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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재비 김덕수-한국적 신명으로 영혼을 뺏는 대한민국 여행전도사

  • Editor. 트래비
  • 입력 2008.11.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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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재비 김덕수
한국적 신명으로 영혼을 뺏는 대한민국 여행전도사

전통에 대한 무지함은 종종 여행자를 부끄럽게 만든다. 재즈의 고장 뉴올리언스와 모차르트의 도시 비엔나는 잘 알지만 정작 우리 연희 앞에선 말문이 막히는 사람들. ‘김덕수 사물놀이패’로 잘 알려진 장구재비 김덕수는 일찍이 세계에 우리 가락을 알려온 대한민국 여행전도사다. 그는 지난 데뷔 50주년 공연은 물론 자서전의 제목 또한 ‘길’이라 칭할 만큼 뼛속 깊이 유랑의 정서가 깃든 예인이다. 모두가 새마을 운동에 휩싸여 하루 끼니에 급급하던 시절에도 우리 것을 알리기 위해 길 위로 나섰던 사람. 그의 인생은 소설보다 극적이고 방대한 한 편의 여행소설이다.

  박나리 기자    사진  Travie photographer  엄지민   취재협조 한국관광공사


시대의 변화를 목도한 예인

김덕수를 이해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그 시대에 대한 이해’다. 1952년, 해방 뒤의 어수선한 정세 속에 태어난 소년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장터로 흘러들었다. “장터는 그 자체로 축제야. 항상 춤과 노래가 있으니까. 그중에서도 난장은 우리 같은 예인들에게 최적의 장소였지. 씨름대회, 소싸움, 야바위, 닭싸움, 그것들에 먹거리와 볼거리가 더해지는. 나는 거기서 데뷔를 한 거죠.” 그처럼 대전 태생 김덕수는 일찌감치 다섯 살 때 조치원 난장에 데뷔하며 예인의 길에 들어선다. 

김덕수는 1950년대 중반 한국 사회를 보내며 시대의 변화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남사당 생활을 하며 그 시절에 있던 모든 종류의 일을 목격한 셈”이다. 국내에는 드디어 밀가루 공장이 생겨 식품 문화가 본격화되고, 나일론과 섬유 공장이 들어서면서 생필품에 대한 자급자족이 이루어졌다. ‘국산품 이용 선전반’은 그 무렵 형성된 국가 단체였다.
“국산품을 이용하자. 그래야 산업이 발전한다는 시절이었지.” 그 무렵 이미 천재 소리를 듣던 소년 김덕수는 지금의 전통국립예술학교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기에 이른다. 본격적인 외국 공연의 활로가 열린 셈이다.



"나보고는 군대 가지 말고 총 대신 장구 들고 나가 국위선양하라고 했으니까. 나는 그렇게 길 위에서 살았고 그렇게 나이 먹은 것 같아.”


전통에 대한 고민과 대안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65년 입학한 해부터 해외를 나가 그때부터 1년에 절반은 외국 생활을 했으니. 제일 처음에 갔던 게 일본, 전국투어를 했죠. 국악과 대중가요 쪽에서 많은 분들과 함께 갔어요. 그러던 게 68년 멕시코 올림픽 때부터 그야말로 국가에서 우리를 파견하기 시작한 거야. 

장인정신을 필요로 하는 일들에는 일종의 정체성에 대한 내면의 물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성장하는 과정 속에 전통을 강요하는 주변 상황들로부터 저항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지. 그의 대답은 의외로 짧고 간단했다. “그땐 그런 걸 고민할 시간이 없었어. 근데 나이를 먹으면서, 언제더라. 스물일곱 살쯤 됐을 땐가.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주변 어른들이 다 없는 거라. 그때부터 과연 프로예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느냐 하는 물음이 시작됐지.”  

그의 고민은 한동안 계속됐다. 새마을 사업이 가속화되면서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많은 문화들이 사라졌으니 오죽이나 답답했을까. 먹을 것도 없는데 잔치고 놀이고 무슨 소용이냐는 의식이 팽배했고, 초가집은 연기 속에 사라졌다. 전문 예인들은 미래를 고민해야만 하는 문제에 봉착했고, 당시 1,000회가 넘는 공연을 지속하던 김덕수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 내가 고민 끝에 개념을 정리한 게 바로 ‘리듬’이에요. 어느 집단 어느 민족이든 가장 중요한 건 리듬이거든. 그건 기본적으로 에너지라는 거지. 신명, 그게 본질이죠. 어느 나라를 가든 사람들을 미치게 하고 우리에게 동화되게 만드는 것. 나는 이게 틀림없다 생각했어요. 가장 정신적인 본분을 지키면서 세대와 함께 변화하는 게 바로 전통문화지. 그래서 내가 만든 게 사물놀이에요. 우리 전통을 세분화시켜 레퍼토리화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김덕수는 전통에 대한 대안으로 ‘사물놀이’를 정착시켰다. 네 명의 집단이 시각적인 것보다는 청각적인 것으로, 타악기라는 개념에 무지한 국민들에게 또 하나의 인식을 심어 준 셈이다.  

이미 40년 전부터 세계를 무대로 살다

그는 60년대 말부터 이미 전통 공연을 바탕으로 ‘월드 투어’를 해왔다. 해외자유여행이 시작된 게 1992년도니, 그보다 몇 십 년 전 장구 하나로 무수한 국경을 넘던 김덕수는 태초의 바람 같은 여행가였다.

“60년대 말부터 공연을 가지고 월드 투어를 했지. 그러다 1970년 오사카 엑스포때부터 드디어 한국이 상품을 만들기 시작한 거야. 엑스포, 박람회, 한국 상품 전시회…. 우리는 선진국은 못 가고, 제3세계, 아프리카, 중남미 같은 못사는 나라를 늘 보따리 싸서 다녔어. 내가 그걸 한 10년 정도 했던 것 같아요. 참 재미있었지. 그땐 지금처럼 영어 되고 진취적인 젊은이들이 많이 없었어요. 외국에선 또 어떻고. 몽골하고 티벳은 알아도 코리아는 잘 몰랐어.”

그렇게 김덕수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 전통을 재창조했다. 그에게 사물놀이는 세계인이 함께 공유하고 박수쳐 줄 때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때문에 보급화를 위해 저작권에 가입조차 하지 않았으며, 본인의 세대에서 해줄 수 있는 최대치를 위해 누구보다 한 발 앞서 치열하게 달려오고 있다. “전통 음악을 배운 외국인은 우리보다 한국을 더 사랑해요. 그걸 배우면 한국말도 하기 시작하지. 우리 리듬을 배우면 정말 말을 금방 해. 억양이 같거든. 그런 것들이 우리 다음 세대에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참 예인의 길은 힘든 거야. 시대에 따라 변하고 앞으로도 그런 것들에 갈등과 혼란이 와도 비전까지 함께 제시해 줘야 하니까. 전통문화란 게 그래요.”

아름다운 소리를 찾아가는 여행

“난 한평생 길 위에 모든 걸 다 남기고 다녔죠. 지금 보면 모든 게 꿈만 같고 사실은 언제 50년이 지났지 싶지만, 죽을 때까지 이걸 할 거야. 좋잖아. 지구촌이 다 내 집인데. 공연예술 하는 사람들은 그래요. 국경과 인종과 모든 문화를 초월해가는 거.”

김덕수는 이데올로기가 심했을 때도 경제인들보다 먼저 문화 사절단이 되어 해외를 나갔다. 공산권도 베이징도 평양도, 모두 장구 하나만 몸에 지닌 채 국경을 넘었다. 물론 예인의 세계에 따르는 끔찍한 유혹들도 많았다. 그저 남들처럼 편하게 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들은 때때로 그를 위협하곤 했다. 하지만, 예인만이 지닌 위대한 힘을 위해 그는 오로지 한 길을 고집할 수 있었다. 

“신이 되는 거. 매번 수천 번의 공연에서 그 사람에게 가장 한국적인 신명으로 영혼을 뺏는 일을 우리가 하는 거예요. 왜? 그들이 미치니까. 내가 웃으면 웃고 내가 울면 그들도 같이 울고. 모든 예인은 그 매력을 외면하지 못하는 거고. 그래서 내 소원이 평생 사물놀이 김덕수, 장구재비 김덕수로 죽는 거지.”  

그처럼 우리의 아름다운 소리를 찾아 떠날 수 있는 곳엔 어디가 있을까. 김덕수는 질문에 한참을 고민한다. 소리는 아무래도 울림이 좋은 곳, 울림에 최적인 공간들이 있단다. 그는 국내 장터가 너무 도식화된 소리를 내서 안타깝다고 말하며, “옛날 같은 사운드는 이제 없어요. 엿장수 가락과 품바만 있지. 거기 가야만 들을 수 있는 그런 소리. 나는 그 측면에서는 ‘하회 집터’를 꼽아요. 집 안이 ‘ㅁ’자로 되어 있는데, 거기서 연주했을 때 소리가 기가 막히더라고. 공기의 밀도가 하나도 안 도망가는 거야. 사찰도 참 좋고. 자연의 울림이 우리 음악이랑 제일 잘 맞는 것 같아. 여행도 그렇고.”


김덕수의 전통연희상설공연 <판>

<판>은 국내 최초의 전통연희상설극장 광화문아트홀의 첫 번째 상설공연작품. 사물놀이의 창시자 김덕수 예술감독의 연희프로젝트로 더욱 이목을 사로잡는다. 난장은 우리 민족 전래의 우리 고유의 축제공간으로 누구에게나 열린 장소를 제공한다. 갇혀 있는 모든 것을 열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난장의 정신이다. 길놀이, 일고화락, 삼도농악가락, 긴 아리랑, 토끼이야기, 판굿, 뒷풀이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남녀노소, 연령을 불문하고 모두가 신명나는 가락에 취할 수 있다. 

일시  2009년 2월22일까지. 평일 오후 8시, 주말 공휴일 오후 4시(월요일 공연 없음) 
장소  광화문아트홀 
문의  02-722-3416 www.ghmartha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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