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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대게를 향한 질주

  • Editor. 이우석
  • 입력 2020.03.02 09:20
  • 수정 2020.03.05 13: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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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번 제대로 내린 적 없지만 이미 서울의 겨울은 깊어 가고 있었다. 
자꾸 달력을 펼쳐 보게 되는 것은 사실 동해안 진객 대게(竹蟹) 때문이었다. 

멀어서 더욱 귀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울진 바다는 국내 어디에 견준대도 당당할 만큼 고운 빛깔을 자랑한다
멀어서 더욱 귀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울진 바다는 국내 어디에 견준대도 당당할 만큼 고운 빛깔을 자랑한다

대게가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금어기가 풀리는 12월부터. 하지만 대게 다리에 살이 차오르는 것은 대보름이 지나고부터다. 게다가 울진에는 겨울여행의 백미로 불리는 온천이 있다. 울진엔 덕구와 백암 두 곳의 명천이 있는데 대게의 고향 후포에선 백암이 가깝다. 게르마늄 천의 백암이야 전국에서도 수질로 손꼽히는 곳이다. 맛난 것 실컷 먹고 온천욕까지 즐기는 휴식과 보양의 여행지로 울진은 최고 선택이다.

백두대간 설산을 배경으로 붉은 대게 역시 산처럼 쌓여 있다
백두대간 설산을 배경으로 붉은 대게 역시 산처럼 쌓여 있다

사실 울진은 멀다. 하지만 달콤한 대게 맛의 유혹을 이길 만큼 버거운 장애가 되진 않는다. 오히려 강릉-동해고속도로를 지나 삼척부터 보이는 동해의 푸른 물결을 오랫동안 볼 수 있어 좋다. 동해안을 끼고 내려가는 길. 오른 편에는 늠름한 설산이 보인다. 비로소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는 옥계휴게소에서 후포항까지 이르는 134.6km가 동네 산책로처럼 짧게만 느껴진다.

파스텔 블루에 뚝뚝 박힌 기암괴석, 울진 바다의 매력이다
파스텔 블루에 뚝뚝 박힌 기암괴석, 울진 바다의 매력이다

●허리가 시트에 붙더라도
죽변

드디어 울진이다. 바다색은 크레파스처럼 변한다. 열두 색 ‘왕자파스’ 크레파스 말고 2단 양철통에 파란색만 해도 여남은 개 늘어선 비싼 세트다. 참으로 긴 노정이다. 허리가 시트에 붙을 지경이다. 울진에 들어서자마자 차에서 몇 번이고 내릴 수밖에 없다. 카메라를 꺼내들지 않더라도 그 파노라마 바다를 두 눈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나게 되는 곳은 바로 죽변이다. 바람 불어오는 언덕에서 내려다본 죽변(竹邊), 이름만큼 멋진 포구다. 드넓은 동해에서 갑자기 폭 패인 듯 들어간 항구는 풍요롭다. 뒷산에 가느다란 산죽이 많아 붙은 이름이다.

‘대게의 고향’ 울진 곳곳에서 대게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대게의 고향’ 울진 곳곳에서 대게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죽변에는 드라마 '폭풍 속으로' 세트장을 만날 수 있다
죽변에는 드라마 '폭풍 속으로' 세트장을 만날 수 있다
파란 바다와 대비되는 새하얀 죽변 등대
파란 바다와 대비되는 새하얀 죽변 등대

일찍이 드라마 <폭풍 속으로>에 죽변항의 멋진 풍경이 소개된 적 있다. 여전히 푸른 산죽림이 터널을 이룬 해안 절벽 위에는 새하얀 등대가 섰고 반대편 절벽 위에는 자그마한 교회와 집 한 채가 아슬아슬한 위치에 우뚝 버티고 섰다. 절벽 아래에는 파스텔톤 셀룰리안 블루의 바다가 쉴 새 없이 파도를 보내 바위를 때린다. 비록 드라마 세트장이라지만 이처럼 그림 같은 풍경은 꽤 드물다. 객실 하나짜리 호텔로 만든다면 한 오륙년 정도는 예약이 밀릴 만큼 절묘한 풍경이다. 겨울의 대숲 터널은 귀와 코, 눈을 충족시킨다. 콧속으론 동해 바람이 몰고 온 청량한 산소가 밀려들고 바람에 댓잎 스치는 소리가 살갑다. 물론 눈 시린 푸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먹거리가 지천이라 그런지 갈매기 떼도 점잖다. 해안 바위에 다소곳이 앉은 갈매기를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남길 수 있는 곳이 울진이다
먹거리가 지천이라 그런지 갈매기 떼도 점잖다. 해안 바위에 다소곳이 앉은 갈매기를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남길 수 있는 곳이 울진이다

●버글버글 지글지글
후포

왕피천을 만난 후에도 더 내려가면 기성, 망양, 그리고 후포다. 위대한 자연풍광을 만끽했지만 대게를 향한 질주는 막을 수 없다. 도로는 더욱 바다와 가까워진다. 917번 도로부터는 마치 노르웨이 아틀란틱 로드를 연상시킨다. 우승자가 샴페인 세례를 받아들 듯 미세한 물보라 속 대게의 고향 후포를 향해 달린다.

겨울 울진의 주인공은 역시 대게다. 살이 차오른 대게가 기다리고 있다
겨울 울진의 주인공은 역시 대게다. 살이 차오른 대게가 기다리고 있다

마침내 ‘대게 천국’ 후포항에 입성했다. 후포는 온통 벌겋다. 찾아간 전문식당에는 손님이 바글바글, 수족관에 붉은 게들이 버글버글하다. 수족관은 마치 영화 <디스트릭트9>의 외계인 거주지를 빼닮았다. 실제 게의 입을 보면 그 영화 속 외계인은 게에서 모티브를 따왔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맛은 다르겠지만. 어느새 나는 자글자글 뜨거운 온돌방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대게와 내 엉덩이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다. 

후포항 대게 경매장에 한가득 깔린 겨울 으뜸 별미
후포항 대게 경매장에 한가득 깔린 겨울 으뜸 별미

그깟 게 삶는 일이 맛에서 얼마나 차이가 나겠냐고 묻는 이들이 있겠지만 사실은 좀 다르다. 별다른 조리법이 없어 뵈는 스테이크도 그 조리 결과가 천차만별이듯 대게 찌는 것도 엄청난 기술을 요한다. 얼마나 ‘국물’이 빠지지 않고 탱글탱글하게 삶아 내는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보관은 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어떨 때는 ‘좀 더 귀찮은 크래미’ 정도에 불과하며 또 다른 때는 눈물이 찔끔 날 만큼 환상적인 맛의 향연이 입속에서 펼쳐진다. 경험상 후포에선 전자의 낭패를 겪기 어렵다. 게도 맛있거니와 찌는 솜씨들도 보통이 아니다.


후포 출신으로 고향에서 대게와 홍게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왕돌회수산 임효철 사장은 “사람이나 게나 고향에 오면 편안하듯이 대게가 모여 사는 왕돌초가 있는 후포 쪽에 모여드는 게는 속살이 단단하고 베어 물면 단맛을 낸다”라고 주장했다. 임 사장은 “지금부터 살이 슬슬 차오는데 3월에는 본격적인 대게의 참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만만했다.

울진 가는 길은 아름다워, 꽤 멀지만 그리 지루하지는 않다
울진 가는 길은 아름다워, 꽤 멀지만 그리 지루하지는 않다

아직도 눈을 부라리는 게를 애써 외면하며 다리를 잡아 뜯었다. 얇은 껍질이 찢어지며 속살이 따라 나오는데 대나무처럼 ‘팅~’ 하고 튕긴다. 버들강아지처럼 한들거리는 두툼한 살을 입에 밀어 넣었다. 진하디 진한 게 향이 입속을 금세 채우더니 급기야 넘쳐 코로도 쏟아져 나온다. 글과 사진으로는 설명이 불가한 내용이지만 그 순간을 떠올리자면 아직도 침이 쏟아진다. 굵고 뭉퉁한 살결이 주상절리처럼 켜켜이 쌓인 집게주먹 살은 꼬들꼬들 씹는 맛이 좋고 몸통과 연결된 어깻죽지는 푸짐해서 입 안에 가득 차는 포만감이 좋다. 게딱지라 불리는 껍데기 안에는 대게 맛을 농축시킨 엑기스가 가득 들었다. 밥을 볶자면 이미 가득 차, 없던 배도 팽창하며 받아들인다. 


‘홍게’라 불리는 붉은 대게는 먼저 맛이 들었다. 대게보다 달달한 향은 덜하지만 외려 풍미가 좋아 이를 찾는 마니아가 많다. 특히 탕을 끓이면 좋다. 예산을 잘 잡아 보자면 홍게와 대게를 한 마리씩 시키면 4인 가족이 충분히 겨울 별미를 즐길 수 있다. 온천으로 피로를 풀면 여행은 이미 첫 단추를 제대로 꿴 셈이다. 블루(바다)에서 레드(대게)로 넘어가는 여행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겨울바다 동해는 이처럼 회색 도시를 탈출한 이들에게 선명한 색을 칠해 돌려보낸다.  

▶5월까지 대게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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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고속도로~강릉~동해고속도로를 거쳐  7번 국도를 타고 삼척~울진~영덕으로 가는 게 가장 편하다.

EAT
울진~영덕~포항 일대는 5월까지 대게 세상이다. 1마리 1만5,000원짜리부터 10만원대까지 크기에 따라 다양하다. 영덕 강구항과 울진 후포항에 대게식당이 즐비하다. 울진 후포항과 여객선터미널 안 대게활어센터에 왕돌회수산 등 대게요리를 내는 음식점이 몰려 있다. 
왕돌회수산  054 788 4959 

STAY  
오가는 길 울진 백암온천에서 피로를 풀 수 있다. 
백암 한화리조트  054 787 7001

 

*이우석의 놀고먹기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지난 연말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트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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