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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와 대화하면 여행 다이어리를 쓰고 싶어진다

  • Editor. 고서령
  • 입력 2016.12.29 1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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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 꼭 깨끗한 새 다이어리를 하나쯤 갖고 싶다. 
앞으론 여행을 떠날 때마다 새 다이어리를 갖고 싶어질 것 같다. 
일러스트레이터 밥장, 그와 나눈 대화 때문이다.
 
여행 다이어리의 겉표지에는 현지에서 구한 스티커와 기념품을 붙였다. 카스테라 상자에 붙어 있던 스티커, 쇼핑몰에서 받은 ‘PRESS’ 종이 등을 붙여 무심한 듯 꾸민 것이 멋스럽다
 
찬 공기에 코가 빨개지던 겨울밤. 서울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밥장의 작업실 ‘믿는 구석’에 놀러 갔다. 작은 난로 하나면 금세 훈훈하게 데워질 정도로 아늑한 공간. 오디오에서 윈터플레이의 ‘세월이 가면’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머리 위에선 은빛 미러볼이 반짝이며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그날 모인 사람들은 책꽂이에 꽂힌 밥장의 여행 다이어리들을 뒤적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행 이야기를 나눴다. 레드와인이 몇 병이고 비워졌다. 

그날 이후로 여행 다이어리를 쓰고 싶어졌다. 밥장은 어떤 계기로 여행 다이어리를 쓰게 되었는지, 어떻게 하면 밥장의 것처럼 매력적인 여행 다이어리를 만들 수 있는지, 여행하면서 다이어리를 쓰면 여행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궁금한 것들이 한아름이었다. 그래서 며칠 뒤 ‘믿는 구석’을 다시 찾아가 밥장과 또 대화를 나눴다. 더더욱 여행 다이어리를 쓰고 싶어졌다.
 
여행 다이어리를 쓰면 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자기만의 특별한 책을 한 권 완성하게 된다
 
여행에선 아주 사소한 기억도 소중하니까

밥장은 지금처럼 여행을 많이 다니기 전부터 몰스킨(Moleskine) 다이어리를 좋아해 즐겨 사용했다. 처음 여행에 몰스킨 다이어리를 챙겨 간 것은 2008년쯤이다. 여행 중 받은 느낌을 몇 개의 그림과 짧은 메모로 남겼는데, 여행이 특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진을 찍는 것보다 다이어리에 펜으로 쓰고 그리는 것이 훨씬 기억에 많이 남더라고요. 손에 잡을 수 있는 추억이 생겼다는 것, 나만의 기록을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도 있고요.”

일본 기차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음먹고 여행 다이어리를 만들었다. 특별한 것을 기록하지는 않았다. 그날의 날씨, 아침·점심·저녁으로 먹은 것, 음식의 맛과 모양과 재료, 주변 사람들의 표정, 문득 떠오른 기억이나 생각 등. 여행의 순간순간 아주 사소한 것들을 기록했다. 기차 티켓, 입장권, 영수증부터 캔디 껍질, 아이스크림 껍질, 음식점 브로슈어 등 버릴 법한 것까지도 다이어리에 꼭꼭 붙이니 특별한 추억이 됐다. 현지 문구점에서 산 스티커도 붙이고, 틈틈이 손으로 찢어 오린 지도와 함께 여정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한 페이지도 만들었다. 그렇게 했더니 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근사한 한 권의 책이 탄생했다. 세상에 단 한 권밖에 없는, 자기만의 여행 다이어리. “여행에서 하는 경험들은 사소한 것도 특별하고 소중하게 느껴지잖아요. 그만큼 기록하고 싶은 것이 훨씬 많고. 경험이 특별하기 때문에 그 기록도 특별할 수밖에 없어요.”
 
 
●밥장의 다이어리로 본
일본 기차여행 이야기 
 
밥장은 지금까지 10여 권의 여행 다이어리를 만들었다. 일본 규슈 기차여행, 시코쿠 기차여행, 오키나와, 홋카이도, 중국 & 몽골베이징에서 울란바토르까지 가는 26시간 기차여행, 한·중·일 짬뽕 투어짬뽕이 어느 나라 음식인지 알아보기 위해 떠난 여행, 인도네시아, 아르헨티나, 에스토니아, 호주 퀸즈랜드, 오스트리아 비엔나 등을 여행하며 다이어리를 썼다. 다이어리들을 보면 그가 기차여행, 그중에서도 일본 기차여행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규슈 기차여행 일정을 지도와 함께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했다
 
 
BOB CHANG SAYS
기차여행을 좋아하는 이유요?
“일단은, 리듬감. 기차를 타고 있으면 철컹철컹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그 리듬이 마음을 굉장히 편안하게 해 줘요. 그 다음은 공간. 모든 교통수단 중에서 1인당 공간이 가장 넓은 것이 기차예요. 갇혀 있는 느낌인 비행기와 달리 항상 열려 있는 느낌이죠. 창밖 풍경도 감상할 수 있고 중간중간 쉬기도 하고, 그래서 오랜 시간을 타도 가장 덜 피곤해요. 상당히 장거리를 여행할 수 있고, 안전한 것도 장점이죠. 일본에는 굉장히 다양한 테마의 기차가 있어요. 각각의 캐릭터가 분명하기 때문에 매력 있어요.”
 
밥장이 시코쿠에서 꼭 먹어 봐야 할 음식으로 꼽는 ‘타이메시’에 대해 기록한 페이지
 
규슈 테마 관광열차 여행
“규슈 지역은 관광열차가 특히 잘 갖춰져 있어요. 후쿠오카, 나가사키 등 해안 지역뿐 아니라 내륙 산간지방을 천천히 통과하며 풍경을 감상하는 열차, 실제 옛날식 증기기관차를 체험할 수 있는 열차 등등. 그중에서 꼭 타 봐야 할 열차를 하나만 고르라면 ‘유후인노모리’예요. 고급 열차인데 레일패스를 이용해서 구매하면 많이 비싸지 않아요. 열차도 예쁘게 생겼고 내부 디테일도 아주 섬세해요. 열차가 지나는 구간의 숲 풍경도 아름답고요. 옛날식 증기기관차인 ‘SL 히토요시’와 일본 3대 차창 풍경을 볼 수 있는 ‘이사부로 신페이’도 강력 추천해요.”
 
호빵맨, 카레빵맨 스탬프와 사누키 우동 그림. 시코쿠 기차여행의 특징을 한눈에 보여 준다
호빵맨 열차를 탈 때 구입할 수 있는 호빵맨 도시락. 케이스를 기념품으로 챙겨 왔다
 
시코쿠 호빵맨 열차 타고 우동 투어
“일본 이름으로는 ‘앙팡맨’, 우리는 ‘호빵맨’으로 알고 있는 만화의 원작자가 시코쿠 출신이에요. 그래서 시코쿠에 가면 온통 호빵맨 캐릭터들로 꾸며진 호빵맨 열차를 탈 수 있어요. 기차역 빵집에서는 진짜 호빵맨, 식빵맨, 카레빵맨 모양 빵을 팔아요. 호빵맨 캐릭터 도시락통에 담긴 깜찍한 에키벤도 먹을 수 있고요. 이 열차를 타고 우동 투어를 하면 재미있어요. 시코쿠가 사누키 우동의 본고장이거든요. 이곳의 옛 지명이 사누키였죠. 시코쿠에서 꼭 먹어 봐야 할 또 한 가지 음식은 ‘타이메시’예요. 계란이 들어간 간장 소스에 도미 회와 해물을 넣고 섞은 다음 밥 위에 부어 먹는 음식인데, 정말 맛있어요.”
 
처음엔 다 같은 두께였지만 이것저것 붙일 것이 많은 일본 다이어리는 두툼해졌고, 붙일 것이 별로 없는 몽골이나 인도네시아 다이어리의 두께는 거의 변함이 없다
 

생각해서 기록하는 게 아니라, 기록하니까 생각하는 것

밥장은 여행을 한 번 갈 때마다 몰스킨 다이어리(라지 사이즈) 한 권을 가득 채우는 편이다. 여행만 하기에도 바쁠 텐데 어느 틈에 그걸 다 쓰는 걸까? 삶에 대한 성찰이 묻어나는 주옥같은 문장들은 또 언제 생각하는 걸까? “일단 카메라를 내려놓아야 돼요. 카메라로 뭘 자꾸 찍으려다 보면 생각할 시간이 없어요. 예쁜 피사체를 찾아다니느라 계속 이동하고, 다른 사람의 SNS에서 봤던 것을 따라 찍으려고 하니까요.”

반대로 글을 쓰고 스크랩을 하다 보면 생각이 정돈 되고 한공간에 오래 머물게 된다. 여행에 여유가 생긴다. 사진과 달리 남의 것을 따라하지 않고 자기만의 것을 자연스레 찾게 된다. 생각을 해서 기록하는 게 아니라, 기록하기 때문에 생각하게 된다. “사람이 낯선 곳에 가면 오감이 예민해져요. 같은 것을 봐도 예사롭지가 않아요. 그럴 때 무언가를 적거나 그리거나 하면 자기 안에 숨어 있던 감성이 올라오죠. 그렇게 기록을 남기다 보면 여행이 굉장히 풍성해졌다는 느낌을 받게 돼요.”

밥장이 여행 다이어리를 쓸 때의 원칙은, 절대 ‘나중’으로 미루지 않는 것이다. 나중으로 미루면 영영 하지 않게 된다는 걸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낮 동안 일정이 바빠 기록을 못했을 때엔 숙소에서 잠들기 전 시간을 활용한다. 숙소에서 맥주를 한 캔 마시며 다이어리를 쓰면 하루 동안의 여행이 정리도 되고 꽤 재미있다고. 
 
밥장의 작업실 ‘믿는 구석’에는 CD, 책,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다.
 
기록은 삶의 레이어를 쌓는 마법

밥장이 이렇게 열심히 여행 다이어리를 쓰는 이유는, 여행의 기록이 삶의 만족도를 높여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여행을 다닌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굵직한 일들 외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게 된다. 그런데 밥장처럼 여행 다이어리를 만들어 두면, 살짝 다이어리를 들춰 보는 것만으로 여행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맞아 맞아, 그때 여기에 갔었지, 날씨가 이랬지, 이걸 먹었는데 생각보다 비쌌어, 누굴 만나서 이런 대화를 나눴지…’ 하고 소소한 것들까지 기억하게 된다.

“사람들은 시간이 그냥 일렬로 쭉 간다고 생각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삶이 풍성해지기도 단조로워지기도 하죠. 삶의 레이어를 많이 쌓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업무를 하는 삶의 레이어가 있다면 사색하는 레이어도 있어야 하고, 여행이라는 레이어도 있어야 하죠. 그런 것들이 겹겹이 쌓여야 삶이 풍성해져요. 레이어를 쌓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기록이에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곧잘 잊어야 할 일은 잊지 못하고, 잊지 말아야 할 일들은 쉽게 잊지 않았던가. 새해엔 잊어야 할 일은 잊고, 잊지 말아야 할 일은 잘 기억할 수 있도록, 여행 다이어리를 써 볼까. 
 

●초심자를 위한 여행 다이어리 만들기 TIPS

TIP 1   처음이라면 특별한 이야기를 쓰려고 하지 말 것. 그냥 그날의 일정, 몇 시에 어디를 갔는지, 돈을 얼마 썼는지 등을 적다 보면 자연스럽게 감상이 커지고 쓰고 싶은 것들이 생긴다. 
TIP 2  다이어리 전체 페이지 수를 여행 일 수로 나눠서 하루에 사용할 페이지를 염두에 두고 쓰기. 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다이어리 마지막 페이지를 채울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만든 듯한 만족감 충만!
TIP 3   그림에 자신이 없다면? 전단지, 스티커, 티켓, 스탬프 등 아기자기한 꾸밀 거리가 많은 일본 여행부터 시작해 보기를 추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예쁜 다이어리를 완성할 수 있다.  그림은 작게 그리기 시작해 조금씩 크기를 키워 가는 방식으로 연습하면 실력을 키울 수 있다.
TIP 4   다이어리를 너무 빽빽하게 채우려 하지 말고 듬성듬성, 큼직큼직 여유 있게 쓰기. 
 
 
일본 Japan
일본은 문구와 디자인이 발달한 나라여서 꾸밀 거리가 많고 스크랩하기에도 매우 좋다. 어딜 가도 아기자기하고 밀도가 있어서 이야기도 풍부하다. 캔디 껍질, 아이스크림 껍질 같은 것도 예뻐서 꾸미기 재료가 된다.
 
 
아르헨티나 Argentina
지구 반대편의 남미는 모든 것이 낯설다. 설탕 봉지, 카페 냅킨, 식당 테이블에 깔아 주는 종이 등 아무것도 아닌 것을 붙여도 그곳의 느낌을 보여 주는 좋은 소품이 된다. 흔하게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사소한 것도 기록이 되고 의미가 있다.
 
 
인도네시아 Indonesia
발리처럼 관광지로 개발된 곳이 아니면 모든 것이 불편하고 힘들다. 정신없고 지저분하기도 하다. 그 속에서 기록할 만한 것을 잘 걸러 내야 한다. 이름, 가격, 요금 등 기본적인 정보도 부정확한 것이 많기 때문에 하나하나 더블체크하면서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록할 땐 힘들지만 완성하고 나면 다른 곳에서 구하기 힘든 귀한 자료가 된다.
 
 
 
●밥장이 쓰는 여행 다이어리 도구
 
Diary
다이어리는 몰스킨만을 고집한다. 몰스킨의 일반 플레인 노트는 종이가 얇기 때문에 내지에 이것저것 붙이기가 적합하지 않다. 여행 다이어리로는 종이가 두꺼운 스케치 전용 노트, 수채화 전용 노트, 일러스트 전용 노트를 주로 사용한다. 일본 기차여행 때는 종이가 쭉 이어져 있는 스타일이 기차와 닮은 ‘재패니즈 앨범’ 에디션을 사용했다. 검은색 하드커버, 라지 사이즈를 즐겨 쓴다.
 
Pen 
화방에 가면 라이너 계열의 펜이 두께별로 있다. 여러 번 덧칠해도 색이 잘 번지지 않는 펜이어서 좋다. 가장 즐겨 쓰는 브랜드는 ‘스테들러’. 연필도 꽤 좋은 도구다. 역설적으로 연필이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보존되는 기록 수단이다. 펜은 잉크 계열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나면 결국 색이 바랜다. 탄소 성분인 연필은 일부러 지우지 않는 한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Masking Tape
디자인 문구점에 가면 쉽게 살 수 있는 꾸미기용 종이테이프. 여행 중 다이어리에 영수증, 티켓, 전단지 등을 붙일 때 손으로 찢어 쓰면 되므로 아주 유용하다. 현지 문구점에서 구매해 사용하면 여행지의 느낌을 더 살릴 수 있다.
 
Paper Tablet 
최근엔 ‘페이퍼 태블릿’도 즐겨 쓴다. 몰스킨이 국내 회사와 합작해서 최신 기술을 접목해 만든 다이어리다. 전용 다이어리에 적외선 카메라와 블루투스 기능이 탑재된 전용 펜으로 기록하면, 다이어리에 쓴 내용이 몰스킨 어플리케이션에 전송되어 디지털로도 기록된다. 2015년에 출시됐다. 
 

글 고서령 기자  사진 Travie photographer 고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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