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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안고 달렸네, 카사도지마 트레일 레이스 30km

  • Editor. 장보영
  • 입력 2018.05.09 11:27
  • 수정 2018.05.24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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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까지 무사히 와 달라는 친구의 메시지에 걱정 말라는 답장을 마지막으로 보내고 휴대전화의 전원을 껐다. 땅에 닿을 듯 크고 깊은 숨이 쉬어졌다. 당분간 내가 찾을 사람도, 나를 찾을 사람도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의 한숨. 공항철도의 유리문에 비친 내 모습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지만 어느 때보다 지쳐 보였다. 배낭을 꾸려 어디론가 분주하게 오고가는 사람들 사이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카사도지마는 혼슈, 규슈, 시코쿠에 에워싸여 있는 세토 내해의 작은 섬이다
 
카사도지마에 찾아온 봄
 
 
2월 초순, 카사도지마(笠戸島)에 가기 위해 후쿠오카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후쿠오카공항에서 20분 정도 시내버스를 타고 하카타역까지, 그곳에서 신칸센을 타고 1시간 정도 더 이동해 이윽고 카사도지마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정오를 조금 지나 있었다. 아침 8시경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났는데 반나절도 안 되서 타국에 서 있다니, 꿈을 꾸다 깬 듯 어안이 벙벙했다.  

후쿠오카를 경유해 도착했지만 카사도지마의 행정구역상 위치가 규슈가 아닌 혼슈(本州)의 야마구치라는 사실은 나중에 지도를 보면서 알았다. 그러니까 카사도지마가 혼슈와 규슈 그리고 시코쿠에 에워싸여 있는 세토 내해*의 섬이라는 사실, 그래서 고대부터 일본과 중국과 한국을 잇는 해륙교통의 요충지였다는 사실. 카사도지마는 1970년 섬과 육지를 잇는 총 길이 160m가량의 카사도대교(笠戸大橋)가 개통되면서 본토와 연결됐고, 이제는 ‘섬 아닌 섬’이 되어 현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역전에서 카사도지마 아이슬란드 트레일 레이스의 대회장인 카사도지마 하이츠 리조트 호텔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배차 간격이 1시간이라 꽤 오랫동안 역전 정류장에 머물러 있었다. 공항에서부터 한두 방울 떨어졌던 빗방울이 갑자기 굵어지면서 정류장의 플라스틱 지붕을 때렸다. 그러는 동안 다음 열차를 타고 도착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정류장에 모여 들었다. 당장이라도 산에 갈 듯한 복장에 설렘 가득한 표정과 경계 없는 눈빛들, 알 수 있었다. 나와 목적지가 같은 이들이라는 걸. 그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나무 사이로 멀리 연륙교인 카사도대교가 보인다
 
*세토 내해(세토나이카이 瀬戸内海) | 혼슈섬과 규슈섬과 시코쿠섬 사이의 좁은 바다를 말한다. 야마구치현, 히로시마현, 오카야마현, 도쿠시마현, 후쿠오카현, 오이타현 등이 세토 내해와 접한다. 이 내해 안에는 카사도지마를 비롯한 3,000여 개의 크고 작은 섬이 있으며 그중 아와지섬이 가장 크다.
 
부둣가의 작은 마을들을 통과한다
 
산사에서 만난 오미쿠지(길흉을 점치기 위해 뽑는 쪽지) 
 
섬에 켜켜이 쌓인 시간 
 
카사도지마의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해상산책길 
 
 
●숨어 있는 섬

‘카사도지마 아이슬란드 트레일 레이스(Kasadojima Island Trail Race)’는 매년 2월 카사도지마에서 개최되는 일본의 등산경주 대회로 18km와 30km 부문에 총 1,000여 명의 선수들이 출전해 성황을 이룬다. 대회를 총괄하는 슌스케 오쿠노미야는 지난 10여 년 동안 일본을 비롯한 해외 유수의 대회에서 활약해 온 유명 트레일 러너다. 중학교 때부터 달리기를 했지만 등산경주에 전력을 쏟은 계기는 25세 때 앓았던 심장 통증 때문이라고 한다. 

회복 후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어 달리기 시작한 그는 2015년 일본 최고 권위의 하세츠네 산악경주 대회에서 우승한 바로 그해를 기점으로 이 분야의 대중화를 위해 펀트레일스(FunTrails)라는 아웃도어 이벤트 회사를 설립했고, 그와 내가 맺은 인연 또한 그즈음으로 거슬러 오른다. 일본의 산에 대해 검색하던 중 도쿄 근교의 하나마가리산을 알게 됐는데 그곳에서 마침 일반인 대상의 등산경주 세미나를 진행한다는 공지를 발견한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산악 활동이 궁금했던 나는 그에게 메일을 보냈고 며칠 뒤 그와 만났다. 

대회가 열리는 카사도지마는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초승달 모양의 30km 하이킹 코스로, 대회가 개최되기 훨씬 전부터 등산과 하이킹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관광 명소였다. 해발 200m의 구릉성 산지들을 넘나들며 7개 포구와 곶을 웃돌아 원점 회귀한다. 그 섬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그 섬의 산에 올라가야 한다. 

오전 8시, 카운트다운과 함께 길이 열렸다. ‘잘 다녀오세요(이테라샤이, いってらっしゃい)’라고 거듭해서 외치는 사회자의 목소리와 멀어지면서 서서히 언덕으로 향했다. 오르면 오를수록 등 뒤로 카사도지마 앞바다가 커다랗게 차올랐다. 그 청량함에 감탄할 새도 없이 눈앞은 첩첩산중. 1km도 달리지 않았는데 비 오듯 땀이 쏟아졌다. 멈춰 서서 재킷을 벗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쉬지 않고 지나갔다.  
 
 
해발 200m의 구릉성 산지를 오르내리는 카사도지마 트레일
 
깊고 긴 대나무숲을 달린다
 
일상의 작은 축제

어둡고 긴 대나무 숲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깊은 독 안으로 뛰어드는 푸른 개구리처럼 잽싸고도 과감하게 앞으로 쏟아졌다. 전날 오후에 내린 비 때문에 여기저기 짓이겨진 산길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보니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고 그럴수록 제동이 걸리면서 속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산길에서 원하는 몸짓으로 자연스럽게 달리려면 온몸에 힘을 빼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쉽지 않다. 

어느덧 18km 지점. 반 넘게 왔다. 이제 방향을 바꿔 처음 왔던 곳을 향해 돌아갈 일만 남았다. 산을 오르내리는 동안 부둣가의 오래된 마을들을 통과하면서 주민들의 기꺼운 환대와 응원을 받았다. 그들이 건네주는 시원한 물 한 잔, 주먹밥 한 덩이가 내 몸 어딘가에 저장되어 살아가는 동안 불쑥 힘이 되어 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생의 에너지를 비축이라도 하듯 나는 꾸역꾸역 밥을 삼키고 또 삼켰다. 

넘어질 듯 비좁고 위태로운 길 위에서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들, 그리고 역시 그들과 닮은 모습으로 달리고 있는 나. 부단히 나아가는 그 순간에도 자연에서의 시간만큼은 좀 덜 치열하고 좀 더 편안하게 흘러가기를 바랐다. 

둑 위를 달리며 바라본 바다의 아름다움은 스칠 듯 아름다웠지만 눈 안 가득 담아내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다. 출발했던 해상산책길로 다시 이어지며 마지막 남은 1km를 혼신을 다해 달렸다. 30km, 4시간 30분의 질주. 많은 사람들이 스쳐갔고 스쳐갈 결승선에 잠시 서서 하늘을 향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 시간이 소중한 이유에 대해 아무래도 나는 ‘끝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작이 있고 중간이 있고 끝이 있는, 힘들면 걷기도 하고 때로는 쉬기도 하고 때로는 사력을 다해 달려 보기도 하는 일상의 이 작은 축제는 마치 인생의 축소판과 같아서 사뭇 진지하게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 거대하고 버겁게만 여겨지던 삶이 조금은 가벼워지고 만만해진다. 그건 아마 앞으로도 내가 달릴 이유가 될 것 같다. 
 
카사도지마 가는 길 | 후쿠오카공항 2번 정류장에서 하카타역을 경유하는 버스를 탄다. 약 20분 소요. 하타카역에서 하차한 후 도쿄 방면 신칸센을 타고 도쿠야마역(徳山駅)까지 이동한다. 약 45분 소요. 도쿠야마역에서 이와쿠니 방면 산요 본선으로 환승한 후 구다마츠역(下松).에서 하차한다. 20분 소요. 구다마츠역에서 카사도지마로 들어가는 버스를 탄다. 총 비용 7,000엔 예상.
 
카사도지마 트레일 | 카사도지마는 야마구치현 구다마츠시의 대표 관광 명소다. 크게 북부의 혼우라(本浦), 중앙부의 에노우라(江の浦), 남부의 후카우라(深浦) 3개 지구 총 12개 마을로 이뤄져 있다. ‘카사도지마 트레일’은 섬을 한 바퀴 완주할 수 있는 30km 하이킹 코스로 걷는 내내 카사도지마의 산지, 바다, 포구, 곶, 해안, 마을이 선사하는 아름다움과 두루 만날 수 있다. 
 
*글을 쓴 장보영은 2011년 네팔과 인도 히말라야에서 반년을 보내고 월간 <사람과 산>에 입사해 산악기자로 20대를 보냈다. 현재는 매거진 <PAPER>와 월간 <해피투데이>의 에디터로 지내며 일상 속 빛과 그림자를 마주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purnare

글 장보영  사진 쇼 후지마키(Sho Fujimaki)  에디터 천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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