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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이 번지는 자리, 융푸라우

  • Editor. 차민경 기자
  • 입력 2019.10.01 17:25
  • 수정 2019.11.07 15: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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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니케 플라테에 오르는 길. 이곳에 있는 순간을 동화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쉬니케 플라테에 오르는 길. 이곳에 있는 순간을 동화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여름 들판에 노랑색, 주황색, 보라색 들꽃이 융단이었다. 바람이 휙 지나가는 자리를 따라 꽃들이 누웠다 일어나면 반짝이가 떨어진 자리처럼 눈이 부셨다. 
무한개의 꽃이 반짝이는 들판, 그럼에도 초록이었다. 초록은 감히 해쳐지지 않는다. 

브리엔츠 호수의 여름날. 땀이 흐르기 전에 호수에 뛰어드는 사람들
브리엔츠 호수의 여름날. 땀이 흐르기 전에 호수에 뛰어드는 사람들

●꼭 두 손으로
소중히 담을  것

인터라켄 오스트(Interlaken Ost)역에 도착한 시간은 밤 12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비행을 시작하고 무려 16시간 만이다.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12시간 비행을 끝내고 고속철도 ICE로 갈아탈 때까지만 해도 기운이 남아 있더니, 기차에서 5시간을 버티고 있으니 고역이었다. 편하려고 입고 간 면바지는 무릎이 툭 튀어나와 반듯하게 서도 선 기분이 아니었다. 

풀 뜯는 소 뒤로 아이거 북벽이 있다
풀 뜯는 소 뒤로 아이거 북벽이 있다

한밤의 인터라켄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한껏 서로를 외면하고 있는 무릎과 면바지 사이로 여름 밤바람이 스며 볼썽사납게 바지가 흔들렸다. 돌돌 끌고 가는 캐리어 소리는 어찌나 큰지. 정적을 요란스럽게도 해치는 것 같아 발걸음이 빨라졌다. 호텔까지는 걸어서 5분이 채 되지 않았다. 두툼한 손가락만 한 쇠뭉치가 달려 있는 방키를 열쇠걸이에 넣고 이쪽저쪽 돌렸더니 드디어 방이었다. 누워야 했다. 


밤이 늦었던 만큼 아침은 일찍 왔다. 멍한 정신으로 나간 테라스에선 낮은 가정집 위로 하늘이 뻥 뚫려 창연하고, 멀리서 산이 우뚝했다. 눈앞의 모든 것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이번 여행이 무엇으로 채워질지 확신했다. 


100년 된 오크 나무 의자에 앉아 쉬니케 플라테(Schynige Platte)에 올라간다. 의자도, 천장과 바닥도, 문도 나무다. 융프라우요흐의 여러 철도 노선 중에서 유일하게, 쉬니케 플라테에서만 쓰이는 옛날 기차다. 3량밖에 안 되는 작은 열차 안은 속을 비운 거대한 통나무 같기도 하다. 이 기차를 타고 산을 올랐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이테를 읽는다. 


쉬니케 플라테역에서는 전통복장을 한 사람들이 알펜호른을 불고 있다. 쉬니케 플라테가 스위스의 전통을 테마로 꾸며진 구역이라 그렇다. 2m가 족히 넘는 알펜호른 소리는 넓고 깊은 계곡 사이를 뭉게뭉게 감싸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7월의 쉬니케 플라테는 후끈했다. 한여름에도 산 위는 서늘해 긴팔을 챙겨 입었다는데, 반팔마저도 벗어 버리고 싶은 날씨였다. 가이드는 원래 산허리까지 두꺼운 빙하가 쌓여 있었다고 설명했다. 손끝 너머엔 듬성듬성 얼음 덩어리를 얹은 바위산만 보였다. 

하더쿨룸에서 맞는 저녁. 어둠이 깊어지면 반짝이는 인터라켄이 내려다보인다
하더쿨룸에서 맞는 저녁. 어둠이 깊어지면 반짝이는 인터라켄이 내려다보인다

연신 손부채를 흔들며 트레킹에 나섰다. 650여 종의 야생화를 생육하는 알파인가든을 지나 언덕 능선을 타는 파노라마 트레일(Swiss Flower Panorama Trail)이다. 바싹 마른 흙이 신발 밑으로 바스러지면서 자박자박 발걸음을 따라왔다. 좁다란 길 양옆으로 들풀이 축축한 초록으로 너울거리는데, 어울리지 않는 질감. 언덕 아래에서는 여름을 맞아 산 중턱까지 올라온 소들이 무리 지어 풀을 뜯었다. “여름에 산 위로 올라온 소의 젖으로 만든 치즈는 ‘알프치즈’, 겨울에 산 아래로 내려간 소의 젖으로 만든 치즈는 ‘마운트치즈’라고 하죠. 식감도 맛도 조금씩 달라요.” 또롱또롱, 소들이 매단 방울소리가 건조한 공기에 물방울처럼 맺혔다. 발 끝에 힘을 싣는다. 치즈가 빨리 먹고 싶다.


뷰포인트에 서면 ‘파노라마’라는 트레일 이름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발아래 펼쳐진 건 두 개의 호수를 양쪽에 끼고 있는 인터라켄. 호수(Laken) 사이(Inter)의 마을이라니, 두 손으로 떠서 스노볼에 담아 가고 싶었다. 

브리엔츠 호수를 여행하는 최고의 방법은 유람선을 타는 것. 멀리서 증기유람선이 다가오고 있다
브리엔츠 호수를 여행하는 최고의 방법은 유람선을 타는 것. 멀리서 증기유람선이 다가오고 있다

●사랑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어


비취색 호수 위에 동동 몸을 띄웠다. 유람선이 호수 위에 떠 있으니 몸도 떠 있는 셈이라고 치자. 빙하가 녹은 물은 브리엔츠 호수로 내려와 인터라켄을 지나서 툰 호수로 흘러간다. 브리엔츠 호수가 더 차갑다. “외지 사람들은 브리엔츠 호수에 함부로 몸을 담궜다간 혼쭐이 날 수도 있어요. 너무 차가워서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죠.” 가이드는 겁을 준다. 


유람선은 약 2시간 동안 브리엔츠 호수를 빙 둘러 운행한다. 중간중간 정박지에 내려 여행하고 다음 유람선으로 갈아타는 ‘홉온홉오프’도 가능하다. 운이 좋다면 1대만 운행 중인 100년 된 증기유람선을 탈수도 있다. 증기 유람선이 오는 소리는 멀리서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정말로 ‘칙칙폭폭’ 소리가 난다. 인터라켄에 머무는 사람들은 한바탕 멱을 감을 생각으로 수영복을 챙겨 유람선를 탄다. 아예 호수 인근에 숙소를 잡고 장기 체류하는 경우도 많다고. 잔디 위에 펼친 비치타올 위에서 사람들은 무념무상이다. 닮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그럼에도 여름 성수기 치고는 한가한 풍경이다. 스위스나 인근 유럽 여행자들은 여름보다 겨울의 인터라켄을 더 좋아한단다. 융프라우 설원에서 스키를 즐길 수 있으니까. 우리네 스키장처럼 가공한 슬로프가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설원에서 말이다. 숙련자에게 적합하다. 겨울엔 그린델발트와 같은 스키 거점 마을의 숙소들이 모두 만실이라고. 융프라우에선 스키 여행자를 위해 새로운 곤돌라 터미널을 구축하기 시작해 내년이면 완공이란다. 


여름의 절정에서 겨울의 풍경이 궁금해졌다. 눈이 쌓인 샬레는, 눈이 내리는 호수는, 얼음 모자를 쓴 아이거 북벽의 모습은. 사랑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액티비티가 집약된 휘르스트. ‘새가 되고 싶다’면 글라이더를 타면 된다
액티비티가 집약된 휘르스트. ‘새가 되고 싶다’면 글라이더를 타면 된다

●바람을 타고 나는 기분


벌써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 다섯 보 정도 전진했다. 휘르스트 플라이어(First Flyer) 대기줄에서다. 대기자들을 북돋기 위해서인지 출발선 일대에서는 경쾌한 팝송이 흘러나왔다. 찰나를 위해 투자하는 시간이란. 빌보드 1위곡에서 시작한 음악이 약 20위까지 흘렀을 때야 차례가 돌아왔다. 툭, 공중으로 떨어진 몸은 가속도가 붙어 쏜살같이 날았다. 와아악! 착지. 찰나란. 


플라이어에서 내려오면 바로 글라이더(First Glider) 탑승 입구로 이어진다. 거대한 새가 되어 휘르스트(First)를 나는 액티비티다. 집라인과 비슷하지만 엎드린 자세로 내려온다는 데서 진입장벽이 높다. 안전 장비가 몸을 탄탄하게 받쳐 줌에도 불구하고 배와 가슴을 날것으로 내놓는 기분이라 그렇다. 이참에 새가 되기로 했다. 물론 독수리는 날개를 펼친 채로 후진하지는 않겠지만, 시속 80km로 내려오는 순간만큼은 새의 기분이 된다. 독수리의 비행 속도가 시속 200km 정도라고 하니 가까스로 독수리에게 이입한 걸로 치자. ‘새처럼 난다’는 건 무한한 바람을 느끼는 것과 같았다.


휘르스트는 액티비티가 집약된 구역이다. 집라인, 글라이더, 마운틴 카트(Mountain Cart)와 트로티바이크(Trottibike)까지. 곤돌라를 타고 휘르스트에 오를 때부터 고조된 설렘은 대기줄에 잠시 맥을 잃었다가 결국 강렬한 스릴로 치환된다. 대기줄이 마냥 지루한 것도 아니다. 휘르스트 일대를 두르고 있는 건 아이거. 아이거 북벽은 알프스의 3대 북벽으로 불릴 정도로 많은 산악인의 가슴을 들끓게 하는 산이다. 물론 등산에 취미가 없으니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절벽 아래로 다리를 놓은 휘르스트 클리프 워크(First Cliff Walk)를 천천히 걸으면 아이거의 야성적인 등허리를 감상할 수 있다. 단 클리프 워크의 바닥이 뚫려 있으므로 천천히 걸을 수 있을지는 장담을 못하겠다. 


휘르스트의 액티비티는 서늘한 바람과, 쌉싸래한 풀내음으로 남는다. 휘르스트 정상에서 마운틴 카트를 타고 내려올 때는 가슴이 벅찰 정도로 아드레날린이 솟았다.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길, 브레이크를 잡지 않고 그대로 내달렸다. 아이거가 눈앞에 파도처럼 넘쳐 왔다. 아, 행복해. 아무도 듣지 않으니 크게 말해도 좋겠지. 

융프라우요흐 알레치 빙하 위에 발자국을 찍는다
융프라우요흐 알레치 빙하 위에 발자국을 찍는다

●만년만큼 또 만년 더


융프라우의 절정은 언제나,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다. 융프라우철도를 타고 해발 3,454m 고지에 자리한 융프라우요흐역에 내렸다. 지금까지 기차를 타고 올랐던 다른 산들은 융프라우요흐 앞에서 그저 언덕에 불과할지 모르겠다. 높은 고도에 조금만 서둘러도 숨이 차서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속도를 낮췄다. 신령을 영접하는 것처럼 절로 엄숙해질 수밖에. 


갑자기 익숙한 신라면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전망대에 다 도착한 것이다. 스위스 빙하 위에서 고향의 냄새를 맡는다. 이성은 눈을 크게 뜨고 더 많은 걸 보라고 외치고, 감정은 ‘한사발 하자’고 부추긴다. 야외에 있는 스핑스 전망대 테라스로 대피한다. 멀리 계곡을 감싸고 있는 알레치 빙하가 햇빛에 번쩍였다. 으슬으슬 몸서리를 치게 하는 차가운 바람과 함께. 멀리 고원지대에 펄럭이는 스위스 깃발과 인증샷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작은 점처럼 내려다보였다. 

우아한 설산과 휴양을 즐기는 사람들
우아한 설산과 휴양을 즐기는 사람들

빙하의 안쪽을 보려고 얼음궁전으로 내려갔다. 지하로 30m, 바위처럼 단단한 빙하는 손으로 부벼도 녹아나지 않는다. 켜켜이 얼어붙은 시간의 줄무늬가 선명했다. 설원으로 나서자 여름 햇빛에 녹아 서걱거리는 눈밭에 푹푹 무릎이 빠진다. 옆에서는 집라인을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메아리도 없이 퍼져 나갔다. 광대한 빙하 위에서 소리가 부딪힐 곳이 없었던 거다. 설원을 멀리 내다보면 희끗희끗하다. “원래는 순백색이었는데 최근 사하라사막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와 모래가 쌓이고 있어요. 예전과는 여러가지가 달라졌죠.” 


언덕 위에 드문드문 앉은 샬레들, 영롱한 비취색 호수와 산책하는 사람들, 풀을 뜯는 소들과 젖을 짜는 목동, 눈부신 만년설. 무엇이 달라질지 생각한다. 아니, 달라지지 말아야 할 것들을 생각하기로 한다. 초록은 해쳐지지 않으니까.  

▶빙하 위에 날린 슛

융프라우 설원 위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스포츠 이벤트 때문이다. 융프라우철도는 융프라우요흐 설원에서 연 1~2회 정기적으로 스포츠 이벤트를 진행한다. 지난 7월26일에는 스위스 핸드볼 대표팀과 한국 핸드볼 대표팀이 알레치 빙하 위에 마련된 특설 무대에서 친선경기를 펼쳤다. 10분씩 2회 진행된 경기는 11:11로 무승부, 이어 7m 던지기에서 5:4 승부를 내며 한국팀이 승리했다. 짱짱.

 

▶travel  info

Travel PASS 
융프라우 패스

융프라우 일대는 융프라우 철도로 촘촘히 연결돼 있다. 융프라우 철도의 기차, 곤돌라 등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VIP 패스를 추천한다. 아이거글레처-융프라우요흐 구간에 한해 1회 한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지만 다른 모든 구간은 무제한으로 탑승을 지원한다. VIP 패스를 이용하면 액티비티 천국 휘르스트의 4개 액티비티 할인도 제공, 개별 구입시 최대 21만원에 상당하는 비용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다. 융프라우요흐 정상에서는 신라면이 무료로 제공된다. 


SPOT
하더쿨름 Harder Kulm 

융프라우에서 유일하게 해가 저문 뒤에도 방문할 수 있는 장소다. 하더쿨름 파노라마 레스토랑이 운영, 발밑으로 펼쳐진 인터라켄의 야경을 바라보며 식사를 즐길 수 있다. 공중으로 툭 튀어나온 전망대는 인증샷 명소.

주소: 3800 Interlaken, Switzerland

HOTEL
칼튼 유럽 호텔 Carlton Europe Hotel

인터라켄 오스트역에서 5분 거리에 자리했다. 약 12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호텔로, 투숙하는 동안 점점 그 깊이에 빠져들게 된다. 전통 복장을 유니폼으로 입은 직원들과 객실 복도에 전시된 오래된 집기들이 인상적이다. 객실은 층고가 높음에도 아늑한 편이다. 클래식한 가구가 곳곳에 놓여 묵직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2019년부터 성인만 예약을 받는다. 

주소: Hoheweg 92-94, 3800 Interlaken


글·사진 차민경 기자
취재협조 융프라우 철도 한국총판 동신항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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