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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무지개 피던 어느 날

  • Editor. 손고은 기자
  • 입력 2019.09.25 16:48
  • 수정 2019.11.06 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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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허브빌리지는 계절별로 색색의 빛깔로 관람객을 맞는다
연천 허브빌리지는 계절별로 색색의 빛깔로 관람객을 맞는다

무지개 피던 어느 날 
습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는 물러가고
하늘은 한 뼘쯤 자란 것 같았다. 
그날, 예쁘게 핀 무지개를 만났다. 


●가을엔 무지개가 뜬다 


연천으로 가는 길 내내 심장이 요동쳤다. 평화수도, 통일동산, 평안동산…. 서울을 벗어나자 드문드문 이런 표지판이 보였다. 앞과 옆으로 종종 군용차가 지나가기도 했다. 먹먹했고 다소 초조했다. 그 느낌이 생소했지만 알아챌 수 있었다. 점점 북한 땅과 가까워지고 있음을. 


긴장감이 감도는 마을, 굽이굽이 속살을 파고들어갔다. 엄마 품에 얼굴을 파묻은 어린아이처럼. 그 속엔 세상물정 모른다는 듯 평온한 마을이 쏙 박혀있었다. 이름은 허브 빌리지. 바깥과 다르게 따뜻하고 밝고 고요했다. 작지만 큰 마을을 산책하기 위해 지도를 펼쳤다. 때마침 정원에 안젤로니아(Angelonia)가 곱게 피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지도를 살펴보니 정문 오른쪽 안젤로니아 가든부터 아기자기하게 동선이 나 있다. 정원에는 봄이면 보랏빛 라벤더가 피고 여름이면 백합이, 가을이면 안젤로니아가 핀다. 하염없이 맑은 하늘 아래, 그날 정원에는 안젤로니아의 알록달록한 색이 층층이 물결을 이루어 무지개를 만들었다. 그래서 안젤로니아 가든의 또 다른 이름은 무지개 정원이다. 

신라 말 고려 초기에 지어진 삼층석탑
신라 말 고려 초기에 지어진 삼층석탑

무지개 정원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빙 돌아 걷기로 한다. 건강과 행운을 기원한다는 거북이를 닮은 바위 소원석과 바로 옆 신라 말 고려 초에 지어진 삼층석탑을 지나 연꽃이 동동 떠 있는 사랑의 연못까지 이어진다. 허브 빌리지에는 정원만 여럿인데 밤나무 몇 그루에도 밤나무 정원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소박하고 후하다. 허브 빌리지에서 가장 세련미가 돋보이는 정원은 ‘화이트 가든’이다. 물을 담고 있는 직사각형 가든 너머로 임진강 물줄기가 이어진다. 자세를 낮춰보면 정원은 임진강 물줄기와 이어지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담담하게 자리한 새하얀 벤치 하나가 멋을 더했다. 

세련미가 돋보이는 화이트 가든
세련미가 돋보이는 화이트 가든
사랑의 연못
사랑의 연못

허브 빌리지에서 가장 애정을 받는 곳은 허브온실이다. 시린 겨울이 와도, 후덥지근한 여름에도, 텁텁한 미세먼지가 급습해도 사계절 내내 안전한 곳. 유리 천장 아래 가을볕이 그대로 따사로운 온실 속, 새소리도 정겹다. 100여 가지의 초록초록한 허브 향을 한껏 머금고 나오니 마음도 하늘만큼 맑다. 

허브온실 안에는 사계절 허브향이 가득하다
허브온실 안에는 사계절 허브향이 가득하다
허브빌리지 야외정원은 색색의 꽃들이 무지개를 이룬다
허브빌리지 야외정원은 색색의 꽃들이 무지개를 이룬다

연천 허브 빌리지
주소: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북삼로 20번길 37
문의: 031-833-5100
입장료: 성인 7,000원, 소인(36개월 이상~초등학생) 4,000원

 

●대통령 폭포가 된 사연 


이번에도 초록이다. 한탄강 댐 근처에 물색이 에메랄드빛을 띈다는 재인폭포로 갔다. 폭포라기엔 작은 크기다. 높이로는 18~20m인데 강수량이 받쳐줘야 물이 쏟아진단다. 폭포 아래 고인 물도 맑고 영롱하지만 깊이나 넓이는 아담한 정도다. 폭포 아래까지 내려갈 수 있게 철계단을 설치해놨지만 단체 여행객들이 한 번에 몰리면 흔들려 안전상의 문제로 무기한 이용을 금지했다. 계단은 곧 철거될 예정이지만 길은 다른 방법으로 다시 만들어질 거라 했다. 하지만 스카이타워에서 내려다보이는 모습도 곱다.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재인폭포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재인폭포

재인폭포는 지금도 아주 천천히 뒷걸음질 중이다. 50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 쭉 그래왔다. 원래 재인폭포의 위치는 지금보다 380m 정도 앞에 있어 폭포에서 떨어진 물줄기가 한탄강으로 곧바로 이어졌다고. 시간이 지나면서 바위가 깎이고 깎여 지금의 위치까지 이동하게 됐다. 폭포 옆으로 난 주상절리를 봐도 짐작 가능하다. 주상절리는 세 개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맨 아래부터 5m까지가 50만 년 전 처음 용암이 분출해 굳은 지층이다. 그 위로 44만 년 전 12m 지층이 생기고 12만 년 전쯤에는 8m 정도의 지층이 더해졌다. 세월이 겹겹이 쌓인 그곳엔 지금도 멸종위기 식물인 분홍장구채며 천연기념물 민물고기 어름치도 산다. 그들이 살만하다는 건 여러모로 반가운 얘기다. 


문화해설사 말로는 요즘 ‘초딩들’ 사이에서 재인폭포는 대통령 폭포라 불린단다. 거참, 재치 있는 애칭을 얻었다. 하지만 재인폭포 전설 속 재인은 줄 타는 광대였다. 전설은 상반된 두 가지로 나뉘지만 믿고 싶은 쪽 하나만 전하고 싶다. 아주 옛날 재인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는데 아내를 탐낸 원님이 폭포를 사이에 두고 재인에게 줄을 타게 했다. 재인이 줄을 타는 사이 줄을 끊어 죽게 하고 재인의 아내에게 수청을 들라 명했다. 하지만 절개를 지키고자 한 아내는 수청을 들게 된 날 원님의 코를 물어뜯고 폭포에 떨어져 자결했다는 슬픈 전설이다. 그 후 원님의 코를 물었다 해서 마을 이름이 ‘코문리’로 불렸고 차츰 어휘가 변해 지금의 고문리가 됐다는 기록도 있다. 


재인폭포의 에메랄드빛은 저녁 5시쯤 절정에 다다른다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해설사도 말문이 막혔다. 글쎄, 부부가 이별한 시간이 그 즈음이었을까? 그 순간, 폭포 아래로 작은 무지개가 떴다.


●종이 울리는 그날까지 


내비게이션이 고장난 게 아닐까 의심했다. 열쇠부대를 지나면서부터 갈피를 잡지 못하는 GPS를 믿지 않고 이정표에 의존하기로 한다. 민간인 통제 초소를 두 번이나 거치고도 열쇠전망대까지는 꼬박 20분이 걸렸다. 


너무 늦게 온 게 아닐까. 조용할 날 없는 이 땅에 살면서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는 그다지 실감하지 못하던 나였다. 수풀 속에 힐끗 보이는 삭막한 초소며 철조망에 붙은 지뢰 주의 경고문을 지나서야 온몸이 쫄깃해진다. 전망대에 도착하자 그곳을 지키는 군인이 주의를 당부한다. 사진 촬영은 정면으로 바라보는 전망대 외관과 맞은편 성모마리아상만 가능하다고. 파주나 철원, 고성 등 좀 더 관광지로 이름을 알린 전망대보다는 아담한 편이라지만 공기는 삼엄하다. 

열쇠 전망대
열쇠 전망대

전망대는 평일이어서인지 한산했다. 아니, 혼자였다. 쭈뼛쭈뼛한 움직임이 이경찬 상병 레이더망에 걸렸다. 그의 안내에 따라 전망대를 올랐다. 1인이든 단체든 원하는 방문객이라면 해설을 돕는다고 했다. 탁 트인 사방에서 바람이 분다. 코앞으로 보이는 구역이 비무장지대(DMZ)가 아니라면 이곳은 비통할 리 없는 풍광 좋은 전망대다. 열쇠전망대는 육군 열쇠부대가 1998년 건립한 안보관광 코스다.

전망대에서는 최전방 감시 초소 GP를 볼 수 있고 과거 북한의 선전마을이었다는 마장리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북측으로는 3개의 능선이 겹쳐있는데 그 중 가운데가 영화 <고지전>의 전투 배경지인 철원 백마고지다. 실제 6·25 전쟁 때 격전지이기도 했다. 또 지척으로 화살머리고지가 있다. 국방부가 올해 4월부터 지뢰를 제거해 유해 발굴을 시작한 현장이다. 10월31일까지 최초로 민간인에게도 방문 기회가 열렸다. 디엠지기와 두루누비 홈페이지에서 온라인으로 접수하면 추첨을 통해 하루 40명 방문할 수 있다고. 반가운 이야기지만서도 또 그다지 달가워할 일도 아니다. 상흔이 어린 곳이므로. 


육안으론 보이지도 않는 휴전선을 따라 두 개의 국기가 펄럭인다. 전망대 뒤로는 통일의 종이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언젠가 통일이 되는 날, 낭랑하게 종소리를 울릴 준비태세를 한 채. 

 

글·사진=손고은 기자 koeun@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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