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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함께하는 영국 도싯 Dorset 시골 여행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6.09.06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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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함께하는 영국 시골 여행
도싯 Dorset
 
언젠가 아이가 생기면 꼭 데리고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아름다운 영국의 전원 지방들. 
오래 전 영국에 머물던 학생 시절부터 품어 왔던 
그 리스트에서 가장 먼저 도싯을 꺼냈다. 
아빠가 추천하는 영국 시골 여행이다. 
 
석양에 물들어 가는 더들 도어. 도싯 지방의 대표적 명소 중 하나다
 

도싯에는 뭐가 있냐고?

오래전부터 아이가 함께 여행할 수 있을 만큼 크면 꼭 영국의 시골에 데려가 마음껏 뛰노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던 내게, 남부 해안의 작은 마을 스와니지(Swanage)는 최적의 여행지였다. 앤지(Angie)와 닉(Nick) 부부의 소박한 단층집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도싯 탐구를 시작했다. 

사실, 도싯을 비롯해 이곳 스와니지는 보통의 한국인 여행자들의 눈길을 끌 만한 것은 적지만 그저 평범한 시골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18세기부터 조지 3세를 비롯해 왕족들이 휴양차 웨이머스(Weymouth)를 자주 방문했고 이는 훗날, 특히 2차 대전 후 도싯이 휴양지로 인기를 얻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도싯의 주도는 도체스터(Dorchester)다. 영국의 지명을 잘 살펴보면 출신성분(?)까지 파악할 수 있어서 흥미롭다. 이름이 ‘체스터(Chester)’로 끝나는 도시들은 로마시대에 성곽으로 둘러싸인 요새 마을들이었다. 이름만으로도 도체스터가 과거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 도시였음을 유추할 수 있는데, 실제로도 당시 최전방의 군사거점이었다고 한다. 근대에 와서도 영국 남부 지역 전체는 프랑스 해안을 포함해 대서양 교통로와 마주하고 있는 최전방이다. 그것은 2차 대전 때도, 로마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도싯 지방은 영국인들이 대문호라 부르는 3대 작가 중 하나인 토마스 하디(Thomas Hardy), 1840~1928년가 거의 평생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테스>를 포함해 하디의 작품 속에 종종 등장하는 ‘웨스트 웨섹스(West Wessex)’라는 지방은 사실 이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디의 팬이라면 도체스터에 있는 그의 집 맥스 게이트(Max Gate)나 출생지인 토마스 하디 코티지(Thomas Hardy Cottage)는 반드시 방문해 봐야 할 곳이다. 사실 이곳을 ‘문학 지역’으로 알린 작가는 하디뿐만이 아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쓴 더글러스 애덤스(Douglas Adams), <프랑스 중위의 여자>의 존 파울스(John Fowles) 등도 도싯의 아름다운 전원을 배경으로 글을 완성했다. 영국에 그토록 아름다운 시골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도싯이 문학 작품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여행을 해보면 분명해진다.
 
호박 축제가 한창인 마을의 펍
영국에는 우리의 올레길 같은 산책로가 일찍부터 잘 갖춰져 있다
스와니지의 상징인 올드 해리스. 보기보다 높은 하얀 절벽 위를 산책하는 묘미가 있다
오렌지 클리프에서 내려다본 브리드포트의 전경
워스 매트레이버에서 해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돌담으로 둘러싸인 양들의 들판을 거쳐야 한다

영국 해안 풍경의 모든 ‘경우의 수’

문학인들만 도싯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과학자들도 도싯에 주목한다. 물론 목적은 다르다. 지질학적 다양성과 가치에 있어서 도싯은 영국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곳이기 때문이다. 155km에 달하는 해안지역이 대부분 세계자연유산에 속한 쥬라기 해안(Jurassic Coast)의 일부다. 트라이아스기에서 백악기까지 중생대 전체를 아우르는 지질을 갖고 있다. 뒷동산 산책하다 화석을 줍는다는 앤지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지질학적 다양성’이란 곧 다양하고 특이한 풍광을 의미한다. ‘영국의 남부 해안’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 백악기 지질의 하얀 절벽들, 즉 화이트클리프(White Cliff)일 것이다. 그러나 도싯에는 하얀 절벽 외에도 예사롭지 않다 싶을 만큼 다채로운 해안선이 있다. 럴워스(Lulworth)의 코브, 자연 아치, 그리고 초크 스택인 올드 해리 바위(Old Harry’s Rock) 등 멋진 해안 풍경이 있으며 특히, 서쪽 해안 브리드포트(Bridport)의 오렌지 클리프는 상당히 신선한 풍경이다. 찰진 진흙으로 이루어진 언덕과 절벽이 멀리서 보니 과연 오렌지 빛이다. 이름 그대로 말이다.

브리드포트에서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구릉지로 난 B3157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차를 몰았다. 이곳은 이름난 시닉 루트(Scenic Route)다. 날이 이미 저물어 가는 통에 충분히 즐기지 못했지만, 이름값은 분명히 했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체실비치(Chesil Beach)다. 폭 200m의 둑 모양 자갈해변이 갯벌 석호를 보호하듯 길게 형성된 해안지형이다. 마치 인공으로 만든 방파제를 연상케 하는데, 학자들 사이에서는 그 형성 과정이 지금도 의문으로 여겨질 정도로 모양이 특이하다. 체실비치는 끝부분이 포틀랜드섬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 섬에서 나는 돌* 또한 귀한 것들이다. 영국의 주요 문화유산 건축물들을 개보수 할 때 필요한 건축 재료이기 때문이다.

다음날 찾은 럴워스의 더들 도어(Durdle Door)와 코브(Cove) 역시 앤지 부부의 추천으로 찾은 곳으로 도싯의 대표적 절경 중 하나다. 더들 도어는 백악과 석회암 등이 뒤섞인 이곳 해안지층에서 단단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부분이 침식되지 않고 남은 결과다. 자연이라는 조각가가 오랜 시간 깎아 낸 하나의 작품인 것이다. 시간 계산 착오로 더들 도어에 도착한 것은 좀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뉘엿뉘엿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지는 해, 높게 솟아오른 화이트클리프와 노을에 물든 자갈 해변…, 이때만큼은 세상 어느 해변이 부럽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스와니지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워스 매트레이버(Worth Matravers)에 갔다. 마을에서 산책로를 따라 20분쯤 걸었을까 토끼라도 뛰쳐나올 것만 같은 나지막한 계곡이 끝나고 눈앞에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진 해안이 펼쳐졌다. 그리고 인공인지 자연발생인지 수상쩍은 동굴들이 나타났다. 18세기에는 주로 도싯 해안을 통해 수많은 밀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정말이지 보물을 막 숨기고 나오는 해적이나 밀수꾼들과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다. 

이 한적한 시골 마을도 시끌벅적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2차 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었다. 당시 이곳은 유럽의 운명이 걸린 작전을 실행하기 위한 전진기지이자 상륙훈련이 이뤄지고 수많은 군인들과 보급품, 장비들이 북적대는 최전방이었다. 수많은 함정과 글라이더들이 웨이머스, 풀, 포틀랜드 등지에서 출발해 프랑스로 향하는 출정일의 긴장과 비장함을 상상해 보았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고즈넉한 마을의 여유로움 속에서 내려앉는 해와 함께 마음도 어느 새 차분히 가라앉는 중이었다.  
 
*포틀랜드 시멘트 | 19세기 영국의 한 벽돌공이 오늘날의 시멘트와 비슷한 건축 재료를 최초로 만들어 특허를 냈다. 그는 이것이 포틀랜드섬의 천연석과 유사하다고 하여 ‘포틀랜드 시멘트’라 명명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시멘트라고 부르는 그것이 바로 ‘포틀랜드 시멘트’에서 유래한 것이다. 
 
 
 
 
소리를 내며 작동까지 하는 동호회원들의 탱크 모형들은 아마추어의 단계를 뛰어넘은 듯 보인다  
탱크의 발상지인 영국의 자부심이 깃든 원조 탱크, 마크 시리즈 
뭐니뭐니 해도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독일 탱크 타이거 시리즈다
 
영국인들의 덕후 기질 

몇해 전 영화 <퓨리Fury>에서 주연배우인 브래드 피트보다 더 주목을 받았던 것이 있었다. 2차 대전 당시 미군의 주력전차인 셔먼과 독일의 타이거 전차다. 영화에 등장한 전차들이 당시의 실제 전차였기 때문이다. 그 출처가 다름 아닌 이곳 도싯 보빙턴(Bovington)에 있는 탱크박물관(Tank Museum)이다. 탱크의 발상지는 아시다시피 영국이지만 탱크 마니아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독일 탱크들이다. 상황은 이곳 박물관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대’, ‘최고’의 탱크 박물관이라는 타이틀을 영국이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유럽에서 가장 크고 인기가 있다는 보빙턴 탱크박물관이 이런 시골에 있는 이유는 1916년, 1차 대전에 투입되었던 영국의 탱크들이 치열한 전투 끝에 기지인 보빙턴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대부분 폐기할 수준이었지만 여기서 영국인들의 ‘덕후’적 기질이 나왔다. 탱크 승무원들과 엔지니어들은 훗날을 위해 일부 탱크들을 보존하기로 했고, 뒤에 이곳 보빙턴을 방문했던 어느 작가가 박물관 설립을 제안했다.
 
그 뒤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전장으로부터 회수 또는 탈취한 연합군과 추축국의 탱크들이 들어오면서 전시물의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이것들이 1947년부터 일반에게 개방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탱크의 역사(특히, 영국이 만든 최초의 탱크인 Mark I도 전시되었다)와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지금도 보빙턴과 근처 지역은 영국 기계화부대의 본부 역할을 하는 군사지역으로 기갑부대와 훈련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제까지 방목지처럼 보였던 대부분의 들판이 사실은 탱크들이 누비고 다니는 사격장이었다! 

하지만 이 박물관의 인기 비결은 세계 최대의 규모가 아니다. 이곳은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고증을 기반으로 탱크를 재현해 내고 한술 더 떠서 죽었던 탱크에 숨을 불어넣는다. 엄밀히 말하면 보빙턴은 박물관이라기보다 ‘탱크 연구소’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는 곳이다.
 
여름철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탱크들이 굉음을 내며 트랙을 달린다. 60여년 전 유럽의 전장을 누비던 탱크가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쥬라기 공원에서 다시 살아난 공룡을 보는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어디선가 탱크의 굉음(?)이 들렸다. 어라! 제법 큰 모형  RC탱크였다. 때마침 이 지역 RC탱크모형 클럽에서 행사를 갖고 있었던 것. 동호회원들이 보유하고 있는 탱크들이 박물관 한쪽편에 쭉 자리잡고 있다. 단순히 모형이라 치부하기엔 탑승한 군인까지 움직이게 하는 정밀함과 고증의 묘사가 거의 예술적 경지에 이른다. 우리와 다른 풍경이라면 동호회원들의 연령대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 단순히 취미라기보다는 자신들의 과거 유산에 대한 강한 애착이 느껴졌다. 이곳은 역시 탱크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클래식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당히 낡아 나름 운치 있는 객차
단순히 외형만이 아니라 운전 방식까지 모든 것을 재현하는 진지함이 인상적이다 

추억의 증기기관차가 부활하다

오래전 북부 잉글랜드에 머물던 시절에 굳어진 영국에 대한 이미지가 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초원 위로 뭉게구름 같은 흰 수증기를 뿜어대며 달리는 증기기관차다. 

아이와의 함께한 것이었기에 은근히 스와니지 퍼벡 증기기관차(Swanage Purbeck Steam Train)에 대한 기대가 크기도 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일까. 객차는 그다지 클래식하지 않았고, 노선상의 풍경도 드라마틱하지는 않았다. 그저 아이에게 영화에서나 볼 법한 증기기관차, 기차역 그리고 승무원의 모습을 보여 줬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승객도 별로 없을 것 같은 이 작은 시골마을 노선에 승객이, 그것도 현지인들이 의외로 많았다. 이 철도는 영국의 철도 본선과 연결된 게 아니어서 이 지역의 교통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 의문에 대한 실마리는 이곳 퍼벡(Purbeck) 지역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랜드마크인 코프성(Corfe Castle)에서 찾았다. 성이 훌륭했던 것은 아니다. 사진으로는 멋있었던 11세기 노르만 시대의 코프성은 직접 와서 보니 언덕배기에 덩그러니 놓인 돌무더기 수준이었다. 그러나 계절별로 마련되어 있는 다양한 체험 이벤트가 그 허전함을 채워 주고 있었다. 아이들이건 성인이건 중세시대의 궁수처럼 활을 쏘고 칼을 휘둘러 볼 수 있었다. 역사로만 이해했던 옛 사람들의 생활들을 실감나게 느껴 볼 수 있었다. 효율성으로만 따진다면 진작 없어졌어야 할 것들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물려받은 가치를 지키고 또 새롭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크림티를 위하여 

스와니지를 떠나는 날 아침에 앤지와 차를 마시며 영국을 떠나기 전 꼭 먹어 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망설임 없이 ‘도싯 크림티’라고 대답했다. 이곳을 떠나는 마당에 꼭 먹어 봐야 하는 게 이 지방 크림티라니. 좀 더 일찍 물어봤어야 했다는 아쉬움을 품은 채 도싯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며칠 후 코츠월드(Cotswold) 크림티를 접해 볼 기회가 있었다. 크림티는 차를 스콘, 클로티드 크림 그리고 잼과 함께 먹는 것인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네 영덕대게와 울진대게 원조 논쟁마냥 이곳에서도 지역별로 크림티의 원조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차 자체보다는 곁들여 먹는 빵이나 크림, 잼에 따라, 심지어 무엇을 먼저 발라 먹느냐에 따른 차이일 뿐이었다. 어쨌든 아직 먹어 보지 못한 ‘도싯의 크림티’를 다음에는 꼭 맛보겠다는 다짐을 했다. ‘원조’ 때문이 아니다. 아름다운 도싯 지방을 다시 방문하고 싶어서 찾아낸 나만의 명분이다.  

글·사진 Traviest 유호상  에디터 천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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