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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아프리카는 여전히 젊다오

  • Editor. 홍경찬
  • 입력 2019.03.04 09:05
  • 수정 2019.03.05 11:1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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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이마라 국립공원 내 물 소떼
마사이마라 국립공원 내 물 소떼

 

●Dear Karen


지난 가을 동부 아프리카 케냐와 탄자니아, 잔지바르를 다녀왔소. 열흘간 다녀온 낯선 대륙의 시공간은 정말 아름다웠소. 케냐 나이바샤 호수의 초승달 섬 위로 나는 홍학떼는 당신과 데니스가 경비행기를 타고 바라본 바로 그 장면이었고,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에서 날것의 야생을 만날 수 있었소. 벌룬을 타고 하늘 위에서 본 아프리카의 장엄한 일출은 잊을 수가 없다오. 킬리만자로에서는 찬란한 빛의 윤슬을 경험했다오. 카렌, 100년 전 아프리카도 이렇게 생동하는 에너지가 넘쳤소? 아프리카에서는 매 순간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오. 아 참, 그 두근거림이 터스커(Tusker) 맥주를 곁들인 한낮의 아득함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믿어 주시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당신의 흔적을 찾아봤소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Nairobi)는 여행자들이 꽤 많아서 붐볐다오. 나는 응공 언덕(Ngong Hill)이 올려다 보이는 무덤 인근을 먼저 찾아갔다오. 거기에 당신의 연인 데니스가 잠들어 있으니 말이오. 그가 비행기 사고로 죽지 않았다면 당신도 덴마크로 돌아가지 않았을지, 우리 인생이 어디에서 불시착하게 될지, 누가 알 수 있겠소. ‘카렌의 집’에서는 데니스가 당신의 머리를 감겨 줄 때 썼던 하얀 물주전자와 수반은 물론이고 거울, 침대, 빛바랜 사진 등에서도 당신의 체취가 느껴졌다오. 


‘카렌의 집’ 입구에선 어느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소. 대지의 원색 위에 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었고, 말갛게 가라앉는 일몰과 겹쳐지는 빨간 옷의 인물들이 보였소. 멀리 길 떠나는 마사이 부족 같았는데, 그들을 응원하는 화가의 마음이 보이는 그림이었소. 당신도 그렇게 함께 지냈던 아프리카의 사람들의 편에서 많은 것을 나누었던 것이 기억나오.


나이바샤(Nasivasha) 호수의 새 무리와 마주쳤을 땐 정말 당신과 같은 장면을 보고 있다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소. 호수 위의 초승달 섬은 초식동물들이 모여 사는 우주 같았소. 공기는 맑고 청명했고 구름은 지상에 작은 그늘 하나를 내주었다가 거둬들이기를 반복했다오. 


나이바샤 호수에 가기 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협곡인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동아프리카 지구대)를 보았소. 중동의 요르단강에서 모잠비크까지 동아프리카 전체를 가로지르는 이 거대한 골짜기는 자꾸만 깊어지고 있어서 1,000년 후에는 이스라엘 사해까지 연결될 수도 있다고 하오. 하지만 정작 1,000년을 산다 해도 협곡을 볼 수는 없다는구려.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높아져 에티오피아나 소말리아도 마다가스카르처럼 섬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거요. 그 시간을 늦추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지금 내가 있는 아프리카보다 조금 더 높았을 100년 전의 아프리카 대륙을 알고 있는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구려. 

마사이마라 코끼리떼
마사이마라 코끼리떼

나록(Narok)은 나이로비와 마사이마라(Masai Mara) 국립공원 중간에 위치한 도시라오. 마을 주민들의 표정이 여유로워 보였는데, 덕분에 덩달아 느긋한 기분으로 길가에 내어놓은 채소와 과일, 운동화와 옷감, 생필품 판매장 등을 3시간 정도 구경했다오. 나록을 떠나 마사이마라 쪽으로 이동할수록 중국 글자가 자주 눈에 띄었고 시멘트 공장과 철도를 놓는 일꾼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소. 나록-세케나니(Narok-Sekenani) 사이의 도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소. 포장된 구간을 벗어나 시속 80km 이상으로 달리니 흙먼지가 우리를 맹렬히 따라오더이다. ‘드라이빙 사파리(Driving Safari)’를 위해 서둘렀지만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마사이마라 국립공원 정문을 통과했고, 다시 한 시간여를 달려서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해가 지고 있었소. 그래도 늦은 것은 아니었다오. 해가 지고 나면 동물들은 더욱 활발해지기 때문이오. 어둠에 사위가 무너지기 전까지 열심히 사자와 표범과 기린과 얼룩말들을 찾아다녔다오. 

마사이마라(Masaimara) 국립공원의 여명
마사이마라(Masaimara) 국립공원의 여명

 

●‘위대한 리턴’을 기억하시오?


이튿날에는 새벽 4시에 숙소를 떠났다오. 무려 700여 만 마리에 이르는 마사이마라 아프리카 물소떼가 이동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오. 열기구가 떠오를 때 즈음엔 동방에서 떠오르는 금빛 여명이 들판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소. ‘스카이 사파리(Sky Safari)’가 시작되자 열기구는 아프리카 물소떼를 찾아 최대한 고도를 낮추고 서서히 비행했다오. 떠오르는 해의 축복을 받으며 바람이 데려다 주는 우주여행을 하는 기분이었소. 700여 만 마리의 물소떼가 만들어 내는 ‘위대한 리턴’의 목격자로서 말이요. 아프리카 물소떼는 탄자 니아와 케냐를 오가는데 12~5월엔 케냐를 향해 이동하고, 7~10월엔 탄자니아로 다시 이동한다오. 이 물소떼를 노리는 야생의 동물들도 덩달아 이동한다는데, 이날의 비행에선 새벽녘 허기를 채우러 나선 사자까지는 보지 못했소.

마사이마라 국립공원, 벌룬에서 보는 조랑말
마사이마라 국립공원, 벌룬에서 보는 조랑말

●킬리만자로는 빛의 윤슬이었다오


아프리카 대륙 최고봉, 킬리만자로(Kilimanjaro) 우후루(Uhuru Peak, 해발 5,895m)로 향하는 모든 길은 모두 빛의 윤슬이었소. 마랑구(Marangu Route, 해발 1,970m) 게이트 초입을 통과하자 내리쬐는 햇볕에 녹음이 우거져 초록이 연두에 물드는 꽃길이 이어졌소. 숲속 녹음이 코발트블루 임계점에 다다른 듯 완만하게 펼쳐져 있어 빛의 산행이었소. 밤에는 킬리만자로의 별 윤슬로 이어졌다오. 우리 산행의 목적지는 만다라산장(Mandara Hut, 해발 2,720m). 3시간을 걸어야 닿을 수 있는 거리였소. 해가 저무는 만다라 산장은 검붉었고 구름빛도 일몰에 반사됐다오. 짙은 어둠의 시간에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의 향연이 정녕 킬리만자로 산행의 백미였다오. 선명한 별들의 합창이 지금도 기억나오. 

킬리만자로 일출
킬리만자로 일출

다음날 여명이 오기 전, 적도를 향해 붉은 핏빛을 토해 내는 말간 해를 보기 위해 산을 올랐다오. 가이드가 정해 준 일출 관람 지점에 닿자 분홍색과 보랏빛을 오가는 공기입자가 검붉어지더니 이내 만추처럼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는 듯했다오. 새벽을 가득 채운 건 적도를 훑는 빛이었고 숨을 들이쉬자 입속으로 고여 든 빛이, 숨을 내쉬자 코로 빠져 나가더군요. 일출은 그 모든 빛을 흡수해서 보란 듯이 붉은 핏빛을 적도에 토해 내는 오케스트라 연주의 대미 같았소. 킬리만자로 동쪽 여명에 처녀자리 스피카 별이 사라지면 검은 대륙에 우뚝 솟은 만년설산 우후루의 주봉이 선명해졌다오. 산에서 바라본 일몰과 일출은 10월에서도 싱그러운 아프리카의 초록과 함께 내 가슴 속에 깊이 새겨졌소.

킬리만자로 산행길
킬리만자로 산행길

●죽음의 바다에서 행운의 바다로


탄자니아의 자치령인 잔지바르섬은 아프리카의 흑진주라 불리는데, 퀸(Queen)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 1946~1991년)가 태어난 곳이라오.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가 큰 인기를 끌어서 더 눈여겨보게 된 곳이오. 아프리카 대륙의 동쪽 인도양 해상에 위치한 이 섬의 사람들은 대항해시대의 400년간 인도양을 거쳐 아랍과 유럽의 노예로 끌려갔다오.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그 당시에 사람들은 죽음의 바다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라오. 지금은 많은 것이 변했소. 현재의 잔지바르는 하얀 아프리카의 섬낙원이라고 불리며, 여행자들이 가장 가 보고 싶은 섬으로 꼽는 관광지가 되었다오. 잔지바르의 부속섬인 창구섬(Changuu Island)에서는 마치 행운처럼 인도양에 몸을 적시는 수영을 할 수 있었고, 전통시장에서는 섬 주민들과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었소.  

잔지바르(Zanzibar)의 부속섬인 창구섬
잔지바르(Zanzibar)의 부속섬인 창구섬

●굿바이 카렌


아프리카에 가기 전 아이들을 만나면 주려고 볼펜을 좀 챙겨 갔었소. 시간을 쪼개서 마사이마라 초등학교 정문 앞에 차를 세우고 아이들에게 두 자루씩 나눠 주었다오. 그 옛날 당신도 키큐유(Kikuyu) 부족장에게 이곳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을 시켜 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소. 내 기분인지는 모르지만 운전사가 “Thank you, so much”라고 말할 때 ‘so much’를 무척 분명하게 발음하는 것 같았소. 작은 선물이었지만 볼펜을 받아 든 학생들의 신이 난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오. 카렌, 당신이 소설로 전해 준 도전적인 삶, 아프리카 원주민을 향한 연민과 인권에 대한 생각들, 아프리카의 대자연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여전히 생생한 유산이라오. 그 유산을 간직한 채 찾아온 열흘간의 아프리카 여행. 여행이 끝나고 나서도 이 대륙을 떠나는 일이 무척이나 힘들었소. 다시 한번 더 아프리카를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저 없이 당신이 있었던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배경지로 더 깊숙이 가 보고 싶구려. 당신이 전해준 모든 이야기에 감사하오. 
굿바이 카렌.  

 

*카렌 블릭센(Karen Blixen, 1885~1962년)은 덴마크의 소설가다. 17년간 아프리카 케냐에서 커피 농장을 운영했던 경험을 자전적 소설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에 기록했으며 1985년에 시드니 폴락 감독, 로버트 레드포드(데니스 役), 메릴 스트립(카렌 役)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성공을 거뒀다.

*홍경찬 작가는 출항해녀의 아들이자, 저서 <뭍으로 간 해녀>를 통해 제주 출항해녀의 삶을 재조명했다. 현재 촬영 중인 영화 <비진반점>의 제작자를 맡고 있다. 이번 아프리카 여행기는 소설가 카렌 블릭센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빌렸다.

 

글·사진 홍경찬  에디터 트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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