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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力 인터뷰] 그가 밀주만 마신 이유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4.02.28 1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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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100% 제바는 음미해야 제맛이다

(주)제주전통주 이성훈 대표
그가 밀주만 마신 이유 
 
제주도에 가면 누구나 한라산 소주를 마신다. 술꾼이라면 오메기술과 고소리술을 찾아 마신다. 
그러나 제주도에 보리로 만든 술이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 맥주가 아니다. 보리술 ‘제바JEBA’다. 
제바JEBA라는 이름은 제주보리Jeju Barley의 영문자에서 나온 것이다. 원료는 제주산 보리만을 100% 사용한 알코올 도수 36.4%의 리큐르다. 제바의 정체성은 이토록 간단명료하다. 그러나 제바의 뿌리인 보리소주의 정체성은 훨씬 복잡하고 은밀하다. 좁쌀로 만든 오메기술이나 고소리술만큼 오래됐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제주도 사람조차도 말이다. 제바를 만든 (주)제주전통주의 이성훈 대표가 들려주는 보리소주 이야기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밀주의 역사가 녹아 있다. 
 
2 증류한 보리원액을 내리는 과정 3 제바의 원천은 제주도의 땅, 제주도의 보리다
 
제주도 밀주, 세상에 드러나다

그는 제주 토박이다. 제주에서 사업을 하다가 정치판에도 머물렀다. 덕분에 술도 제법 마셨다. 그런 그에게도 보리소주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술이 아니었다. 제사상에서 맛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뻔했다. 그러나 투명한 소주를 마실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거친 듯 진한 향이 단번에 그를 사로잡았다. 즐겨 마시던 위스키나 고량주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어떻게 만드는지가 궁금해졌다. 시작은 그렇게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허나 실제 제조는 간단치가 않았다. 어디에도 보리소주에 대한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발로 뛰는 수밖에. 가장 확실한 방법은 경로당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할머니들이야말로 확실한 전수자이자 유일한 기술보유자니까. 

“우선 경로당에 찐빵 한 봉지 사들고 가서는 어르신들께 소주 만드는 집을 알려 달라 했죠. 물어물어 찾아가면 술 내리는 솥단지가 꼭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두 번 가는 걸로는 절대 알려 주지 않았어요”
그렇게 해서 알아낸 보리소주는 종류만도 40여 가지. 집집마다 술맛도, 담그는 법도 다 달랐던 탓이다. 그간 이 대표는 얼마나 많은 찐빵 봉지를 사다 날랐을까. 이렇게 바지런히 발품을 팔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것은 할머니들의 말대로 당시 곡류로 소주를 빚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쌀이 귀한 제주에서는 좁쌀로 술을 빚었다. 지금까지도 제주도의 전통주로 내려오고 있는 오메기술, 고소리술이 대표적이다. 반면 제주도 서쪽 평야지대에서는 보리를 재배했다. 덕분에 보리로 술을 만들 수 있었지만, 좁쌀에 비해 훨씬 비싼 보리를 쓰는 것은 언감생심. 종갓집 제사에 쓰거나, 각종 약재를 넣고 약 대신 마시는 귀한 술이었다.

“보리소주에는 귀한 동물성 재료를 넣곤 했습니다. 바닷게, 꿩, 오소리, 심지어 말뼈까지 넣었죠. 동물성 재료와 보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동물성 재료의 비린내를 잡아 줄 수 있는 게 보리의 특성이거든요. 거기에는 할머니들의 비법이 녹아 있습니다. 한 할머니는 증류가 끝난 뒤 항아리를 데우시더라구요. 정확한 원리는 모르셨지만 술의 안 좋은 향이 날아가는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사실 처음엔 할머니들이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맨드렁 뜨뜻할 때 요렇게 놔라’라고만 했거든요. 해석하면 ‘뜨뜻미지근할 때 한 됫박 놔라’는 말인데 뜨뜻미지근한 온도가 몇 도인지 전혀 알 수 없잖아요? 그래서 할머니들이 해봤다는 방식대로 다 해봤습니다. 날계란, 굼벵이, 송충이, 지네 등 별의별 것을 다 넣어 봤어요. 그렇게 술 빚기에 입문했습니다.”
 
이성훈 대표에게 제바란, 다양한 시도 끝에 얻은 ‘제주술’ 그 자체다
 
오롯이 담아낸 필사의 보리 향 

그렇게 만든 보리소주를 판매하기 시작한 건 2003년. 재밌는 사실은 이성훈 대표 역시 허가를 받지 않은 채 밀주로 팔았다는 것이다. 진한 향과 높은 도수의 보리소주는 당시 제주도에 드나들던 몽골인들의 입맛에 잘 맞았다. 몽골에 수출까지 하면서 제법 재미를 봤단다.

그러나 판매한 지 1년 후에 밀주 딱지를 뗐다. 본격적으로 보리소주를 연구하고 복원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제주 한라대 창업보육센터에서 과학적 양조를 배우는 것부터 시작했다. 동시에 ㈜제주전통주를 설립하고, 몇 차례 보리소주를 베이스로 한 약용주를 개발하기도 했다. 그렇게 4년이 흐른 후, 할머니들의 노하우와 본인의 연구가 결합된 ‘제바’를 출시하게 됐다. 

“제바가 전통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닙니다. 현대적 양조법을 따르고 있는데다가 예전처럼 동물성 약재를 넣지도 않죠. 양조 방식 때문에 주세법상 소주가 아닌 리큐르에 분류되어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분명한 건, 제바의 원형은 제주 보리소주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할머니들이 보리소주의 좋지 않은 향을 없애기 위해 항아리를 데웠듯 제바도 초기에 풍기는 이취를 제거하기 위해 복잡한 양조 과정을 거칩니다. 그러나 좋지 않은 향을 없애려고 보리의 특성까지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어요. 제바만의 맛과 향을 내기 위해 여러 실험을 했죠. 그 과정 끝에 겉보리 향을 가미하는 지금의 제바가 완성됐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발효한 곡식에서 나는 이 향을 싫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좋은 술’이란 개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바의 개성은 보리의 맛을 최대한 끌어올렸다는 것이죠.”

간단히 말하면, 제바는 보리를 품에 안은 채, 단계별로 변신하는 술이고, 이성훈 대표는 각 단계마다 향과 맛을 깎아내고 덧붙이는 조각가다. 제바를 마시면 그 미세한 조각의 결이 분명 느껴진다. 복잡다단한 풍미 때문에, 흙 맛이 난다고 박수를 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릿한 향이 난다고 미간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위스키보다 낫다고 하고, 어떤 이는 참소주만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제바가 출시된 것은 이제 막 4년차. 시간이 지날수록 제바의 맛은 더욱 깊어질 것이고, 향은 더욱 농밀해질 것이다. 이성훈 대표는 앞으로 15년이 지나면 15년 전 땅에 묻어 둔 보리소주를 공개하겠다고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30년산 제바를, 숙성이 될수록 깊어질 맛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 기다림마저 즐겁다.
 
일부러 찾는 사람이 많아 서울에서도 제바를 맛볼 수 있다 3 제바를 맛본 외국인들은 ‘위스키보다 낫다’고 추켜세웠다  
 
에디터  천소현 기자   글·사진  수수보리 전은경(수수보리는 우리 술을 전파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travie info      
술꾼과 술쟁이의 만남 ‘제바데이JEBA DAY’
제주도 내 면세점과 서울의 일부 전통주 바에서만 판매되었던 제바가 보다 많은 술꾼들을 만났다. 지난 1월25일 열린 ‘제바데이’는 제바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제바를 소개하고, 마음껏 나눠 마시는 시간이었다. 이날 행사에는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도 제주 보리술을 맛보고자 참석했다. 이날은 특별히 오크통에서 숙성된 제바를 선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대표가 제주에서 직접 배를 띄워 공수해 온 왕방어회와의 궁합이 굉장했다. 서울에서는 충정로의 전통주 바 ‘물뛴다’에서 제바를 마실 수 있다. 제바 500ml 8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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