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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PASSPORT-희망의 증거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3.0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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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상 기자

지난 미국 디트로이트 출장길에서였다. 편도 약 13시간. 경유가 아닌 직항으로 그렇게 오래 비행기에 갇힌 적은 처음이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도, 영화를 봐도 남은 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과연 도착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긴 여정. 출발 전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들고 갔던 책을 한 권 꺼냈다. 내용도 모르고 가져갔었지만 지루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단숨에 책 속으로 빠져 들었다. 내용은 멕시코 최초의 한인 이주사를 다룬 책이었다.
1905년 4월4일. 1,033명의 한인을 태운 배가 인천 제물포를 떠나 멕시코로 향했다. 시대적 배경은 화물 운송량 증가로 선박용 밧줄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던 때였다. 멕시코 이민 1세대들은 로프의 원료로 쓰이는 에네켄(선인장의 일종) 농장에서 일을 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정든 고향을 떠나려는
이들의 사정은 각기 달랐다.
자기 땅 한 뙈기 없는 소작인, 걸인, 부랑아, 떠돌이 군인, 종교의 자유를 찾는 기독교인,
무당, 양반, 전직관리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현실에 없는 새로운 희망을 찾아
이역만리 먼 길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떠날 때 소지했던 빙표(여권)에는 행선지도 여권 번호도 없었다. 도장과 압인도 몇 개가 없었다. 앞서 1902년부터 시작됐던 하와이 이민자의 빙표에 목적지가 하와이라고 명시된 것과 달랐다. 이민 브로커에게 속아서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앞에 놓인 운명을 모르는 이민자들이 탄 배는 화물선이었다.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창고를 객실 삼아 이동하다 보니 식사나 샤워는커녕 용변도 보기 어려웠다. 이동 중 3명이 죽음에 이를 정도로 험한 여정이었다. 출발한 지 40일 만인 1905년 5월15일, 드디어 멕시코 남단의 살리나크루스 항에 도착한 한인들은 다시 기차로 사흘을 더 이동한 뒤 메리다라는 도시에서 22개의 에네켄 농장으로 분산됐다.
4년간의 계약 기간 동안 이들은 말 그대로 마소처럼 부려졌다. 하소연할 곳도 없었던 멕시코 한인들은 돼지우리와 같은 곳에서 기거하며 새벽부터 하루에 12시간씩 일해야 했다. 에네켄에는 가시가 있어서 손발이 피투성이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는데 하루 1,000장 이상의 에네켄 잎을 따야 했다. 선인장만 있는 사막 같은 곳에서 채찍질을 당하며 노동에 시달리던 한인들은 도망칠 수도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금의환향하겠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오로지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버틴 이민자들. 그러나 노동 계약이 끝난 이후에도 돌아갈 수 없었다. 경제적 자립을 이루지 못할 만큼 착취를 당한 데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너무 흠뻑 빠져서인지 비행기에 있는 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100년 전, 내가 만약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무엇보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게 가장 서럽지 않았을까.

떠나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다.
여행은 돌아올 수 있기에 여행인 것이다.
디트로이트로 가는 하늘에서 책을 덮고 만져 본 여권은 단순한 여행의 필수품 정도가 아니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여행이라는 증거이자,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희망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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