗어 버릴 수 있다. 좌우지간 공항이란 곳은, 그렇게 여행자를 참 초라하게 만들기도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터미널>(2004)의 무대, JFK 공항도 다르지 않다. 조국의 쿠데타 사태로 졸지에 무국적 사나이가 돼 입국을 거부당한 동유럽인 빅터 나보스키(톰 행크스)는 공항을 제 집 삼아 세상 밖으로 나갈 날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된다. 떠나고 도착하는 이들이 총총걸음으로 빠져나가고 마는 그곳이, 나보스키에겐 끝없는 기다림을 강요받아야 하는 감옥과도 같은 곳으로 돌변한 셈이다. 상상해 보시라. 당신이 공항에 갇힌 채 수 개월을 보내야 한다면? 어후~! 나 같으면 살짝 돌아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스필버그는 공항의 공간사회학적 단면을 극단적으로 확장한 상황 안에 주인공을 가둔 뒤, 그가 뿜어내는 어떤 에너지가 그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 간의 관계를 미세하게, 그러나 드라마틱하게 변화시키는 과정을 들여다본다. 그 에너지는 결국 나보스키가 내뿜는 인간애이며, 그와 똑 같은 감정을 가진 공항 종사자들의 측은지심이다. 지루함은, 내 곁에 사람이 있기에 견딜 만 하다.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은 언젠가 끝이 난다. 스필버그 가라사대, 공항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글을 쓴 최광희는 시니컬하면서도 유쾌하고, 진지하면서도 명랑한 영화 저널리스트. 영화주간지 <필름 2.0>의 온라인 편집장을 거치며 쌓아 온 내공이 여행을 만나 맛깔스런 하모니를 연출할 계획인다. 팀블로그 '3M흥UP'(mmmm.tistory.com)에는 그 못지않은 4인의 필진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영화와 세상을 노래한다. 보다 내밀하고 자극적인 최광희의 영화 칼럼을 원한다면 한번쯤 들러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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