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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진 시간에도 볕이 드니

당신이 모르는 부산

  • Editor. 이성균 기자
  • 입력 2020.06.2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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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양포를 한눈에 담기 가장 좋은 전망대는 공영주차장이다
외양포를 한눈에 담기 가장 좋은 전망대는 공영주차장이다

하늘을 찌르는 고층 건물과 해변이 전부라 생각했건만 조금만 눈을 돌리니 부산의 숨겨진 모습과 마주했다. 
초라하고 낡아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묵혀진 시간이다.

러일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일본군이 만든 포진지
러일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일본군이 만든 포진지

●115년의 아픔이 새겨진 땅


부산여행하면 광안리와 해운대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도시로서의 부산만 즐겨도 좋지만 무언가 더 채우고 싶은 여행자에겐 역사 여행이 답이 될 수 있다. 여느 외국 도시보다 더 화려한 부산이지만 우리가 몰랐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숨겨진 곳들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특히 가덕도의 외양포, 우암동 소막마을 등이 일본의 잔재가 남은 대표적인 지역으로 역사적 가치가 뛰어나다.

태평양전쟁 당시 만든 인공동굴, 그 끝에는 비밀 공간 같은 바다가 우리를 기다린다
태평양전쟁 당시 만든 인공동굴, 그 끝에는 비밀 공간 같은 바다가 우리를 기다린다

역사기행은 부산의 왼쪽 끝자락 가덕도에서 시작된다. 섬이라 괜스레 멀게 느껴지나 대중교통으로도 쉬이 갈 수 있다. 본디 더덕이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푸근한 곳으로만 생각할 수 있으나 러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상처 입은 땅이다. 그중에서도 외양포는 1904년 2월 러일전쟁 당시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일본은 군사시설 구축과 군사거점 확보를 이유로 민가 64호를 강제 퇴거시키고 이곳을 점령했다. 포진지, 탄약고, 관측소, 산악보루 등 군 시설부터 가옥, 사령관실, 우물 등 일상생활 공간까지 조선 속의 일본을 만들었다. 그 당시에 지어졌던 건물들은 여전히 남아 100년 전의 외양포를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외양포에 주둔한 일본군들이 지낸 가옥과 우물 등 일부 시설이 여전히 남아있다
외양포에 주둔한 일본군들이 지낸 가옥과 우물 등 일부 시설이 여전히 남아있다

또 동쪽으로 도보 3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새바지항에는 인공 동굴인 ‘3연동굴’이 여행자를 빨아들인다. 폭과 높이 1~2m, 길이 약 50m의 3연동굴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인 태평양 전쟁의 잔해다.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해 일본 본토로 진격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일본군이 조선인을 징발해 구축한 방어시설이다. 지금까지 10여개 이상의 동굴이 가덕도 내에 남아 있지만 대부분은 찾아가기 어렵다. 반면 3연동굴은 접근성이 용이해 옛날에는 마을 주민들의 물품 보관장소 등으로 사용됐다. 동굴 끝은 해안으로 연결돼 있어 묘한 신비감마저 느낄 수 있다.

고요한 바다를 지키는 새바지항의 등대
고요한 바다를 지키는 새바지항의 등대

●하늘과 맞닿은 초록길 


수많은 역사 정보에 지쳤다면 대항마을에서 잠시 머무는 게 좋겠다. 가덕도에서 가장 큰 항이 있는 마을로, 연대봉에서 보면 큰 목의 형상이 나타나 지금의 이름이 붙었다. 다른 곳보다 비교적 여행자들이 쉬어갈 깔끔한 카페와 자연산 생선을 다루는 식당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덕도와 가까운 거제에서 많이 잡히는 고랑치(등가시치)로 만든 매운탕이 일품이다. 그냥 쉬었다 가기 아쉬우면 낚시를 비롯해 후릿그물체험, 홍합따기 체험 등 어촌체험도 즐겨보자. 또 120년 전부터 이어져 온 전통 숭어잡이 ‘육소장망(그물을 깔고 물 빛깔과 물속 그림자의 변화로 숭어를 잡는다)’도 구경할 수 있다. 

외양포, 대항마을, 새바지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가덕도의 최정상 ‘연대봉
외양포, 대항마을, 새바지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가덕도의 최정상 ‘연대봉

주요 마을을 둘러봤다면 이제는 산꼭대기에서 가덕도를 조망해야 한다. 가덕도에서 가장 높은 연대봉(459.4m)으로의 산행이 뒤따르는데 너무 겁먹지 말자. 등산 초보라도 왕복 2시간에서 2시간30분이면 마칠 수 있다. 올라가는 코스는 여러 가지인데 대항마을-대항전망대를 구경하고 지양곡주차장에서 여정을 시작하면 된다.

T자 모양의 대항항
T자 모양의 대항항

연대봉까지 가는 1.55km의 길은 온통 나무로 채워져 있어 산이 아닌 숲을 걷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더운 여름에도 뜨거운 햇볕을 피할 수 있는 건 덤이다. 그렇게 연대봉에 다다르면 외양포항과 새바지항, 대항항, 국수봉 등이 만들어낸 장관을 마주하게 된다. 오른쪽으로는 거가대교와 천성항이 빚어낸 풍경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연대봉을 방문해야 하는 이유는 자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덕도가 일본과 질긴 악연으로 이어져 있는 만큼 연대봉도 그 역사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응봉과 더불어 임진왜란이 발생한 1592년 4월13일 대마도에서 부산포로 침략해 오는 왜군 함대를 최초로 발견한 장소다. 밤에는 횃불을 올리고 낮에는 연기를 피워 중앙 또는 변경 기지에 급보를 알리던 봉수대가 여전히 역사의 증거로 남아 있다. 

우암동마실길에서 바라본 예수상과 부산항대교 야경
우암동마실길에서 바라본 예수상과 부산항대교 야경

 

●우리가 기억해야 할 시간


가덕도를 벗어나도 일본 및 전쟁과 연관된 장소가 즐비하다. 우암동 소막마을도 그 중 한곳인데 아직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곳은 아니다. 그럼에도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조금씩 발걸음이 모이고 있다. 소막마을은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반출하는 소의 검역을 진행했던 검역소와 소막사가 있었던 곳이다. ‘열악하다’라고 표현하는 것 이상으로 힘들었던 피란민들의 어려운 실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의 아픈 과거와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지만 근대문화유산으로서 의미가 큰 곳이라 소막사의 원형을 복원 중이다. 소막사 커뮤니티센터 등의 시설이 2021년 12월 완공돼 우리의 지나간 역사를 재조명할 예정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우암동 마실길 등 동네 곳곳이 벽화로 채워지면서 화사한 면모도 갖추게 됐다. 

화사한 벽화가 우암동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화사한 벽화가 우암동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우암동과 소막마을의 골목을 쏘다녔다면 허기가 느껴질 터. 식사도 무언가 특별한 게 필요하다면 밀면이 제격이다. 당시 대표적인 피란민촌이었던 우암동에는 이북 사람들이 많았고, 고향에서 먹었던 냉면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냉면의 주재료인 메밀이나 고구마 전분은 비싸고, 구하기 힘들었다. 이를 대신해 미군 원조품으로 수급이 비교적 용이한 밀가루를 활용했고, 그렇게 밀면이 탄생했다. 밀면은 자연스레 부산에 녹아들었고, 지금은 부산시 대표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부산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 밀면은 우암동에서 시작됐다
부산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 밀면은 우암동에서 시작됐다

밀면을 내는 식당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우암동에 왔다면 부산 밀면의 원조로 알려진 내호냉면을 빠트릴 수 없다. 소뼈를 고아 만든 깔끔한 육수에 탱글탱글한 면과 새콤달콤한 양념이 어우러져 멈추기 힘든 맛을 낸다. 소화도 시킬 겸 해가 뉘엿뉘엿 질 때면 동항성당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SNS에서 뜨거운 반응을 일으킨 예수상과 부산항대교의 조화를 볼 수 있다. 일몰과 야경 모두 사진으로 담는다면 이번 여행의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부산의 베네치아, 장림포구
부산의 베네치아, 장림포구

●9컷으로 추억하는 부산


시간의 역사와 아픔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곳들을 둘러봤다면 마지막은 요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장소다. 해외여행이 힘든 2020년의 여름에는 더더욱 단비 같은 존재다. 바로 다채로운 색으로 ‘부네치아’라는 애칭이 붙은 장림포구다. 알록달록한 건물과 작은 배들이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부라노 섬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SNS를 통해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연인과 가족여행객이 몰려들고 있다.

알록달록한 문을 배경으로 찍은 ‘9컷 셀카’가 장림포구에선 필수다
알록달록한 문을 배경으로 찍은 ‘9컷 셀카’가 장림포구에선 필수다

장림포구는 원래 김 생산지로 유명했던 작고 조용한 포구였지만 공단이 들어서며 그 기능이 축소됐다고 한다. 그렇지만 장림포구 명소화 사업을 통해 어항을 정비하고, 문화촌, 놀이촌, 맛술촌 등 여행자를 위한 공간을 조성하면서 다시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위한 공간과 어묵 등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간이 식당, 기념품 가게 등도 만날 수 있다. 

장림포구 2층에는 카페, 식당, 공예품 전문점 등이 있어 구경거리도 충분하다
장림포구 2층에는 카페, 식당, 공예품 전문점 등이 있어 구경거리도 충분하다

알록달록한 공간이 많아 곳곳에서 인생샷을 남길 수 있음에도 장림포구의 시그니처는 ‘9컷 셀카’다. 파란색, 분홍색, 핫핑크, 민트, 노란색 등의 건물을 배경으로 9장의 사진을 찍어 한데 합하면 색다른 느낌의 작품이 탄생한다. 화려한 색에 맞춰 다양한 표정을 지으면 여행을 한층 더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렇다고 사진만 찍고 훌쩍 떠나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장림포구에서 맞이하는 노을은 여느 바다에서 보는 것처럼 가슴 속에 찐한 여운을 남기기 때문. 예정했던 일정보다 조금 더 시간을 내면 하루의 마무리도 더 근사해진다.

 

글·사진 이성균 기자 sage@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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