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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그릴라② 시간과 자아의 행방불명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8.07.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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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자아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봤다면 리지앙에 대한 묘사는 훨씬 수월할 것이다. 아니, 보지 못했다고 해도 그곳은 넘치는 판타지가 물길을 따라 흐르고, 골목 구석구석에서 피어오른다. 이 때문일까. 리지앙에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멍 때리기’에 빠져든다. 그렇게 멍하게 골목을 헤매다 보면 시간과 ‘나’는 현기증 나는 미로 속에서 길을 잃는다.

글·사진   Travie writer 서동철

*Travie writer 서동철기자의‘윈난성’여행기가4회에 걸쳐연재됩니다. 서동철 기자는 지난 1년 동안  ‘하얼빈에서 온편지’,‘ 다롄에서 온 편지’ 등을 통해 중국을 장기 여행하며 챙긴 소중한 느낌들을 트래비 독자들과 함께 나눈바 있습니다.


1, 2, 4 리지앙 고성의 야경 속을 걷는 일은 몽환적이다 3 리지앙 고성의 고풍스럽고 우아한 풍경. 이미로에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기 어렵다 


두 번째 계단,  리지앙

바이족의 마을 따리를 떠나 다시 200m를 더한 해발 2,400m의 리지앙(麗江)으로 향했다. 버스는 얼하이 호수를 낀 평원을 가로지르다 이내 산자락을 비집고 들어가는 길을 따라 조금 더 높고 산 깊은 소수민족의 마을로 접어든다. 따리에서 리지앙까지는 버스로 3시간 정도, 어느 순간 흰색과 붉은색 계통의 전통복장이 파란색으로 바뀐다. 바로 나시족의 고장이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나시족은 약 1,400년 전부터 이곳 리지앙에 자리를 잡았으며, 가까운 티베트 장족의 한 혈통으로 알려져 있다. 리지앙 고성을 돌아다니다 보면 간판과 표지판, 벽 등에 마치 고대 동굴벽화처럼 보이는 상형문자가 한자와 함께 표기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1,0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나시족의 문자인 둥바문자다. 현재 지구상에서 사용되는 유일한 상형문자라는데 뜻을 모르는 현지인들도 많고 여전히 연구 중에 있다고 한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나시족은 최근까지도 모계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남녀가 한 가정을 꾸리고 남성이 가장의 역할을 담당하는 우리들의 전통적인 결혼 관념을 뒤집어엎는다. 나시족 남성은 여성의 집에서 밤을 보내고 낮에는 친정(?)으로 돌아가 권력의 중심인 어머니 밑에서 지낸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여성에게 귀속되고 남성은 생활비를 보태긴 하지만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미미하다. 고달픈 시집살이가 없는 것은 다행이지만 대리부(?)를 떠올리게 하는 나시족 남성은 현재 리지앙 고성에서도 전통복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들에 비해 어딘가 초라해 보인다.


1 해발 5,500m의 높이로 리지앙을 굽어보는 위롱설산을 헤이롱탄 공원에서 바라본 모습. 값비싼 케이블카를 타면 단숨에 해발 4,500m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고산병에 주의해야 한다 2 늦은 오후, 리지앙의 물길은 하늘의 빛깔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3 리지앙 고성의 상점에는 각종 수공예품을 비롯해서 다양한 액세서리를 판매한다

“치히로, 어디 있니?”

산을 배경으로 진회색 기와지붕이 거리를 뒤덮고 돌로 포장된 깔끔한 길과 그 길을 따라 졸졸 흐르는 물, 따리 고성과 리지앙 고성의 공통된 공식이다. 하지만 리지앙은 따리의 확연한 변주를 보여 준다. 반듯반듯하고 널찍한 길을 갖춘 따리에 비해 리지앙 고성은 구불구불하고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기와집 사이를 파고들어간다. 때문에 웬만큼 길눈이 밝지 않으면 즐겁고 유쾌한 ‘미로 탐험’이 시작되기 마련. 더군다나 어둠이 찾아오면 리지앙은 몽환적인 주홍빛을 밝히며 저마다의 판타지를 일깨운다. 

각종 액세서리와 수공예품을 파는 상점들과 다국적 먹거리로 입맛을 돋우는 식당들, 그리고 수많은 게스트하우스와 호텔들로 리지앙의 낮은 시끌벅적하다. 이 번잡스러움은 하늘을 반이나 가린 고풍스런 처마와 고성 뒤로 보이는 위롱설산의 감상을 방해할 만큼 상업적인 냄새를 풍긴다. 그러나 리지앙의 밤은 비일상적이고도 환상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적 모티브였다는 리지앙, 미야자키 하야오의 상상력은 리지앙 고성과 만나면서 날개를 활짝 편다. 

처마를 비추는 주홍빛 조명은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고성의 윤곽을 그리고, 반질반질한 돌길 위로 불빛은 흐릿하게 번진다. 빛이 미치지 못하는 골목 구석구석은 어둡고 음흉한 공간이 아니라 환상이 꿈틀거리는 장소다. 검은 고양이로 변신한 마법사가 지붕을 타넘고, 흰 가면을 쓴 유령이 벽에서 스며져 나와 다시 맞은 편 벽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진다. 막다른 골목 끝에선 저주를 받아 돼지로 변한 사람들이 웅성이고, 신령들은 목욕탕에 갈 채비가 한창이다.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 치히로는 신령들만이 머물 수 있는 공간에서 센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게 되고 어느덧 본래의 이름을 잊고 만다. 당신도 조심하시라. 시간은 위롱설산에서 흘러온 물에 녹아 휩쓸려 가고, 당신은 길뿐 아니라 ‘나’를 잃을지도 모르니까. 


4, 5 쑤허는 한 반나절 산책코스로 제격이다. 골목마다 사람 사는 냄새가 풍겨 나온다 6, 7 지금까지 몇 명이나 다녀갔
을까. 할머니가 건네준 방명록에는 세계 각국에서 방문한 여행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바이샤의 사업가 할머니

“할머니를 조심하세요!”

리지앙 고성 인근의 쑤허구전(束河古鎭)과 바이샤(白沙)의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그녀들의 귀엽고 당당한 횡포(?) 때문이다. 곱게 나시족 전통복장을 차려 입으시고 여행객들의 왕래가 많은 거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카메라를 들이대면 으레 돈을 요구하신다. 하지만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을 지금까지 지켜 주셨으니 그 정도 돈이야 입장료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사실 난 쑤허에 입장할 때 옆문으로 유유자적하게 걸어 들어가 꽤 비싼 입장료를 벌기도 했으니 모델료쯤은 흔쾌히 쥐어 드릴 수 있었다. 

리지앙 고성이 화려한 번화가라면 쑤허구전은 옛 도시와 농촌의 모습이 오묘하게 결합된 교외의 작은 마을이다. 돌길 옆으로는 리지앙보다 깨끗한 물이 흐르고, 우리네 인사동의 전통찻집 같은 카페에서 커피를 홀짝이다 보면 길 건너에선 까맣게 그을린 농부들의 곡괭이질이 한창이다. 리지앙보다 평화롭고 조용하고 넉넉하다 표현해도 어딘가 모자란, 그런 매력이 존재하는 곳. 이 때문에 중국의 젊은 여행자들은 리지앙 고성에서 숙소를 찾지 않고 이곳 쑤허에 짐을 푼다. 

쑤허에서 가까운 바이샤에서 만났던 야위에화라는 할머니의 상술(?)은 세계적이었다. 리지앙이나 쑤허처럼 돌길로 잘 포장된 길도 아닌 흙길이었고, 소똥 냄새가 진동하는 골목에서 이 할머니는 등 뒤에서 “헬로우?” 하고 말을 걸어 왔다. 그러시더니 다짜고짜 두꺼운 노트 한 권을 보여 주시는데 세계 각국의 언어로 할머니의 건강을 빌거나 놀라운 마케팅을 칭찬하는 글들이 적혀 있었다. 

할머니를 따라 어느 농가에 이르니 다듬어지진 않았지만 채소와 꽃이 풍성한 아담한 정원이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할머니가 종이컵에 내다주는 보이차와 땅콩, 해바라기씨로 장사를 하는 영업소였다. 할머니는 괜찮다는데도 유명 모델처럼 자꾸 포즈를 취해 주시며 촬영을 강요(?)했고, 나시족 전통복장을 꺼내 입으라며 당신이 사진을 찍어 준다고 성화셨다. 

난 손사래를 치며 궁금한 걸 물었다. 언제부터 이 일을 시작하셨냐고, 지금까지 몇 명이나 다녀갔냐고 말이다. 할머니는 셀 수도 없다며 한쪽에서 2권의 방명록을 더 보여 주신다. 첫 번째 글이 2003년으로 기록돼 있으니 5년째 성업 중인 셈이다. 노트의 두께로 봐서 못해도 1,000명은 넘어 보였고, 대부분 1인당 20위안을 냈으니 곱하면 2만위안! 다롄에서 내가 빌려 살던 널찍한 아파트의 월세가 1,500위안이었으니, 이 정도면 성공한 개인사업자가 아닐까.

mini interview

리지앙 고성의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던 후이민(혜민)이다. 주방을 전담하고 있었는데 김치찌개, 된장찌개, 계란말이, 미역국, 라면 등이 어찌나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올해 19살인 혜민이는 윈난의 남쪽 시솽반나 인근에서 나고 자란 하니족이다. 시솽반나면 보이차의 산지이고 따라서 그녀는 지금 내가 오르고 있는 험난한 차마고도를 따라 보이차를 싣고 샹그릴라를 거쳐 티베트와 네팔 등지로 넘어갔던 종족의 후예인 셈이다.

어느 날 나는 그녀에게 꿈이 무어냐고 물었고, 혜민이는 남을 돕고 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럼 돈 많이 벌어야겠네?” 내가 또 장난스럽게 물었더니 “돈이 많아야 남을 도울 수 있나요?”라고 반문했다. 내가 던진 ‘우문’을 기세 좋게 받아치는 그녀가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그 다음날부터 난 혜민이가 아침에 카페를 열 때마다 식탁과 의자를 날라 주고, 음식 서빙도 도와주었다. 남을 돕는 데는 약간의 시간과 성의만 있으면 되는 것이라고 그녀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가. 

한국 여행객들이 적은 때라 게스트하우스의 스탭들과 함께 종종 식사를 했는데 번번이 혜민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한국 사람들끼리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탓에 소외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아무리 같이 밥 먹자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리지앙을 떠나면서 난 그녀에게 다음에 만날 땐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자 했고, 그녀는 웃으며 그러자고 약속했다. 언제쯤 또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그땐 “잘 지냈어?” 하고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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