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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수수한 팔라완으로 지금 떠날 이유

  • Editor. 김진
  • 입력 2018.09.04 15:28
  • 수정 2018.09.05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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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있던 곳’에 대한 그리움이 솟아난다. 
마음을 억누르던 노여움도 누그러진다. 
지금, 수수한 팔라완으로 떠나야 할 이유다. 

카우리섬에 나란히 늘어선 야자수 삼형제
카우리섬에 나란히 늘어선 야자수 삼형제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은 늘 극도의 흥분으로 가득하다. 짓누르고 있던 억압을 땅에 내려놓는 기분이랄까. 몸과 마음이 지쳐 있을 때였다. 팔라완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단잠에 빠졌다. 4시간이 금세 지나고 푸에르토 프린세사에 닿았다. 국제공항답지 않게 소박한 공항은 수속이 빨랐다. 짐을 끌고 나오니 후끈하고 축축한 공기가 폐 속으로 훅 들어왔다. 열대의 향기다. 


“지금은 우기입니다. 언제 어떻게 폭우가 내릴지 모르고요, 경우에 따라서 해양 스포츠는 취소될 수도 있습니다.” 공기의 밀도는 무척 높았고 하늘은 당장이라도 비를 퍼부을 표정을 하고 있었다. 행여 바다 여행을 망칠까, 인솔자의 말에 조마조마했지만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다. 점심식사를 하러 들어간 레스토랑은 강 위에 떠 있는 형태였는데, 포크를 들자마자 맹그로브 나무가 무성한 강 위로 굵은 빗줄기가 수직으로 꽂히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동남아의 우기였다. 

이와힉강을 가득 채운 맹그로브 숲
이와힉강을 가득 채운 맹그로브 숲

푸에르토 프린세사(Puerto Princesa)는 필리핀 팔라완섬의 주도다. 올 6월까지만 해도 마닐라를 경유해 비행기로 1시간 반 남짓 날아가야만 했지만, 이제는 인천과 부산에 직항편이 생겨 한번에 갈 수 있는 여행지가 됐다. 푸에르토 프린세사는 항구를 뜻하는 ‘푸에르토(Puerto)’와 공주를 뜻하는 ‘프린세사(Princesa)’가 합쳐진 말이다. 공주님 항구라, 그 연유를 물으니 1864년 태어난 공주(Princess Asuncion)를 기념해 지어졌던 이름이란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지배했던 시절, 이사벨라 여왕 2세(Queen Isabella II)의 딸 탄생을 기념해 항구에 공주의 이름인 아순시온(Princess Asuncion)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이후 공주가 죽자 여왕은 항구 이름을 푸에르토 델 라 프린세사(Puerto de la Princesa)로 바꿨다. 그리고 결국 오늘날의 푸에르토 프린세사로 줄여 불리게 됐다고. 황량한 땅에 빌딩들이 듬성듬성 올라오고 있는 푸에르토 프린세사는 각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서서히 늘어나는 추세다. 다시 ‘공주’로 신분 상승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베이워크 야시장엔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베이워크 야시장엔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강 위를 수놓던 빛


밤이 내렸다. 베이워크 반딧불이 투어(Baywalk Firefly Tour)를 떠날 시간이다. 반딧불이 서식지는 강 한가운데 울창한 맹그로브 숲이다. 배가 출발하는 시간까지 강을 따라 늘어선 야시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푸에르토 프린세사에서 가장 내세울 만한 시장이라는 베이워크 야시장은 너무나 소박했다. 아무리 천천히 둘러봐도 30분이면 충분했고 호객행위도 없었다. 팔라완섬에 전기 공급이 충분치 않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특히나 시장은 더 어두웠다. 비에 젖은 땅은 질퍽거렸고 발가락 사이에 진흙이 가득 끼었다. 현지 분위기 속에 강바람을 맞으며 걷는 기분이 꽤 괜찮았다. 레스토랑 앞에서는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호객 행위를 대신했고, 물고기 굽는 냄새에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악어고기도 팔았다. 악어보호소를 운영할 정도로 악어 보호에 앞장선다는 팔라완이 악어고기로 유명하다는 건 꽤 의아한 일이지만, 기왕 왔으니 맛을 봐야지. 악어고기는 닭고기의 식감과 거의 비슷했지만 무척 짰다. 부화되기 직전의 달걀을 삶은 요리, 발롯(곤계란) 앞은 구경하려는 외국인들의 발길로 북적였다.

연인이나 가족 단위로 나들이 오기 좋은 베이워크 야시장
연인이나 가족 단위로 나들이 오기 좋은 베이워크 야시장

반딧불이 투어가 시작됐다. 우리를 태운 배는 맹그로브 숲 사이를 가로질렀다. 배의 속도가 의외로 빨라 사진을 도저히 남길 수가 없었지만 그래서 기억에 더 또렷하게 남았다.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에 매달린 자잘한 노란 전구들처럼 반짝반짝. 이슬을 먹고 사는 반딧불이의 배 쪽 노란 부분이 산소와 만나 빛을 내는데 수컷은 2개, 암컷은 1개의 빛을 낸다. 가이드가 랜턴으로 맹그로브 나무를 비추고 “반딧불!”이라고 소리를 지르니 화르르 하고 반딧불이들이 노란 빛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탄성을 지를 만큼 환상적인 순간이었지만, 폭우 때문에 평상시의 10분의 1 수준으로 빛난 거란다.


팔라완엔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달빛, 별빛, 반딧불이. 여기서 이제 한 가지를 추가해야겠다. 뭍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이드는 대야에 강물을 가득 담아 우리에게 내밀었다. 손을 저으니 초록 플랑크톤이 은하수 같은 불꽃을 터뜨리며 빛났다.  

물놀이 후 마시는 야자수 한 모금은 꿀맛
물놀이 후 마시는 야자수 한 모금은 꿀맛

 

●바다, 무인도의 맛


팔라완에서 바다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법. 10여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뤄진 혼다 베이(Honda Bay)는 스페인어로 ‘깊다’라는 뜻을 가진 ‘온도(Hondo)’에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 혼다 베이의 섬에선 수영할 수 있는 곳이 정해져 있다. 파도가 잔잔하고 바닥이 투명해서 바다가 낮아 보이지만, 조금만 멀리 나가도 바다 속에 높은 절벽이 있기 때문이다.  

스노클링 투어의 시작, 카우리섬
스노클링 투어의 시작, 카우리섬

혼다 베이 호핑투어는 다른 지역의 호핑투어와는 조금 다르다. 바다 위의 스노클링 포인트를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필리핀 전통 배인 방카(Banca)를 타고 서너 개의 무인도를 돌아다니는 식이다. 첫 번째 포인트인 카우리섬(Cowrie Island)은 ‘바다달팽이’라는 뜻처럼 작고 동그랗게 생겼다. 작은 매점과 야자수 잎을 얹어 만든 원두막 몇 개만이 여행자를 반긴다. 물고기는 많지 않지만 바다가 얕고 잔잔해서 수영하기에 좋다. 따뜻한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잘 익은 야자수의 수액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하얀 속살을 스푼으로 벅벅 긁어 먹고 나니, 그제서야 열대나라에 왔음이 실감이 났다. 


두 번째 목적지는 바다 위 스노클링 포인트. 수영실력이 없다면 공포를 느낄 수도 있을 만큼 깊은 바다다. 형형색색의 산호초 사이로 빨주노초파남보 열대어들이 가득했다. 빵부스러기를 담은 손을 펼치자 물고기들이 무섭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스노클링 장비도 벗어던진 채 잠수를 해 물밑으로 내려가니 대왕조개가 뻐끔뻐끔 숨을 쉬고 있었다. 수많은 해초들이 풍선 인형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루리섬의 모래는 무척 곱다. 해변을 산책하다 보면 예쁜 모래성을 마주칠 수 있다
루리섬의 모래는 무척 곱다. 해변을 산책하다 보면 예쁜 모래성을 마주칠 수 있다

 

마지막 목적지는 가장 한적하고 너른 해변을 가진 루리섬(Luli Island). 다이빙 포인트에서 두려움과 도전에 맞서는 사람들이 바다를 향해 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바다에서 놀다 지칠 때가 되자 식당에서 라면 냄새가 풍겨 왔다. 팔라완의 무인도에서 흠뻑 젖은 몸으로 후후 불며 먹는 해물라면은 어느 겨울 설산에서 마셨던 믹스커피만큼이나 맛있는 추억으로 남았다. 

곧게 뻗은 야자수는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곧게 뻗은 야자수는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원시자연 속으로의 탐험


팔라완의 원시적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코 푸에르토 프린세사의 지하강(Underground River)이다. 남중국해를 마주한 사방(Sabang) 비치 바로 옆 선착장에서 지하강 투어를 시작했다. 엔진 소리가 요란한 배로 20분을 달렸다. 귀가 멍멍한 채로 내리니 곧 숲길이 이어졌다. 원숭이와 도마뱀 같은 야생동물을 구경하며 5분 정도 걸어가다 보니 석회암 동굴과 절벽이 절경을 이루는 지하강 입구에 도착했다. 원래는 바닥이 보일 정도로 투명한 강물이지만 밤새 비가 많이 내려 탁한 누런색을 띤 것이 아쉬웠다. 좁고 긴 패들보트에 올라 한국어 설명이 탑재된 오디오 장비를 착용하고 동굴로 진입했다. 

우기라서 물이 누렇게 변했지만 지하강은 무척 맑고 영롱하다
우기라서 물이 누렇게 변했지만 지하강은 무척 맑고 영롱하다

“푸에르토 프린세사 지하 동굴은 1999년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석회암 동굴과 대리석 절벽 사이에 수정처럼 맑은 강물이 흐르는데 그 길이는 8km나 되지만 안전상의 문제로 관광객이 들어갈 수 있는 거리는 2km가 채 되지 않습니다.” 

현지인 사공의 안내에 따라 강을 탄다
현지인 사공의 안내에 따라 강을 탄다

또박또박 한국어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동굴 속 탐험을 시작했다. 머리 위엔 박쥐 떼가 소리를 내며 날아다녔다. 동굴에서 입을 벌리면 박쥐 똥이 입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 입을 절대 벌리지 말라고 가이드는 조언했다. 마스크를 쓰기는 했지만 정말 큼큼한 냄새가 났다. 오랜 세월은 동굴 속에 기기묘묘한 종유석과 석순을 만들어 냈다. 거기에 인간의 상상력을 더해 여인상, 버섯상, 말바위, 사자상, 양초바위 등 갖가지 이름을 붙였다. 1시간은 훌쩍 지났다. 

 

●팔라완에 남은 뜻밖의 여운


푸에르토 프린세사 시내에서 차로 한 시간. 푸른 초원을 따라 달리니 마치 컨트리클럽과도 비슷한 분위기의 마을이 나타났다. 총으로 무장한 경찰의 심문은 무척 짧고 형식적이다. 일행이 탄 버스 내부를 쓱 둘러보고 나가더니 교도소 입장을 흔쾌히 허락해 줬다. 소와 닭, 개 등 동물들이 초원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장면은 전형적인 필리핀 시골 마을의 모습이었다. 

이와힉 교도소 재소자들이 직접 만든 수공예품

담장이 없는 교도소, 세계 최대의 오픈형 교도소로 알려진 이와힉 교도소(Iwahig Prison and Penal Farm)는 1904년 미국 식민지 시대부터 시작됐다. 넓이만 여의도의 30배에 달하는데, 관계자에 따르면 크기가 워낙 광대해서 철조망이나 담장을 칠 수 없을 정도라고. 세 개의 강과 이름 없는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교도소는 무척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지만 강간범과 살인범 등 흉악 범죄를 일으킨 남성 죄수 3,000여 명이 지내고 있다는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곧 선입견은 완전히 무너졌다. 예닐곱 명으로 구성된 청년 재소자 댄스 팀이 운동장에 모여 싸이의 ‘젠틀맨’, ‘강남스타일’, 모모랜드의 ‘뿜뿜’ 등 노래에 맞춰 신나게 웰컴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교도소 안에 아이들을 위한 아담한 학교가 마련돼 있다
교도소 안에 아이들을 위한 아담한 학교가 마련돼 있다
팀을 이룬 청년 재소자들의 신나는 댄스 공연
팀을 이룬 청년 재소자들의 신나는 댄스 공연

교도소 안에는 학교, 성당, 가게 등 사는 데 필요한 기본 시설이 마련돼 있다. 교도소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죄수들이 농사를 짓거나 수공예품 등을 만들어 팔아 운영되므로 스스로 생산 활동을 한다. 심지어 죄수복도 제공되지 않는다. 형량을 마칠 때까지 정해진 색깔의 티셔츠만 입어야 하며 죄수복은 죄수들이 각자 알아서 사 입어야 한다. 교도소를 둘러보던 중에 닭 한 마리를 마치 소중한 강아지처럼 안고 있는 한 죄수를 만났다. 관심을 보였더니 그는 내게 닭을 건네주었다. 그것이 생애 처음으로 죄수와 나눈 소통이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막상 떠나는 버스에 오르자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올라왔다. 무심한 동공과 마른 몸, 목선이 다 해진 황토색 티셔츠를 입고 있던 그는 카메라 속에 남았다. 닭을 안고서, 그는 무엇을 꿈꾸고 있었을까? 자연과 고급 리조트로만 주로 팔라완을 떠올렸던 탓일까. 유독 많은 여운과 의문이 남았다.  

이와힉 교도소  
주소: Bureau of Corrections, Bgy Iwahig, 5300 Puerto Princesa City Palawan, Philippines  
홈페이지: iwahigprisonpenalfarm.simplesite.com

▶travel  info

AIRLINE
필리핀항공이 10월27일까지 인천과 부산 두 곳에서 팔라완 푸에르토 프린세사로 가는 직항편을 매일 운항한다. 투입되는 항공기는 199석 규모의 에어버스 A321. 인천에서 팔라완까지는 4시간, 부산에서 팔라완까지는 4시간 30분 남짓 걸린다. 


ATTRACTION
악어농장 Crocodile Farm

정식명칭은 야생동물 보호센터(Wildlife and Rescue Center). 단순히 악어를 보여 주는 곳이 아니라 악어를 비롯한 다양한 야생동물을 구조하고 치료, 보호하는 곳이다. 뱀과 악어를 직접 만지고 함께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오픈: 매일 08:00~16:30
주소: Puerto Princesa South Road, Puerto Princesa, Palawan, Philippines

악어농장 Crocodile Farm

비누아탄 수공예품 제작소 Binuatan Creations
베틀을 이용해 바나나 잎 등으로 만든 섬유를 짜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수공예 가방과 지갑 등 기념품으로 살 만한 제품이 무척 다양하다. 커다란 여성용 숄더백은 2만원 내외, 심지어 1,000원도 안 되는 소품도 많다. 
오픈: 매일 07:00~18:00
주소: Puerto Princesa South Road, Puerto Princesa, 5300 Palawan, Philippines
전화: +63 48 433 7630

비누아탄 수공예품 제작소 Binuatan Creations

HOTEL
쉐리단 비치 리조트 Sheridan Beach Resort and Spa

푸에르토 프린세사에서 유일하게 오션 뷰를 누릴 수 있는 곳이다. 호텔에서는 카누를 무료로 대여해 준다. 가장 큰 장점이라면, 지하강 투어 선착장이 리조트 바로 옆에 있다는 점. 넓은 야외 수영장과 풀사이드 바, 컨퍼런스 룸, 키즈클럽 등 부대시설도 완벽하다. 
주소: Sabang Beach, Cabayugan, Puerto Princesa, Palawan, Philippines
홈페이지: www.sheridanbeachresort.com/ko
전화: +63 32 236 1001

쉐리단 비치 리조트 Sheridan Beach Resort and Spa

 

휴 호텔 Hue Hotel
팔라완에서 쇼핑하기 가장 좋은 곳으로 알려진 로빈슨몰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공항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어 이동도 편리하다. 무엇보다 루프톱 인피니티 풀은 휴 호텔의 최대 자랑거리.  
주소: Km. 3 Puerto Princesa North Road, Brgy. San Manuel, Puerto Princesa City, 5300 Palawan, Philippines
홈페이지: thehuehotel.com/puertoprincesa
전화: +63 48 717 88 88

휴 호텔 Hue Hotel

 

글·사진 김진  에디터 김예지 기자
취재협조 필리핀항공 1544 1717, www.philippineai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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