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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제주가 내게 물었다

  • Editor. 천소현 기자
  • 입력 2019.10.01 10:38
  • 수정 2019.11.06 13: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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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했다. 제주의 사람들이 자꾸만 똑같은 질문을 던져 왔다. 
‘나는 누구인가?’ 아직도 그런 질문을 하고 살아야 하는 건가? 
부쩍 마음이 주름진 나의 푸념에 제주가 대답했다. 이렇게. 

나를 비추는 곳, 오조리에 자리 잡은 취다선의 뒤뜰
나를 비추는 곳, 오조리에 자리 잡은 취다선의 뒤뜰

●나는 ‘오조리의 마음’ 입니다 
취다선 리조트

‘쉼’이 간절한 사람들 사이에서 취다선은 이미 제주 숙소 1순위다. 추천을 받았고, 극찬을 들었고, 2박을 한 후 나도 동의했다. 취다선 리조트는 묘하게도 누군가 손으로 빚은 조소 작품 같은 느낌을 준다. 컬러풀한 벽화와 차분한 차실이 언밸런스함을 이겨 내고 사이좋게 공존한다. 그 분위기에 한 번 빨려들면 끝장이다. 한 발자국도 나오기 싫다. 

우도가 보이는 취다선 리조트의 객실
우도가 보이는 취다선 리조트의 객실

아침 7시. 졸음이 쏟아지는데, 일소(一笑) 안대진 선생은 계속 물어 왔다.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사람은 자연일까요, 아닐까요? 그래도 나름 그가 내놓는 답을 잘 따라가고 있었는데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과연 영원한 행복이 있을까요?” 속마음은 이거였다. ‘있을 리 없잖아요!’ 물론 일소 선생의 대답은 ‘있습니다!’였고, 그 길로 우리 둘의 명상은 다른 길로 갈라졌다. 하지만 정수리까지 끌어올렸다가 단전 아래까지 깊이 눌러 넣었던 아침 녹차의 향기만은 참 좋았다. 그의 차 명상에 이틀 연속으로 참여한 이유다. 집에 돌아가서도 차 명상을 하리라 굳게 다짐했지만, 문제는 그 결심이 아직 오조리 앞바다를 떠나지 못하고 귀경 중이라는 점이다. 마음 다스리기가 이렇게 어렵다. 

매일 아침 액티브 명상이 진행되는 오라토리움
매일 아침 액티브 명상이 진행되는 오라토리움

취다선은 일소 선생과 그의 가족들이 ‘손으로 빚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테마 리조트다.  ‘전 국민이 1인 1다실’을 갖게 하겠다는 아버지의 꿈 하나를 좇아 온 가족이 ‘나를 비춘다’라는 뜻의 오조리(吾照里)에 정착했으니, 삶이 꽤 고단한 중이다. 솜씨 좋은 아내가 칼국수, 해물탕을 팔아 모은 돈이 종잣돈이 됐다. 서울에서 멀쩡히 출판사를 잘 다니던 큰 딸 다연은 매니저가 됐고, 새신랑 겸 사위는 ‘밀항을 준비 중’이라는 농을 던질 정도로 종일 바쁘다고. 아침 차 명상이 끝나면 인도에서 ‘강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작은 딸 슈냐가 액티브 명상을 진행한다. 걷고, 뛰고, 춤을 추는 몸의 시간이다. 아버지의 권유로 시작한 명상 공부가 싫어서 방황도 했다던데, 지금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을 만큼 열심한 요기이자, 뚝딱뚝딱 기물들을 만들어 내는 만능 재주꾼이라고. 

차와 명상의 기쁨을 알려주신 일소 안대진 선생
차와 명상의 기쁨을 알려주신 일소 안대진 선생

가족들의 노고 덕분에 손님들은 무한히 편안하고 행복하다. 침대에 누워 마주보는 우도의 풍경, 맛있는 아침 식사, 좋은 차와 명상 프로그램, 개인 차실에서의 다도 체험까지, 투숙객에게는 다 무료다. 집에 차실이 만들어지는 그날까지, 내 마음의 차실은 취다선이다. 

 

●나는 ‘용왕할머니의 딸’ 입니다
해녀의 부엌

구좌읍의 옛 활선어 위판장에 들어섰다. 외관과는 딴판이었다. 테이블 위에 와인 잔과 식기가 엄숙하게 세팅된 우아한 다이닝 공간이었다. 해녀의 부엌은 청년예술인과 해녀들이 함께 공연하는 <어멍이해녀>을 보고, 해녀들이 직접 채취한 해산물로 ‘해녀의 밥상’을 즐기는 일이다. 이렇게 즐겁고 간단한 일인데, 공연장은 이내 눈물바다가 되었다. 

해녀들이 잡고 해녀들이 요리하는 음식들. 신선한 제철 재료들이 올라온다
해녀들이 잡고 해녀들이 요리하는 음식들. 신선한 제철 재료들이 올라온다

남편을, 동무를 빼앗아 간 바다를 원망하던 해녀는 다시 바다의 품에 안길 수밖에. ‘숨 있을 때 나와야 헌다! 욕심내면 안 된다!’ ‘용왕할머니의 딸’이라는 해녀들의 고단한 일생은 어머니에게서 딸로, 그렇게 출렁거렸다.

만찬은 황홀했다. 뿔소라꼬치, 군소샐러드, 전복회, 톳흑임자죽과 빙떡 등 식탁이 제주의 바다다. 50년 전 첫 물질을 시작했다는 종달리 최고령 해녀 권영희 할머니(88세)와의 대화에는 통역이 필요했다. 바다가 얼마나 추운지, 얼마나 힘든지, ‘물건’이 잘 잡히는 날에는 또 얼마나 기쁜지, 바다가 정말 고마운지…, 아무것도 모르는 ‘육지 것’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 주는, 국내 유일의 ‘제주 해녀 다이닝’이다. 해녀들이 술술 풀어 놓는 삶의 이야기들은, 기록하면 그대로 문화유산이 되고 바다의 해설서가 된다. 45년 경력의 강인화 해녀는 갓 삶은 군소의 맛이 참 ‘베지근’해서 남들 안 주고 가족들끼리만 몰래 먹는다고 했다. 

군소에 대해 설명 중인 경력 45년의 해녀
군소에 대해 설명 중인 경력 45년의 해녀

호스트 김하원 대표는 해녀와 공연 모두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해녀 집안에서 자랐지만, 그녀가 선택한 일은 해녀가 아니라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해녀 다이닝’을 기획해서 해녀들을 돕는 일이었다. 결과는 대성공. 연일 매진 사례다. 

 

●나는 ‘요리하는 도예가’ 입니다 
제주 메밀요리와 도자기 체험

일단 먹고 시작한다. 도예가이자 셰프인 단송(丹松) 박경진 선생이 직접 만든 전복김밥, 메밀김밥, 냉메밀국수가 별미다. 식당에서 멀지 않은 스튜디오로 자리를 이동해서 진행되는 제주 메밀요리와 도자기 체험은 만들어진 그릇을 장식하는, 그렇고 그런 체험이 아니었다. 소지(점토) 한 덩어리를 덜어내서 바닥을 만들고, 코일링을 해서 기벽을 세운 다음 접시의 형태를 잡아 나가는 동안 충분히 흙의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도예 체험을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창한 영어로 진행되니 외국인들도 열심이다. 

느리지만 직접 코일링을 해 기벽을 세운 후 접시를 빚었다
느리지만 직접 코일링을 해 기벽을 세운 후 접시를 빚었다
흙도 빚고, 요리도 하는 단송 반경진 선생
흙도 빚고, 요리도 하는 단송 반경진 선생

단송 선생은 독일어도 유창하다. 인생의 전반부에서 그는 독일에서 잘나가던 직장인이었다. 인생의 2막은 암 진단을 받은 후부터 시작됐다. 독일 생활을 잠시 접고 제주에 머물던 중에 흙을 만지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예를 시작했다. 푹 빠져 버렸고, 독일로 돌아갈 마음도 사라져 버렸다. 제주의 옛 이름을 딴 ‘영주요’를 열고, 도예 수업을 하면서 6년이 훌쩍 흘렀고, 자신이 만든 그릇에 음식을 담아내고 싶어서 작은 식당도 열었다. 

메밀김밥. 제주 메밀은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메밀김밥. 제주 메밀은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단송 선생의 도움으로 간신히 형태를 잡은 맥주잔과 접시는, 제주 여행이 잊힐 때쯤 집으로 배달된단다. 아직 이렇게 기억이 또렷하니,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나는 ‘진짜, 진짜’ 입니다
제주갑부훈의 하우스 콘서트

“제주에 오기로 했을 때 진짜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글을 썼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진짜로 느끼고, 진짜를 표현하며 살고 싶다고 결심했죠.” 

염정훈씨의 말에 나는 마음이 조금 베였다. 내가 가진 무수한 거짓의 기술들을 들킨 것만 같았다. 20대 중반에 제주로 이주하면서 ‘제주거지’를 자처했던 그는 1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풍요로움을 되찾아 ‘제주갑부 훈’이 됐다. 지금은 업사이클링 패션브랜드 ‘이보쇼제주갑부’를 창업하고 제주 클린 여행 캠페인에 앞장서고 있으며, 자연에서 배운 지혜들을 음악으로 만들고 있는 싱어송라이터다.

하우스콘서트를 진행 중인 염정훈씨와 그의 3집 앨범 자켓
하우스콘서트를 진행 중인 염정훈씨와 그의 3집 앨범 자켓

제주갑부훈의 하우스 콘서트는 그의 노래와 이야기로 구성된다. 자꾸만 조금씩 마음을 베이는 노래와 고백들이었다. 마치 제주가 겪고 있는 오버 투어리즘의 폐해처럼 자신의 삶에서 과부하를 느꼈던 그의 읊조림은 최근 나온 3집까지에 꾸밈없이 수록되어 있다. <제주도, 이곳에 버리고 가는 것은 당신의 지친 마음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3집 앨범의 제목이다. 그는 진짜 갑부인 걸까. 원하는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은 반드시 땀 흘려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도록 쓰고, 마지막으로 후원과 기부를 한다는 원칙을 지키며 살 수 있을 만큼, 딱 그만큼 갑부란다. 

 

글 천소현 기자  사진 김민수(아볼타),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에어비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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