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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첩 반상 같던 보령나들이

  • Editor. 곽서희 기자
  • 입력 2019.11.21 14:09
  • 수정 2019.11.26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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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끝, 겨울의 시작점에서 보령을 찾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알차게 든든하다.

대천해수욕장 하늘 위 음표처럼 떠있는 짚트랙 탑승객들
대천해수욕장 하늘 위 음표처럼 떠있는 짚트랙 탑승객들

 

●바다 같은 하늘, 하늘 같은 바다 위에서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될 무렵, 서해로 향했다. 여름 내 머드 축제로 후끈했던 충남 보령 대천해수욕장. 한여름 태양 아래 진흙으로 뒤덮였던 자리에는 선선한 바닷공기만이 촉촉히 남았다.

바람 따라 몸까지 가벼우니, 짚트랙(Zip Trek)을 즐기기엔 이만한 날도 없다. 높이 52m, 탑승거리 613m. 아파트 20층 높이에서 기다란 네 개의 선들이 대천해수욕장 한가운데로 가로질러 뻗어있다. 그래, 바다를 하늘에서 볼 기회가 또 어디 있겠어. 대천해수욕장의 자랑거리라고 하니 이 참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지주대 사이로 와이어를 설치하고, 트롤리(trolley)라 불리는 도르래를 와이어에 걸어 반대편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레포츠를 짚라인(zipline) 또는 짚트랙이라 한다고. 왜 하필 ‘짚’인고 하니, 이유는 솔직했다. 트롤리와 와이어가 마찰할 때 나는 소리가 ‘짚’이어서.

몸소 확인해보기 위해 탑승장에서 탑승권을 결제하고, 직원의 안내에 따라 팔다리에 안전장치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와이어에 헬멧까지 그야말로 풀 장착이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동승한 어떤 이는 유리창 닦는 일을 하러 가는 것 같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모르긴 몰라도 장비 한 번 비범하다.

먼저 출발한 앞 팀 사람들. 두근두근, 다음은 내 차례다
먼저 출발한 앞 팀 사람들. 두근두근, 다음은 내 차례다
짚트랙 타고 내려오면서 겨우 건진 대천해수욕장의 풍경 한 컷
짚트랙 타고 내려오면서 겨우 건진 대천해수욕장의 풍경 한 컷

이런 것쯤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호언장담을 했건만. 문이 열리고 앞 팀 사람들이 하나 둘씩 와이어에 매달려 시야에서 멀어지는걸 보니 심장이 쫄깃해진다. 꿀꺽, 침 한 번 삼키고 단상에 올라섰다. 직원의 카운트다운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단상에서 발을 뗐다. 바다 위로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지퍼가 찢어지는 듯한 트롤리의 우렁찬 소리는 이름의 유래를 납득하게 했다.

바다 같은 하늘, 하늘 같은 바다. 경계가 흐릿해진 두 영역을 향해 소리 한 번 내지르니 이렇게 상쾌할 수 없다. 두려운 마음은 바다 위로 흘려보내고 한 척의 쾌속정처럼 빠르게 하늘을 헤엄쳤다. 눈으로만 담기엔 영 아쉬워 빠르게 활강하는 와중에도 찰칵, 카메라로 기어코 풍경 한 장 남겼다. 5분도 채 안 되었을까. 도착점에 다다랐다. 순식간이었다. 엉망이 된 머리카락이 최대속도 80km라는 말을 증명해준 셈이다. 파스타 하나 가격으로 야무지게 놀았으니, 보령 여행 첫 시작이 좋았다. 

하늘 높이 뻗은 편백나무들 가운데에선 바람조차 달큰하다
하늘 높이 뻗은 편백나무들 가운데에선 바람조차 달큰하다

●짙은 여운으로 남은 숲


산이야, 바다야? 취향을 물을 때 짜장면 대 짬뽕에 버금가게 흔히 하는 질문 중 하나지만, 보령 여행에선 이런 물음도 별 의미 없다. 산이든 바다든 취향껏 모두 즐기면 되니까! 대천해수욕장에서 약 16km. 차로는 30분 거리에 위치한 성주산 자연휴양림에는 여전히 가을이 지천에 널려있었다. 11월 초, 너무 늦게 왔지 싶었는데 오히려 제철이었다. 가을엔 단풍이 장관이지만, 봄에는 벚꽃이, 여름에는 계곡이, 겨울엔 설경이 그렇게 빼어나다는데. 어느 계절에 왔더라도 후회 없는 발걸음이었겠다.

‘성주산에 오셨으니 편백나무 숲을 보셔야지요.’ 하산하던 등산객 아주머니의 말에 그만 꿈뻑 넘어가버렸다. 친절한 표지판 덕분에 출발한지 20여 분도 안 되어 편백나무 숲에 도착했다. 산책로 곳곳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비(詩碑)들이 낭만을 더해주어 걸음이 유달리 가뿐했다. 모난 돌 하나 없이 잘 닦인 길도 한 몫 했다. 

편백나무 숲 쉼터는 모두에게 열려있다
편백나무 숲 쉼터는 모두에게 열려있다
가을이 여전히 머물고 있던 성주산 자연휴양림
가을이 여전히 머물고 있던 성주산 자연휴양림

편백나무 숲은 공기부터 달랐다. 높이 40m, 지름 2m에 달하는 휴양림의 편백나무는 가히 성주산의 명물이라 불릴 만 했다. 나무들이 병균과 해충, 곰팡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뿜어내는 살균물질을 피톤치드(Phytoncide)라 하는데, 편백나무는 다른 나무들보다 이 피톤치드를 배로 많이 뿜어낸다고 한다. 그래서 편백나무의 별명이 ‘피톤치드의 왕’이라고. 어쩐지 공기가 달콤하다 싶더라니. 모호했던 느낌엔 명백한 과학적 근거가 있었다. 향만 좋은 게 아니다. 피톤치드는 스트레스를 완화시켜주고 강력한 향균 효과가 있어 인간의 면역기능을 증대시킨다고 한다.

특히 아토피 같은 피부질환 치료에 뛰어난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이쯤 되면 걷기만 해도 보약, 맡기만 해도 몸보신이 되는 편백나무 숲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가 피톤치드가 특히 많이 배출되는 골든타임이라 하니, 시기 맞춰 온다면 숲을 배로 즐길 수 있겠다. 하늘 높이 치솟은 나무 사이로 걸음을 늘어뜨려 가만히 산책했다. 해묵은 근심과 걱정들조차 은은해진다. 손끝에 스치는 바람은 서늘했지만 마음의 열도는 따스히 유지됐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하산하며 입구 앞에서 먼지털이 기계로 신발을 털었다. 깨끗해진 신발로 관광버스에 올랐다. 어깨에 낙엽이 묻으셨네요, 하는 버스기사의 한 마디에 알았다. 어깨에 묻은 여운까지 털진 못했다는 걸.

향긋한 꽃들로 가득한 카페 리리스. 꽃이 든 작은 병하나 챙겨올 걸 그랬다
향긋한 꽃들로 가득한 카페 리리스. 꽃이 든 작은 병하나 챙겨올 걸 그랬다

●돌과 허브와 꽃과 시


천 년의 세월이 주는 무게감은 언제나 되직하다. 천 년의 사랑, 천 년의 역사, 천 년의 신화. 보령 개화예술공원엔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돌, ‘오석(烏石)’이 있다. 예부터 돌이 풍부했던 보령은 돌을 가공하는 기술이 발달해왔다. 특히 보령에서 풍화에 강하고 이끼가 끼지 않는 신비로운 돌로 이름난 석재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오석이다.

오석은 석질이 좋아 글씨를 오래 보존할 수 있어 신라시대 때부터 비석과 벼루의 재료로 많이 쓰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엔 왕릉 비석의 절반 정도를 오석으로 만들었고 오늘날에도 대통령 묘비에 오석을 사용했다고 하니, 그 품질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보령의 오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흠을 감추고, 다른 돌들은 세월이 갈수록 흠을 드러낸다는데. 여러 모로 오석을 닮고 싶은 날이다.

개화예술공원은 탁 트인 곳에서 질 좋은 오석으로 만든 갖가지 조각품들을 여유롭게 감상하기 최적의 공간이다. 말 형상부터 물고기 모양까지 작품의 종류도 다양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현재 전시된 작품들도 천 년이 지나도록 그대로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당장 확인해볼 순 없겠지만 후대의 누군가는 그 말이 진실이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오석 위에 새긴 지도
오석 위에 새긴 지도

총 면적 약 18만㎡를 자랑하는 개화예술공원에선 개화허브랜드도 소문난 볼거리다. 5,000㎡(1,500평) 규모의 대형 온실은 사계절 내내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다. 온실에 들어서자마자 푸릇푸릇한 관엽식물들이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실내 연못엔 수생식물을 비롯하여 각종 민물고기와 양서류들이 서식하고 있다. 입구에서 천 원을 내면 물고기 밥을 구입할 수 있는데, 앞서가던 한 아이는 이미 천 원의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오렌지 자스민 나무와 700년 된 대유자나무가 온실의 향기를 책임지고 있었고, 물레방아가 돌아가며 물을 쏟아내는 소리는 지나가던 이들의 귀를 간지럽혔다. 철갑상어의 지느러미와 거대한 육지 거북의 등껍질에 눈을 떼지 못하던 아이들에게 개화허브랜드는 더없이 훌륭한 자연 학습장이었다. 

개화예술공원 호수 위를 헤엄치는 백조 조각상. 오석으로 만든 작품이다
개화예술공원 호수 위를 헤엄치는 백조 조각상. 오석으로 만든 작품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카페 리리스의 시간들
꽃보다 아름다운 카페 리리스의 시간들

1년 내내 꽃향기가 가득한 ‘카페 리리스(Cafe Riris)’는 허브랜드와 맞붙어있다.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붙잡은 리리스는 확실히 인스타그래머블한 장소다. SNS에 개화예술공원을 검색하니 리리스의 사진들이 넘쳐났다.

평소 꽃에 둔감했던 나조차 리리스에선 화려한 꽃 잔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름다운 꽃, 아기자기한 소품, 분위기 좋은 조명. 삼박자가 갖춰지니 셔터음이 연달아 터질 수밖에. 공간에 취했던 것일까. 드라이플라워로 장식된 엽서 하나를 사서 평소 좋아하던 시 구절을 적었다. 수취인이 불명확했지만 어쩐지 상관없었다. 테스트 삼아 뿌려본 꽃 향수의 향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달콤히 남아있었다. 한 병 챙겨오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잔향이 더 향긋한 걸 보니, 향수와 추억은 비슷한 점이 많다.

 

●입안 가득 서해바다를 담다


우럭은 회로도, 매운탕으로 먹어도 맛있다길래. 덩치 좋고 튼실한 놈으로 덥썩 골라버렸다. 대천항 수산시장의 인심은 푸짐했다. 덤으로 두 손 가득 얹어준 가리비와 조개, 문어는 탕에 들어가 국물 맛을 더해줬다. 만 원 세 장으로 싱싱한 우럭이 한 상 가득 차려졌다. 쌈 놓고 회 얹고, 쌈장에 고추와 마늘까지 더해지니, 서해바다가 입안에서 일렁였다. 겨울에 삼치 먹으러 오라는 횟집 아주머니의 말에 보령을 한 번 더 방문할 정당한 이유가 생겼다.

싱싱한 해산물 천국, 대천항 수산시장
싱싱한 해산물 천국, 대천항 수산시장

여행이 끝날 즈음, 속에서부터 든든함이 느껴졌다. 바다에, 산에, 카페에, 푸근한 음식까지. 아무래도 한 상 가득 대접을 받고 온 것 같다. 12첩 반상 풀코스로, 보령을 제대로 맛봤다. 마음까지 배불러졌다.

우럭, 광어, 삼치만큼 대게 맛도 일품이다
우럭, 광어, 삼치만큼 대게 맛도 일품이다

 

글·사진 곽서희 기자 seohee@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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