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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⑤악숨 Axum-에티오피아 문명의 요람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6.08.11 1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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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xum 악숨 
에티오피아 문명의 요람
 
악숨은 오지다. 아디스아바바에서 960km 떨어진 에티오피아의 가장 북쪽에 자리한 산악 도시다. 인구 2만명에 불과한 이곳은 그러나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 로마와 중국 한나라, 페르시아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악숨 왕국의 수도였다. 
 
악숨 제국의 대표적 유산인 오벨리스크군. 세계에서 가장 큰 33m의 오벨리스크는 넘어져 있다 
 

동쪽으로는 홍해, 북쪽으로는 수단과 이집트, 서쪽과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본토와 이어졌던 악숨은 금과 유향, 몰약과 홍해의 소금 등을 팔아 부를 쌓았다. 4세기에는 기독교를 국교화했고, 화폐와 문자, 건축물 등 고도의 문명까지 탄생시켰다. 하지만 10세기 이슬람 세력의 팽창으로 해상무역이 막히고 대가뭄이 겹치면서 쇠망했다. 

악숨 왕국의 대표적인 창조물은 오벨리스크(Obelisk)다. 오벨리스크는 왕의 무덤 위에 세우는 석주로 그 크기로 왕의 권력을 나타낸다. 북쪽에 자리한 오벨리스크 공원에는 기원전 1세기부터 천년에 걸쳐 세워진 오벨리스크 수십 개가 있다. 

서 있는 것들 중에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33m 높이의 오벨리스크는 넘어져 깨진 상태고, 24m 높이의 오벨리스크는 1937년 무솔리니가 세 동강 내어 로마로 가져갔다가 2005년 국제적인 문화재 반환 운동으로 되돌려 받았다. 이 거대한 오벨리스크들은 모두 하나의 단일 암석을 깎아 만든 것으로, 지하에서는 왕의 무덤과 금속과 상아 등 부장품들이 발견됐다. 

악숨의 옛 이름은 시바Sheba라고 알려져 있다. 14세기에 쓰여진 에티오피아의 역사서 <케브라 나가스트(Kebra Nagast)>에 따르면 마케다(Makeda)공주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시바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여왕은 지혜를 구하고자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을 찾아갔다. 왕과의 하룻밤 이후 아들 메넬리크를 낳았는데 메넬리크는 22살이 되어 어머니가 준 반지를 가지고 아버지 솔로몬을 만났다. 그는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던 솔로몬 왕의 뜻을 뒤로하고 악숨으로 돌아와 메넬리크 1세라는 왕호로 황제에 올라 솔로몬 왕국을 이어갔다. 성직자와 학자, 장인 등 1만2,000명의 유대인 그리고 십계명을 보관한 법궤(Art of the Covenant)와 함께였다. 

에티오피아의 기원은 이렇듯 솔로몬 왕의 아들 메넬리크 1세로부터 시작됐다. 악숨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왕복 8,000km로 당시 걸어서 1년이 걸렸을 시간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사실 마케다 여왕의 원정은 비즈니스를 위한 것이었다. 그녀가 싣고 간 유향과 몰약, 금과 오팔 그리고 소금 등은 모두 에티오피아에서 생산되는 것들이다. 악숨의 최고 지배자가 중동 무역을 관장하던 솔로몬 왕과 만나는 최초의 경제 정상회담이었던 셈이다. 

‘성 마리아 시온교회(St. Mary of Zion Church)’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여호와의 법궤, 메넬리크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왔다는 바로 그 법궤가 모셔져 있다고 했다. 교회는 4~6세기 경 세워졌던 교회의 후신으로 1965년 하일레 셀라시에 1세에 의해 지어졌다. 

에티오피아정교회는 법궤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본 사람은 없다. 에티오피아 고대 기즈어로 이까베트‘보호자’라는 뜻라 부르는 수도사 한 명만이 성소(聖所)에 모셔진 법궤를 관리하는데 그는 성소 밖으로 나올 수 없고 죽을 때까지 법궤를 지키며 산다. 75세에 임명됐다는 현 이까베트는 80세다. 법궤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말하지만, 사실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법궤는 열어 보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법궤는 곧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성서에는 법궤가 사라진 데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학자들은 기원전 587년 바빌론 제국이 예루살렘을 침공했을 때 법궤도 함께 파괴됐든가 아니면 히브리인들이 옮겼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왜 성서에나 외부 기록에조차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지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이 땅이 시바의 여왕이 살던 터전임을 증명하듯 둔구르 유적에는 여왕의 왕궁 터가 남아 있다. 돌을 쌓아 올린 터 위에는 욕실, 아궁이, 배수시설, 재판장 등 몇몇 흔적들이 남아 있지만 시바의 여왕 때와는 사실 1,700년의 시간 차이가 있다. 

부풀려진 기원 속에서 역사적 진실을 가려내는 일은 학자들의 몫으로 남겨 둘 수밖에. 평범한 여행자가 알고 있는 건 종교의 역사에 기록된 이야기는 숨은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뿐이다. 혹시 모른다.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기록된 트로이 전쟁이 신화가 아닌 실제라 밝혀졌던 것처럼, 언젠가 에티오피아의 일관된 전설이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을지도.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처럼 옛 사람들의 기록에는 반드시 진실이 담겨 있다는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1937년 이탈리아에 빼앗긴 오벨리스크는 제자리를 찾았다
에티오피아정교회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성 마리아 시온교회. 교회 옆 성소에 모세의 법궤가 안치돼 있다고 전해진다
 
 
글·사진 Travie writer 이세미  에디터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에티오피아항공 www.ethiopianairlin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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