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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도-다양한 종교 성지를 품은 델리

  • Editor. 트래비
  • 입력 2016.09.12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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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Hours in India
북인도에서의 골든타임 
 
인도의 골든트라이앵글로 불리는 델리, 아그라, 
자이푸르를 다녀왔다. 인도의 정수만을 골라 담느라 
몸도 마음도 바빴다. 어느새 또 다른 인도를 꿈꾸게 하고 
짧기에 더 애틋했던 북인도에서의 72시간. 
 
암베르 성 내 왕의 접견실로 들어가는 입구인 ‘가네쉬 폴’
 

●Delhi 델리 
 
델리는 인도의 수도다. 예부터 인도의 중심지 역할을 해 온 이곳은 펀자브 지방과 갠지스강 유역 교통의 중심지로 수많은 왕조가 이곳에서 흥망을 거듭했다. 20세기에는 영국 지배의 본거지가 됐고 이후 독립을 쟁취한 곳도 여기다. 델리는 크게 무굴제국 시기에 형성된 구시가 ‘올드델리(Old Delhi)’와 1911년 영국령 신도시 지구로 건설된 ‘뉴델리(New Delhi)’로 나뉜다. 역사적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있는 올드델리에 비해 남쪽에 자리한 뉴델리는 인도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을 이룬다. 올드델리는 역사 속에서 일곱 번이나 새로이 건설됐는데, 지금의 올드델리는 1638년 무굴제국의 술탄 샤 자한 때 건설됐던 일곱 번째 도시다. 
 
모스크 회랑에 세워진 열주에는 힌두양식 문양들이 남아 있다
73m 높이의 쿠트브 미나르는 유적군 내에서 단연 돋보인다
 
▶SCENE #1 
쿠트브 유적군(Qutb Complex)
인도 최초 이슬람 왕조의 위용
 
뉴델리 남쪽 15km 지점에는 델리에서 가장 유명한 쿠트브 유적군이 자리한다. 유적 내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인도 최초의 이슬람 왕조인 맘루크 왕조(Mamluk Dynasty, 1206~1290년)*때 세워진 거대한 첨탑, 쿠트브 미나르(Qutb Minar)다. 

쿠트브 미나르는 터키계 이슬람교도 쿠트부딘 아이바크(Qutb-ud-din Aibak, 1206~1210년)가 1193년 인도 북부를 점령한 뒤, 이슬람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건립했다. 궁정 노예 출신이지만 재능을 인정받아 아프가니스탄 고르 왕조의 술탄 무하마드(Muhammad)의 무장이 된 그는 주군의 암살 소식을 듣자, 스스로를 술탄으로 선언하고 독립왕조를 세웠다. 

‘빛나는 탑’이라는 뜻의 쿠트브 미나르는 73m 높이에 5층 구조로 유적지 내 모스크의 미너렛(Minaret. 아잔(예배시간 공지)에 사용된 탑) 역할을 했다. 건립은 왕조 성립 전인 1199년에 시작했지만, 그의 죽음으로 1층에서 중단됐다가, 사위이자 후계자였던 일투트미쉬(Shams-ud-din Iltutmish, 1210~1236년)가 3개 층을 더해 완성시켰다. 그러나 맨 위층이 후일 벼락으로 부서지고 이를 투갈라크 왕조(Tughlaq Dynasty, 1320~1413년)의 술탄 피루즈 샤 투글루크(Firuz Shah Tughluq, 1351~1388년)가 다시 두 개 층으로 분리 개조 후 대리석으로 장식해 복원시킴으로써 지금의 5층 구조를 갖추게 됐다. 

탑의 맨 아래 15m의 지름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져 꼭대기는 2.5m에 이른다. 아래 세 개 층은 붉은 사암이고 위는 대리석과 사암으로 만들어졌는데 탑신에 새겨진 아라베스크 문양과 코란의 서체가 무척 정교하다. 내부는 379개의 계단이 꼭대기까지 이어지고 각 층마다 놓인 발코니에서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지만, 1979년 단체여행 온 학생들의 사고 이후 출입이 통제된 상태다. 

유적군 내에는 과거 힌두교와 자이나교 사원 유적들과 더불어 후대 통치자들에 의해 추가된 많은 유적들이 공존하지만 쿠트브 미나르를 제외하면 대부분 허물어진 상태다. 

탑 옆에 흔적이 남은 쿠와트 알 이슬람(Quwwat al Islam) 모스크는 1205년에 완성된 것이다. 당시 동서 43m, 남북 32,4m 규모로 세워졌던 모스크는 현재 정면에 세웠던 석조 아치 벽과 안뜰의 회랑 등 일부만이 남았다. 또 회랑에 세워진 열주들은 기존 자리의 힌두교 사원과 델리 시내 27개 힌두사원을 파괴해 얻은 석재로 만들었기에 인도 전통양식 문양이 새겨져 있다. 

모스크 뜰에는 굽타 왕조 때 만들어진 철주도 눈에 띈다. 높이 7.2m에 무게 10톤인 이 철기둥은 402년 찬드라굽타 2세(ChaandraguptaⅡ, 375~413년)가 비슈누 사원에 세웠던 것을 10세기경 사원을 신축할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 그대로 남게 된 것이다. 당시의 주조기술로 99.7%의 고순도 철기둥을 제작했고 지금까지 지상 부분이 녹슬지 않았다는 것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이 밖에도 모스크의 남쪽 문으로 인도-이슬람문화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알라이 다르와자 문(Alai-Darwaza Gate), 미완성 탑인 알라이 미나르(Alai Minar), 일투트미쉬왕의 무덤, 이슬람 교육시설인 마드라사(Madrasa) 등 많은 유적이 있다. 쿠트브 미나르 유적군은 1993년 유네스코에 등재됐다. 
 
*맘루크 왕조 | 일반적으로 ‘노예 왕조’라고 부르며 ‘Slave Dynasty’라고도 쓴다. 맘루크(Mamluk)는 아랍어로 ‘백인 노예’라는 뜻으로, 아이바크와 후계자 대부분이 투르크족 노예출신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1250~1517년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했던 맘루크 왕조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집트의 왕조는 ‘카이로의 맘루크 왕조’라 칭하기도 했다.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전쟁포로로 끌려 온 노예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군사 훈련을 통해 정예부대로 육성했는데, 이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다. 
 
주소: Mehrauli, New Delhi, Delhi 110030 
전화:  +91 112 469 8431 
운영시간: 7:00~16:00  
요금: 500루피 
 
시크교의 성지로 알려진 ‘구르드와라 방글라 사히브’
본당 옆에 자리한 ‘사르오바르’. 신자들은 이 성스러운 호숫물에 몸을 씻기도 한다
본당 입구에서 성수를 마시는 신자
 
 
▶SCENE #2
구르드와라 방글라 사히브(Gurdwara Bangla Sahib) 
평등과 자비의 시크교 성지 
 
구르드와라 방글라 사히브는 델리에서 가장 유명한 시크교 성지다. 이곳이 성지가 된 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1664년, 시크교의 8대 구루였던 7살의 하르 크리샨(Har Krishan)은 자이 싱 1세(Jai SinghⅠ, 1611~1667년)의 초대로 델리에 몇 달을 머물게 됐는데 그때 천연두와 콜레라가 창궐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거처를 치료소로 삼아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치유력이 있다는 거처 우물의 성수를 나눠 주며 치료했지만, 그만 그 자신이 천연두에 걸려 그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방글라 사히브는 당시 그가 머물렀던 궁전 자리 위에 1783년 재건됐고 현대적인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47년이다. 시크교는 15세기 인도 서북부 펀자브 지역에서 탄생했다. 기본 교리는 이슬람교의 신념과 일치하지만 박티(Bhaki), 봉헌의 성격은 힌두교와 비슷하다. 하지만 단순하게 두 개의 기존 종교를 하나로 합쳐 만든 종교는 아니다. 시크교는 문헌을 검토해서 철학적으로 신앙을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창시자 나나크(Nanak, 1469~1538년)가 체험한 결정적인 계시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나크는 35세 때 숲에서 목욕을 하던 중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고 사흘 후 숲에서 나와 “힌두교도라는 것도 회교도라는 것도 없다”고 선포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시크’라 불렸는데 이는 펀자브어로 ‘제자’라는 뜻이다. 

시크교의 교리는 단순하다. 창조주 유일신 개념을 중심에 두고 힌두교의 의식과 순례, 극단적인 고행, 우상숭배 등은 배척하고 업(Karma)과 윤회 사상은 받아들였다. 또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이슬람교의 사상을 받아들여 카스트제도를 부정하고 노동과 금욕생활을 강조한다. 

나나크 이후에는 열 명의 구루가 있었다. 10대 구루인 고빈드 싱(Gobind Singh, 1675~1708년)을 마지막으로 이후에는 시크교 성전인 <그란트Granth>를 구루로 삼았다. 고빈드 싱은 정당방위를 위해 칼사(Khalsa)를 조직하고 이에 가입한 사람들에게 ‘싱(Singhs)’ 즉, ‘사자(獅子)’라는 이름을 주었다. 싱은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머리에는 터번을 썼다. 또 짧은 바지에 쇠로 된 팔찌를 끼고 단검을 차고 다녔다. 

시크교인은 인도에서 가장 훌륭한 군인이라 인정받는데 인도의 전 수상 인디라 간디의 경호원으로 일하다가 그녀를 암살한 이들도 시크교인이었다.* 

방글라 사히브에서는 종교나 인종에 관계없이 사원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매일 무료로 식사를 제공한다. 

황금색 돔이 빛나는 본당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구에서 물에 발을 적셔 씻은 다음, 신발과 양말을 벗고 남자건 여자건 두건으로 머리를 가리고 짐을 맡긴 후에야 입장이 가능하다. 본당 안에서는 화려하게 치장된 <그란트>에 극직한 예우를 바친다. 경을 읽는 사제와 헌금을 받는 사제, 찬가를 연주하는 악단들의 노래가 성전을 쩌렁쩌렁 울리는 가운데 정성껏 기도하는 신도들이 가득하다. <그란트>는 아침에는 화려하게 치장된 차양 아래 옥좌에 안치되고 저녁에는 성스러운 방으로 옮겨진다. 

본당 옆에는 성스러운 호수라는 사르오바르(Sarovar)가 있는데, 사람들은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는 이곳에서 몸을 씻기도 한다. 이 외에도 주방과 학교, 아트 갤러리 등이 경 내에 자리한다. 
 
*인디라 간디 암살 사건 | 1980년 인디라 간디는 지역 정당들을 탄압하며 권력을 공고히 하려고 했지만 분리주의 운동이 거세졌다. 특히 펀자브 지역 시크교도들의 반발이 컸는데 이들은 1984년 독립을 요구하며 암리차르(Amritsar)에 있는 시크교 본사인 황금사원 앞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때 군대를 앞세운 무력진압에 의해 400여 명의 시크교도들이 현장에서 사살됐고, 인디라 간디는 그해 10월 자신의 시크교인 경호원 3명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그 파장은 엄청나서 수상의 죽음으로 인해 델리에서만 시크교인 2,000명이 힌두교도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인도 내에서 시크교인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늘 소수에 속한다. 때문에 펀자브를 인도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어 인도 정부와 충돌을 빚기도 한다.
 
주소: Ashoka Rd, Connaught Place, Next to Grand Post Office, New Delhi 
전화: +91 112 334 0174 
운영시간: 24시간
요금: 무료
 
연꽃 형상의 바하이교 사원. 사원 내에서는 카메라 촬영이나 핸드폰 사용이 금지된다
사원을 나서는 여인. 1844년 인도에 들어온 바하이교는 인도인들 사이에서 조용히 자리 잡아 가고 있다
 
 
▶SCENE #3
바하이 사원 (Bahai Temple)
연꽃으로 형상화 한 신흥종교의 이상
 
인도 국민은 80%가 힌두교를 믿지만 타 종교의 문화적 영향력은 곳곳에 뚜렷이 남아있다. 특히 델리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시크교와 불교는 물론 신흥종교까지 혼재된 종교 문화의 단면을 압축해서 보여 준다. 

1844년 인도에 들어온 신흥종교 바하이교의 사원도 그중 하나다. 하얀 연꽃의 형상을 한 델리의 바하이 사원은 생소한 신흥종교에 대한 호기심에 아름다운 외관에 대한 흥미까지 더해져 여행자들을 불러 모은다. 캐나다 건축가인 파리보즈 사바(Fariborz Sahba)가 건축한 것으로 1980년부터 6년에 걸쳐 완성됐는데 웅장하면서도 우아하고 절제된 현대미를 갖고 있다. 34m 높이의 사원은 대리석으로 된 27개의 꽃잎이 9면으로 이뤄진 연꽃의 모양을 띠고 있고 9면의 기단이 물 위에 세워져 있어 마치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연꽃 사원(Lotus Temple)으로도 불린다. 

예배당에 들어갈 때 말소리를 내거나 카메라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철저한 안내 지시를 받고 입장했다. 내부는 둥그런 천장 아래 어떠한 형상도 없고 기도할 수 있는 긴 의자가 전부다.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나 자신의 신앙에 따라 기도할 수 있다. 

바하이교는 1864년 바하 울라(Baha Ullah)라는 이슬람교 지도자가 신의 계시자로 자처하면서 창시한 중동계 신흥종교다. 바하이교도들의 최대 과제는 전 지구적 차원의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는 것인데 종교통일, 세계평화, 인류교육, 남녀평등, 세계 공통어 제정 등을 강조한다. 미국에서 바하이교는 주로 지식계층을 중심으로 부유한 종교로 성장했다. 바하이국제공동체BIC는 유엔의 각종 국제대회에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 국제사회 현안문제의 실무적 협의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주소:  Lotus Temple Rd, Shambhu Dayal Bagh, Bahapur, Kalkaji, New Delhi
전화: +91 112 644 4029 
운영시간: 9:00~15:00(월요일 휴무)  
요금: 무료 
 
뉴델리의 랜드마크인 인디아 게이트
 

▶SCENE #4
인디아 게이트 (India Gate)
뉴델리의 랜드마크
 
뉴델리의 중심가는 ‘코노트 플레이스(Connaught Place)’다. 원형광장을 중심으로 도로와 건물들이 밀집된 이 구역은 1931년 영국의 뉴델리 도시계획 때 설계됐는데 상점과 정부관광국, 항공사, 은행, 외국 기업, 고급 레스토랑 등 편의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인디아 게이트는 여기에서 2.5km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이 문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영국령 인도 제국 군인들을 위해 1931년 영국이 세운 위령탑으로 마치 프랑스의 개선문과 비슷한 형태다. 

42m 높이의 아치에는 당시 전사한 7만여 명 인도군과 1919년 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전사한 1만3,300명 인도군, 그리고 일부 영국 장교와 군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인디아 게이트의 최초 이름은 ‘All India War Memorial’. 건축은 뉴델리 도시계획에 참여했던 영국 건축가 에드윈 루티언스Edwin Landseer Lutyens가 맡았다. 이곳에서 동서로는 라지파트Rajpath대로가 뻗어 대통령 궁, 국회의사당, 청부청사 등과 연결되며 매일 저녁 7시부터 9시30분 사이에는 인디아 게이트에 조명이 밝혀진다. 
 
주소: Rajpath, India Gate, New Delhi
운영시간: 24시간  
요금: 무료
 
 
글·사진 Travie writer 이세미 에디터 트래비 취재협조 아시아나항공 flya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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