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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령 기자의 Honeymoon Dream] 모든 향기의 로마, 그라스Grasse

  • Editor. 고서령
  • 입력 2015.11.04 13: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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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 추억하는 여행

그럴 때가 있다. 거리를 스친 사람의 향기에서 문득 지난 사랑이 떠오르는 순간, 우연히 맡은 비 냄새에서 언젠가 우산을 함께 썼던 사람이 생각나는 순간, 길가 꽃집에서 풍기는 장미향에서 지금 곁에 있는 연인과의 첫 만남이 기억나는 순간….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어느 겨울날 홍차에 적신 마들렌 향기에서 떠올린 어릴 적 고향의 기억으로 장편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썼다. 출간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20세기 프랑스 문학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받는 소설이다. 이 책 이후 심리학자들은 특정한 향기에 자극을 받아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되살리는 것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이름 붙였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향기는 뇌의 감정영역에서 작용하고, 향기와 연관된 기억은 언어나 사고에 의해 희석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향기는 추억을 기록하는, 그리고 추억을 소환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영원히 잊지 못할 허니문을 만들고 싶은 당신에게 프랑스 그라스Grasse를 추천하고 싶은 이유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소도시 ‘그라스’는 오늘날 프랑스를 향수의 나라로 만든 기원지다. 영화로도 유명한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uskind의 소설 <향수>에서 ‘모든 향기의 로마’로 그려진 도시이기도 하다. 원래 그라스는 12세기 가죽 수출산업의 중심지였다. 시체 썩는 냄새만큼 고약했던 가죽 냄새를 지우기 위해 발달하기 시작한 향수가 16세기부터는 그라스의 핵심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그라스의 모든 언덕이 수천 그루의 오렌지 나무와 장미, 재스민, 라벤더, 아이리스로 향긋하게 물들었다. 연간 300일 이상 햇볕이 내리쬐는 기후와 비옥한 토양, 염분이 섞인 지중해의 바람이 방향성 식물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 준 덕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라스는 ‘향수의 메카’라는 명성을 굳건히 지켜 왔다. 현재 그라스의 인구 5만명 중 3분의2 이상이 직간접적으로 향수 산업에 종사하고 있고, 전통적인 향수 가문들이 수대에 걸쳐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세계적인 조향사 대부분이 그라스에서 향수를 배웠고, 샤넬 ‘넘버파이브No.5’와 크리스티앙 디오르 ‘자도르Jador’도 그라스에서 탄생했다. 이 작은 도시에서 원료식물 재배부터 에센스 생산, 향수 제조와 판매, 조향사 교육까지 모든 과정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영화 <향수>에서 본 듯한 그라스의 빛바랜 골목 풍경
그라스에는 향수 뿐 아니라 향이 나는 비누, 초, 디퓨저 등 수많은 종류의 향 제품이 있다 

세상 하나뿐인, 둘만의 향수 만들기

향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몇 해 전부터 우리나라에 유행하고 있는 니치향수Niche Perfume를 모를 리 없다. 특히 ‘남들 다 쓰는 흔한 향’이 아닌 ‘나만의 향’을 갈구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니치향수는 천연 원료만을 사용하고 조향사의 품질관리 아래 소량만 만들어지는 향수로, 자신의 성격·직업·취향에 맞게 두 가지 이상의 향을 섞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의 딥디크·크리드·아닉구딸, 영국의 조말론·펜할리곤스 등이 국내에 알려진 대표적 니치향수 브랜드다. 일반 향수의 3배에 달하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향수를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이들 역시 대중에 시판되는 향수이고, 블렌딩에 어울리는 향의 조합도 제한되어 있어 ‘나만의 향수’라고 말하기엔 여전히 아쉽다.

그라스에 가면 전문 조향사의 도움을 받으며 진정한 나만의 향수를 만들 수 있다. 물론 요즘은 서울에서도 어렵지 않게 향수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다지만, 향수의 원료가 재배되고 생산되는 본고장에서의 특별한 경험은 그라스 말고 어디에서도 할 수 없다. 그라스엔 프랑스의 정통 니치향수 브랜드인 ‘몰리나르Molinard’, ‘갈리마르Galimard’, ‘프라고나르Fragonard’의 본사가 있다. 이들 3대 브랜드는 각각 방문객들을 위해 향수 조향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아마도 허니문은 앞으로 수십년이 될 결혼생활 중 가장 풋풋하고 설레는 시간일 것이다. 그 소중한 시간에 서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향기로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그것도 세상에 하나뿐인 우리만의 향수로 말이다. 조향사의 도움을 받으면 둘이 함께 있을 때 조화롭게 어울리는 커플 향수를 만들 수도 있다. 완성된 향수에 서로의 이름을 붙여 준다면 더욱 특별할 것 같다.

50ml짜리 향수가 너무 적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톱노트, 미들노트, 베이스노트별로 어떤 향을 어떤 비율로 배합했는지 기록하는 조향일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조향일지를 향수회사에서 고유번호를 매겨 보관하기 때문에, 추후에도 자신이 만든 향수를 계속 추가 주문할 수 있다.
 
향수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는 ‘프라고나르’의 다양한 제품들

빛바랜 골목에 장미향 퍼질 때

언덕 위 도시 그라스엔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다. 그 속을 걷다 보면 영화 <향수>에서 본 듯한 골목을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다. ‘궁극의 향’을 찾아 그라스에 찾아간 주인공이 아름다운 여성들을 살해하던 그 골목길들 말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좀 섬뜩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에겐 무섭기보다 흥미로운 경험이다.

빛바랜 오렌지색과 노란색 건물들로 차곡차곡 채워진 그라스가 가장 아름다워지는 때는 5월이다. 향수의 원료가 되는 분홍빛 장미가 만개하는 시기여서다. 이때쯤 열리는 장미축제 기간엔 도시 전체가 장미향으로 가득하다. 작은 상점들은 입구에 장미꽃잎을 흩뿌려 놓고, 거리엔 장미로 만든 비누·향초 등 방향 제품과 장미마카롱·장미사탕 등 온갖 장미 음식들이 즐비해진다. 워낙 작은 도시여서 축제라기보다 마을잔치 같은 느낌이지만 그래서 더 즐겁다. 순백의 재스민이 피어나는 8월엔 재스민축제도 열린다.

또 하나 그라스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경험은 거리의 작은 향수가게들에 들어가 보는 것이다. 이들 중엔 100년 이상 대를 이어 향수를 만들어 온 곳들이 적지 않다. 작은 규모일지라도 조향사의 자부심과 향수에 대한 애정만큼은 세계적인 명품향수에 뒤지지 않는 곳들이다. 향수 말고도 향이 나는 비누, 초, 디퓨저, 섬유유연제 등 수많은 종류의 향 제품을 만날 수 있다.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에게 어울릴 향을 떠올리며 선물을 사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발디니는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소원을 
거절하고 싶지 않아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대답해 주었다. 
“내 아들아, 거기엔 세 가지 방법이 있단다. 
데워서 향기를 얻는 법, 차게 해서 향기를 
얻는 법, 그리고 기름을 이용해 향기를 
얻는 법이 있다. 여러 면에서 이것들이 
증류보다 우수한 방법들이다. 이런 방법을 
쓰면 가장 섬세한 향기까지도 얻을 수가 
있지. 재스민이나 장미, 혹은 오렌지 꽃의 
향기 같은 것 말이다.” “어디서요?” 
그루누이가 물었다. “남쪽 지방, 특히 
그라스에서 그런 방법을 쓰지.”
<향수> 中 
열린책들 |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 강명순 옮김
 
그라스 찾아가기
가장 가까운 공항은 니스Nice의 코트다쥐르공항이다. 니스 도심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500번 버스를 타고 약 1시간30분이면 그라스 여행정보센터 앞에 도착한다. 그라스가 종점이기 때문에 이동 중에 편하게 눈을 붙여도 걱정 없다. 여행정보센터에서 관광 정보와 지도를 얻을 수 있다.
 
글 고서령 기자  사진제공 엔스타일투어 www.nstyletou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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