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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ypt 이집트 무겁고도 긴 여운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3.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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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문명과 마주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3,000년간 지속됐던 5,000년 전의 고대문명 앞에서
 여행자의 모든 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숱한 고대 이집트 유적 중 하이라이트
몇 곳만을 만나는 데도 빠듯했다.
아쉬움만큼 이집트 여행의 여운은
길게 드리워졌다.
고대 이집트 문명을 낳은
6,671km의 나일 강만큼이나 긴….
 


1 기자 지구 3대 피라미드 앞에 피라미드 파수꾼처럼 앉아 있는 스핑크스

Cairo카이로

아잔은 투탕카멘을 향했다

카이로 이집트박물관Egyptian Museum에서 투탕카멘Tutankhamen을 만나고 막 돌아왔던 참이었다. 아잔Azan이 물결처럼 퍼졌다. 하루 다섯 번 이슬람교도에게 기도시간을 알리는 성스러운 울림. 흐느끼듯 애잔한 그 울림은 알라신에 대한 순종을 다짐하며 하늘로 스미는 듯했다. 알라신보다 한참 앞서 이 땅의 신이자 왕이었던 투탕카멘. 그날의 아잔은 마치 투탕카멘을 향한 것처럼 느껴졌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3,200년에서 기원전 332년까지 3,000년 가까이 나일 강을 젖줄로 지속됐다. 3,000년의 고대 이집트 역사는 현대의 편의대로 30개 왕조로 나뉘었고 각 왕조를 다스렸던 수많은 파라오들과 신들의 이야기가 하나둘씩 베일을 벗었다. 마지막 30대 왕조는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더 대왕의 점령으로 소멸했다. 소멸한 문명을 다시 연 것은 역설적이게도 점령자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프톨레마이오스였다. 그는 기원전 305년, 이집트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하면서 파라오가 됐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원전 30년 로마 공화정에 자리를 내줄 때까지 300년간 이집트를 다스렸다. 왕조 시대에는 여러 신을 섬겼지만 그레코로만 시대가 되면서 그리스도교 유일신 신앙으로 바뀌었다. 이후 현재의 이슬람교로 다시 바뀌었는데 초창기 그리스도교인 콥트교Copts는 지금도 이슬람 국가 이집트에서 그들 나름의 종교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의 이집트와 고대 이집트 문명 간에는 종교와 언어, 문자 등에서 마디마디 단절이 선명하다. 5,000년의 굽이굽이, 마디마디를 돌고 넘었고, 30왕조에 걸쳐 185명의 파라오와 그들이 섬겼던 더 많은 신들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니 짧은 여행으로 감당하기에는 여간 버거운 게 아니다.



2 7세기 무렵 이슬람 제국의 점령으로 이집트는 이슬람 국가가 됐다 3 고대 이집트인들은 독특한 형태로 신과 파라오를 표현했다


어린 파라오의 부활

투탕카멘은 18왕조의 파라오였다. 9살(BC1361년)에 파라오로 즉위해 18살(BC1352년)로 현세의 생을 마쳤다. 어린 왕의 짧은 재위…. 여전히 의문에 싸인 소년 파라오의 죽음에 더해 3,200년간 까맣게 잊혔다가 깜짝쇼처럼 재등장했다는 극적인 요소는 투탕카멘을 고대 이집트의 스타 파라오로 부활시켰다.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룩소르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에서 그의 암굴무덤을 발굴했는데, 온전한 상태였다. 파라오 무덤 중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됐다. 그의 유물은 무려 3,500여 점에 달한다. 파라오의 무덤은 즉위와 동시에 만들기 때문에 만약 투탕카멘이 더 오래 통치했다면 유물이 더 많았을 것이라던 현지 가이드의 탄식은, 굳이 맞장구칠 필요조차 없이 당연했다. 더 큰 탄식은 다른 파라오들의 도굴당한 유물로 향해야겠지만….

투탕카멘의 유물은 카이로 이집트박물관 2층 특별전시실에 있다. 투탕카멘의 진짜 유물을, 그것도 3,300년 전 그가 다스렸던 땅에서 만나는 감동은 클 수밖에 없다. 부활과 영생을 믿었던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음 뒤에도 육신을 보전하면 사람의 혼 ‘카’와 정령 ‘바’가 돌아와 부활한다고 믿었다. 죽은 투탕카멘을 미라로 만들고 영생에 필요한 갖가지 물건을 미라와 함께 무덤에 부장했다. 카와 바가 알아볼 수 있도록 미라에 황금마스크를 씌웠고, 미라를 본뜬 크기가 다른 3개의 관은 미라를 겹겹이 안았다. 금박을 입힌 관실 역시 겹으로 관을 보호했다.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의 원류가 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의 장기가 담겨 있다는 카노푸스 단지Canopic Jar 앞에서는 열어 보고 싶은 호기심이 솟구쳤다. 황금의자에는 왕과 왕비의 다정한 모습이 천연색으로 채색돼 있었는데 마치 어제그제 칠한 듯 화려한 색감이 살아 움직였다. 투탕카멘의 시중을 들도록 함께 묻힌 샵티Shabti는 차라리 앙증맞았다. 사람 모양을 하고 있는 샵티는 죽은 파라오가 부활해서 부릴 몸종이다. 1년 365일에 맞춘 365개의 샵티와 샵티 10개당 감독 샵티 1개씩 배치했다는 대목에서는 부활과 영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스쳤다. 한참 뒤 다른 문화권에서 행해졌던 순장이나 사티Sati 관습과 비교하면 한참을 앞선 인본주의적 사고였다. 투탕카멘의 황금목걸이와 지팡이, 칼, 우산, 장신구, 전차, 침대, 물병 등도 신비롭고 감탄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무덤이라기보다 내세의 생활공간으로 꾸민 게 분명해 보였다.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와 한참을 대면했다. 3,300년 시간의 간극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1 동물 머리에 사람의 몸으로 표현된 신이 파라오의 미라에 다가온 모습을 표현한 조각품 2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를 본뜬 기념품은 이집트 여행의 인기 아이템 3 삼각뿔 모양의 알 쿠른 산. ‘왕들의 계곡’은 물론 귀족 등의 암굴무덤이 산재해 있다

이집트 박물관 이집트 5,000년 유물과 만나다

이집트박물관Egyptian Museum은 고대 이집트 왕조부터 그레코로만 시대에 이르는 유물 12만점을 소장하고 있다. 그중 일부를 전시하고 있다는데 그 수와 종류가 어마어마하다. 너무 많아서인지 유물의 가치에 비해 소홀히 다뤄지고 있다는 안타까움마저 들었다. 우리의 가이드는 람세스Ramesses 2세 석상, 아멘호테프Amenhotep 3세와 왕비의 좌상, 멘카우라 왕King Menkaura 상 등 핵심 유물 위주로 안내했다. 5,100여 년 전 고대 이집트 1왕조의 나르메르 왕이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 내용을 부조한 나르메르 팔레트Narmer Palette에서도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는데 마치 신화처럼 들렸다. 고대 이집트의 신성문자 히에로글리프Hieroglyph 해독의 열쇠가 된 로제타스톤Rosetta Stone도 비록 복제품이었지만 흥미로웠다. 로제타스톤은 나폴레옹이 1798년 이집트를 침공했을 때 발견했는데 현재는 대영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침략자며 유물 약탈자였지만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 샹폴리옹Champollion이 신성문자를 해독하는 데 실마리를 던졌다는 공은 인정해야 할지 고민이다. 선사시대에 있던 고대 이집트를 비로소 역사시대로 편입시킨 열쇠가 바로 로제타스톤이다. 히에로글리프를 해독하지 못했더라면 피라미드 벽에 새겨진 ‘피라미드 텍스트Pyramid texts’도, 파라오의 무덤에 새겨진 ‘코핀 텍스트Coffin texts’도 우리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었을 것이다.
미라전시실에는 왕들의 계곡에서 옮겨 온 아멘호테프 1세, 투트모세Thutmose 3세, 세티Seti 1세, 람세스 2세, 람세스 3세 등의 미라가 누워 있다. 유물보호를 위해 사진촬영을 금지한 박물관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것으로 유물에 대한 예의를 지켰다.

섭정 끝에 파라오가 된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 단애절벽을 병풍 삼아 도도하게 들어서 있다

 
Luxor 룩소르

나일강은 삶과 죽음을 가르니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18~20왕조, BC1550~BC1069년)의 천년 수도였던 테베Thebes는 현재의 룩소르Luxor다. 룩소르는 이슬람 시대의 지명이다. 해가 지는 테베의 서쪽은 죽은 자들의 도시 네크로폴리스Necropolis, 해가 뜨는 동쪽은 산자들의 도시 아크로폴리스Acropolis로 불렸다. 나일강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 일출과 일몰, 삶과 죽음이 마주했다. 아크로폴리스에는 신전이 밀집해 있고, 반대편 네크로폴리스에는 바위산을 파서 만든 암굴무덤과 장제전Monutary Temple이 들어섰다. 장제전은 죽은 파라오의 집이자 제례를 위한 장소다.

네크로폴리스 파라오의 안식처 ‘왕들의 계곡’

투탕카멘의 암굴무덤은 테베의 네크로폴리스 왕들의 계곡에 안겨 있다. 이곳에 가장 먼저 암굴무덤을 만든 18왕조의 투트모세 1세부터 마지막 20왕조의 람세스 11세까지 신왕국 시대 파라오가 잠들어 있다. 60여 기의 무덤 중 20여 기가 파라오의 무덤이라고 한다. 일반에 공개하고 있는 무덤은 10기 정도다. 도굴꾼을 피해 이곳 바위산과 벼랑 곳곳에 암굴무덤을 만들었지만 그 목적에 부합한 것은 투탕카멘의 무덤 하나뿐이다.

피라미드를 닮은 삼각뿔 모양의 황토색 바위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왕들의 계곡을 품은 알 쿠른Al-Qurn이다. 삼각뿔 산이 정면으로 올려다 보이는 지점에 다다르자 차량과 카메라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투탕카멘은 이미 이집트박물관에서 만난 터라 다른 파라오 무덤에 집중하기로 했다. 람세스 2세의 아버지 세티 1세의 왕묘는 가장 크고 화려하다는 유명세를 치를 만했다. 일직선으로 무덤을 따라 내려가면 신들과 만나는 파라오와 신화 속 이야기가 벽화와 히에로글리프로 그려져 있는데 색감이 여전했다. 석관이 안치돼 있는 안쪽 널방에서 고개를 바투 들어 천장을 올려보니 우주가 펼쳐졌다. 동물로 별자리를 표시한 천체도였다. 손상되지 않은 ‘사자의 서’ 벽화로 유명한 아멘호테프 2세 묘 등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 ‘사자의 서’는 죽은 자가 내세로 갈 수 있는지 오시리스Osiris 신이 재판하는 광경을 담은 것으로 유명하다. 거기에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종교관이 담겨 있다.

장제전은 죽은 파라오를 위한 집으로 각종 제례와 의식의 장소로 활용됐다. 장제전에는 파라오의 석상과 부조, 업적을 기록한 돋을새김 벽화가 가득하다. 룩소르 서안의 네크로폴리스에는 36개의 장제전이 있는데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은 하트셉수트Hatshepsut 여왕의 장제전이다. 섭정 뒤에 스스로 고대 이집트 최초의 여성 파라오로 즉위하고 남자 파라오처럼 턱수염을 붙였다는 하트셉수트. 계단식으로 상승과 전진을 거듭해 쌓아 올린 3층의 장제전은 사막의 단애절벽을 병풍 삼아 도도했다. ‘핫 치킨 수프’를 빠르게 연달아 발음하다 보면 그녀의 이름이 된다던 가이드의 우스갯소리가 아니더라도 잊히지 않을 정도다. 람세스 3세 장제전도 제법 인기다. 정면 입구에서 바라보면 일직선으로 도열한 탑문Pylon 입구가 차례대로 작아지며 첫 번째 탑문 테두리 속에 들어와 장관을 이룬다. 엉뚱한 곳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모양새가 어리석어 보였던지 람세스 3세 장제전의 한 신전지기는 손수 이곳저곳 촬영 포인트를 안내하는 친절을 베풀었다. 신전 기둥과 벽의 돋을새김이라고 해서 가치가 똑같은 것은 아니었나 보다. 귀결은 친절에 대한 노골적인 대가 요구였지만, 1~2달러 정도의 값어치는 충분히 했다. 장제전 순례는 멤논거상Colossi of Memnon 2채만 남아 있는 아멘호테프 3세의 장제전에서 끝을 맺었다.


1 아멘호테프 3세의 장제전에는 멤논거상 2채만 남아 있다 2 해가 지는 나일강의 서안은 죽은 자들의 땅 네크로폴리스로 불렸다 3 람세스3세 장제전. 거대한 파라오 석상 앞은 기념촬영을 하려는 관광객들로 항상 붐빈다

아크로폴리스 134개의 돌기둥 숲에 압도되다

네크로폴리스의 반대편 아크로폴리스는 신전의 땅이다. 고대 이집트어로 ‘고르고 고른 땅(이페트 수트Ipet-sut)’에 카르나크 대신전Great Karnak Temple이 들어서 있다. 남아 있는 신전 중 가장 크고 오래됐다. 신왕국의 최고신 아멘Amen을 모신 신전이다. 신이 파라오와 만나는 공간이었던 만큼 신전에는 파라오와 신관만 들어갈 수 있었고 그 외는 축제 때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약 4,000년 전 중왕국 12왕조 때 처음 건설된 뒤 아멘호테프 3세, 람세스 2세 등 후대 파라오를 거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이르기까지 증축과 파괴와 개축이 반복됐다. 동서 540m, 남북 600m의 거대한 규모에 구조 또한 복잡해진 연유다. 람세스 2세 재위기간에 절정기를 맞기도 했지만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카르나크 신전도 모래 속에 잊혀졌다. 모래 속 카르나크 신전을 발굴하기 시작한 것은 1895년에 이르러서였다. 복원은 여전히 미완이지만 지금의 위용도 대단하다. 탑문만 해도 10개에 이르고 2개의 안마당과 3개의 오벨리스크Obelisk, 역대 파라오들의 소신전, 다주실Hipostila Room 등이 들어서 있다. 

압권은 단연 두 번째 탑문 안의 다주실이다. 고대 이집트 유적 중 과소평가된 것을 꼽으라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이 다주실을 꼽을 것이다. 좌우에 각각 67개씩 총 134개의 대형 돌기둥이 좌우종횡대각 규칙적인 배치로 거대한 숲을 이뤘다. 장관이라는 표현은 너무 가볍다. 기둥의 거대함에 압도되고 기둥 부조의 정교함에 감탄한다. 나일강변 습지에서 자라는 파피루스Papyrus를 형상화한 높이 21m, 직경 3.6m의 돌기둥 숲이다. 혼자서 깊숙이 들어가기가 머뭇거려질 정도로 숲은 우거졌다. 기둥에는 파라오 왕명표, 람세스 2세의 전투모습,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모습 등 역사적 가치가 높은 돋을새김이 또렷하다. 고대 이집트인의 건축술과 미술적 감각이 어떠했는지 꼿꼿이 서서 웅변하는 듯했다. 기자Giza 피라미드나 스핑크스Sphinx와도 으뜸버금을 다툴 만하다고 자꾸 혼잣말을 해댔다.


1 카르나크 대신전의 다주실. 134개의 거대한 돌기둥이 뿜어내는 위용이 인간을 압도한다 2 카르나크 대신전의 둘째 탑문 앞을 지키고 있는 람세스 2세 석상 3 카르나크 대신전에는 투트모세 1세가 세운 오벨리스크와 하트셉수트 여왕이 세운 오벨리스크가 있다

룩소르 신전 짝 잃은 오벨리스크

룩소르 신전은 카르나크 신전에 딸린 부속신전이다. 원래 두 신전은 사자의 몸에 사람 머리를 한 인두 스핑크스가 도열한 2km에 이르는 참배길로 연결돼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14세기 아멘호테프 3세가 카르나크 대신전의 주신인 아멘, 그의 아내 무트Mut, 아들 콘스Khons를 위해 건설했다. 매년 나일강이 범람하기 시작할 무렵 오페트 축제Opet Festival라는 수확축제가 열렸는데 이때 카르나크 신전의 아멘, 무트, 콘스의 신상을 룩소르 신전으로 옮겨와 모셨다. 이 축제의식은 룩소르 신전의 기둥에 새겨져 있다. 지금도 룩소르에서는 오페트 축제가 열린다. 룩소르 신전 역시 하트셉수트, 투탕카멘, 람세스 2세 등 많은 파라오들이 증축해 규모가 작지 않다. 람세스 석상을 비롯해 파피루스와 로터스Lotus를 형상화한 돌기둥, 투탕카멘 입상,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성소 등 구경거리와 이야기가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스토리는 짝을 잃어버린 외로운 오벨리스크다. 람세스 2세가 만든 첫 번째 탑문은 나폴레옹이 프랑스 혁명 직후 파리에 세운 개선문의 본보기가 되기도 했는데, 원래 탑문 좌우에 람세스 2세가 만든 오벨리스크 2개가 서 있었다. 그러나 1831년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가 프랑스의 루이 필립 왕에게 선물로 줘 버려 지금은 왼쪽 하나만 외롭게 서 있다. 다른 한쪽은 프랑스 콩코드 광장에 서 있다. 고대 유물 오벨리스크를 넙죽 선물로 주고 무함마드 알리가 답례로 받은 것은 달랑 시계탑이었다며 룩소르 가이드가 코웃음 쳤다. 외부로 뽑혀 나간 오벨리스크가 그것뿐인가! 워싱턴이며 런던이며…. 그곳은 오벨리스크의 자리가 아니다.

피라미드 & 스핑크스 태양신과 파라오를 향한 숭배

오벨리스크는 태양신 숭배의 상징으로 만들어졌다. 높이가 20~30m에 이르는 게 보통인데 단 하나의 돌덩이로 그런 거대한 ‘바늘’을 만들어냈다는 경이로움은 물론 고대 이집트인들이 어떻게 돌을 자르고 깎고 또 운반했는지 그 비밀을 푸는 힌트도 담고 있다. 나일강 상류 아스완Aswan의 채석장에는 만들다 버려진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누워 있다. 오벨리스크 모양으로 잘라내는 과정에서 금이 가 그대로 방치된 것이다. 길이는 무려 41.7m.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르고 싶은 선을 따라 바위에 나무쐐기를 박고 나일강이 범람해 그 바위를 삼키기를 기다렸다. 물 먹은 나무쐐기의 팽창력으로 바위는 원하는 모습대로 잘라졌다. 그렇게 자른 바위는 홍수로 물이 육지 깊숙이 채석장까지 밀려왔을 때를 이용해 배로 실어 날랐다. 석재를 실은 배는 강물의 흐름을 따라 북으로, 북으로 내려가면서 나일강 유역 고대 도시의 신전과 피라미드를 짓는 데 석재를 공급했을 것이다. 나일강의 범람은 1년에 한 번뿐이었던 터라 많은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했다. 5,000년을 버틴 고대 이집트 유적은 모두 그렇게 탄생했다.

카이로 기자 지구의 3대 피라미드도 마찬가지다. 나일강의 도움 없이 피라미드 건설에 사용된 수백만개의 돌들을 운반해 올 방도를 달리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집트에는 80여 기의 피라미드가 발견됐는데 최초의 피라미드인 사카라Saqqara의 계단식 피라미드에서 알 수 있듯 모양과 형태가 시기별로 달랐다. 이곳 기자 지구의 피라미드는 평평한 사면이 위로 올라가다 정상에서 한 점으로 만나는 피라미드의 일반적 이미지에 부합하는 형태다. 3개의 피라미드는 크기 순서대로 앉아 있는데 첫 번째가 쿠푸왕 피라미드Khufu’s Pyramid, 두 번째가 카프라왕 피라미드Khafra’s Pyramid, 마지막 제일 작은 게 멘카우라왕의 피라미드다. 고왕조 시대의 파라오들이다. 피라미드의 축조방식과 목적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만 태양신 숭배의 의미를 담은 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고왕국·중왕국 시대에는 피라미드 무덤과 장제전을 함께 만들어 이른바 ‘피라미드 복합체’를 이뤘는데, 신왕국 시대에는 도굴을 막기 위해 장제전과는 떨어진 곳에 암굴무덤을 만들었다는 추정도 있다.

기자 피라미드의 경사면 선은 원경에서는 매끈해 보였는데 근접할수록 흐트러졌다. 4,600년의 세월이 흐르고 피라미드 표면에 덧씌웠던 석회암이 떨어져 나가면서 차곡차곡 쌓여진 거대한 직육면체 바위들이 그대로 드러난 탓이다. 선의 흐트러짐에 반비례해 피라미드의 규모는 거대해졌다. 기원전 2,650년경에 만들어진 쿠푸왕 피라미드는 원래 146m였다가 지금은 137m로 낮아졌지만 250만개의 돌이 투입된 위용에는 변함이 없었다. 피라미드 내부의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면 파라오의 석관에 이른다. 관실에 자연 통풍장치까지 설치한 대목에서는 고대 이집트 왕국의 과학과 수학, 건축술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3개의 피라미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포인트는 여행객들과 낙타와 낙타몰이꾼으로 북적였다. 이곳에서 보니 실제와는 다르게 가운데 카프라왕 피라미드가 가장 높아 보였는데, 피라미드 표면 전체를 덮었던 석회암 일부가 상단에 남아 있어 더 도드라졌다.    

기자의 3대 피라미드에서 아래쪽으로 500~600m 내려가면 높이 20m, 길이 70m의 거대한 스핑크스가 앉아 있다. 사자 몸에 사람 머리를 한 피라미드의 파수꾼이다. 비록 코가 떨어져 나갔고 곳곳에 보수한 흔적도 많지만 4,500년 세월을 이겨냈으니 얕잡을 일이 아니다. 원근법을 교묘히 활용해 한 손에는 피라미드 꼭지를 붙들고 다른 한 손에는 스핑크스의 볼을 어루만지는 따위의 사진을 찍어 주는 현지 꼬마들에게 여행자들은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너무 집요하게 더 많은 돈을 요구해대니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앞에서 민망했다.


아스완의 채석장에 남아 있는 미완성 오벨리스크

 Aswan 아스완

사막 속 물의 도시 그리고 여신

나일강 유역의 신전과 피라미드 탄생에 질 좋은 돌을 공급했을 아스완은 이집트답지 않았다. 이집트는 국토의 95%가 불모의 사막인데 아스완은 거꾸로 물의 도시, 섬의 도시였다. 사막 속 오아시스 같은 상큼함이 느껴졌다. 과거 아프리카계 누비아Nubia의 땅과 인접했다는 점도 이집트답지 않은 인상에 한몫 했으리라.

나일강에 건설된 두 개의 댐이 사막 속에 물의 도시 아스완을 세웠다. 1902년 완공된 아스완댐Aswan Dam과 옛 소련의 도움으로 1970년에 들어선 아스완 하이댐Aswan High Dam이다. 아스완 하이댐 건설로 나일강은 거대한 인공호수 나세르 호수Nasser Lake를 머금었다. 댐은 홍수방지와 전력생산, 사막의 농경지화라는 임무를 너끈히 소화했지만 고대 이집트 유적에게는 최대의 위협이었다. 신전과 옛 무덤들이 수몰됐다. 보다 못한 유네스코가 아부심벨의 대신전과 소신전 등 일부 유적을 해체한 뒤 근처 안전지대로 옮겼다. 

필레섬Philae Island의 이시스 신전Temple of Isis도 같은 처지였다. 필레섬 옆 아길키아섬Agilkia Island으로 옮겨져 완전수몰 위기에서 벗어났다. 4만개의 블록으로 잘라서 옮겼다는데 1972년부터 1980년까지 무려 8년이 소요됐다고 한다. 이시스 신전은 고대 이집트의 최고신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를 위해 세워졌다. 말기 왕조 시대 30왕조를 수립한 넥타네보Nectanebo 1세가 세워 이시스 여신에게 바쳤고,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1탑문이 세워져서인지 고대 이집트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그리스·로마 양식이 가미됐다는 평가다. 여신을 위한 신전이어서인지 부드럽고 단아한 느낌도 물씬했다. 바깥마당-첫째 탑문-안마당-둘째 탑문-기둥 복도-성소가 일직선을 그렸는데 탑문 벽과 기둥, 성소 벽화마다 이시스 여신과 아들 호루스Horus, 남편 오시리스가 반겼다. 시동생인 세트Seth가 남편 오시리스를 토막내 이집트 전역에 뿌렸는데 그 조각들을 일일이 찾아내고 조립해 남편을 부활시켰다는 신화도 들려줬다. 이시스와 호루스의 부조 위에 새겨진 콥트교 십자가는 로마제국 점령 이후 그리스도교 예배당으로 사용됐던 이시스 신전의 상처 같았다.

아스완은 1937년 영국의 추리소설 작가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ie가 쓴 <나일강의 살인사건 Death on the Nile>의 무대이기도 하다. 호변 전망 좋은 곳에 자리잡은 올드 캐터랙트 호텔Old Cataract Hotel은 당시 아가사 크리스티가 묵고 집필했던 객실을 특별 보존하고 있었다. 1899년 지어진 고풍스럽고 단아하면서 품격을 갖춘 올드 캐터랙트 호텔의 배려로 그녀의 객실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다. 테라스에서 그녀가 매일 바라봤을 풍경을 마주했다. 날쌘 스피드 보트 사이로 기다란 삼각 돛대를 하늘로 곧추세운 펠루카Felucca가 바다처럼 짙푸른 수면을 유유히 미끄러졌다. 호젓하고 평화로웠다. 


아스완은 사막 속 물의 도시다. 사막의 나라 이집트답지 않은 정취가 물씬하다

아스완 이시스 신전 내부에 새겨진 돋을새김

이시스 여신과 그녀의 아들 호루스의 모습을 새긴 부조가 이시스 신전 기둥과 벽화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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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입국 비자 이집트 입국을 위해 비자가 필요하다. 여권 유효기간이 6개월 이상 남아 있다면 이집트 입국시 미화 15달러를 내고 한 달 유효한 관광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다. 사전 비자는 주한이집트대사관에 신청한다. 02-749-0787
기후 남북으로 1,532km에 걸쳐 길게 형성돼 있어 남부와 북부 간 기온차이가 나는 편이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기후이며 4월 중순부터 5월, 9~11월경이 여행하기 좋다.
화폐 및 시차 이집트 여행시에는 현지 화폐인 이집트 파운드를 사용하는 게 편리하다. 1이집트파운드는 한화 약 160원. 시간은 한국보다 7시간 늦다.
이집트 & 카타르 한번에 즐기기 카타르항공Qatar Airways은 카타르 도하를 거쳐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등 이집트 주요 도시를 연결하고 있다. 인천-도하 노선은 매일 운항하고 있으며 인천공항에서 밤 12시45분 출발해 도하에는 새벽 5시에 도착한다. 도하공항에서 이집트 각 도시로 연결된다. 경유지에서 도하 시티투어를 즐길 수 있다.

글·사진  김선주 기자 
취재협조  이집트관광청 www.myegypt.or.kr, 카타르항공 www.qatarairways.co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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