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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여행기자의 고백, 나는 천민 여행주의자였던 걸까?

이우석의 놀고먹기

  • Editor. 이우석
  • 입력 2020.08.03 07: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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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너스레 가득한 ‘넌 안 가 봐서 모르지!’
여행기자의 상식이 아닌, 무논리의 불만을 터트렸다. 

이집트 카이로 칸엘칼릴리 시장의 푸른 밤, 그날 밤도 난 낯선 여행자였다. 이젠 추억이 됐지만 아쉽지는 않다. 새로운 여행을 찾아냈으니까.
이집트 카이로 칸엘칼릴리 시장의 푸른 밤, 그날 밤도 난 낯선 여행자였다. 이젠 추억이 됐지만 아쉽지는 않다. 새로운 여행을 찾아냈으니까.

 

글쎄, 내 여행은 사치였던 걸까?  스스로 적용한 되뇜이지만 이젠 한국인, 나아가 인류 모두에게 해당하는 질문일 듯하다. 생각해 보면 얼마 안 됐다. 겨우 3월부터다. 코로나19의 팬데믹 이후 급격히 줄어든 이동, 집 밖을 두려워하는 개인과 타인을 믿지 못하는 사회, 그 거짓말 같던 변화가 이제는 만져질 듯 생생하다.


반대로, 늘 아파트 현관처럼 다니던 공항, 그리고 세 곳의 서울 톨게이트. 고속도로 휴게소와 항공사 라운지 등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가장 먼저 하늘 문이 굳게 잠겼다. 무거운 ‘자가격리’의 자물쇠 탓에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는 넉 달이다. 지난봄엔 지방 한 번 간다 하기도 어려웠다. 어딜 한 번 갈라치면 드라마 <킹덤>의 세자 이창이 동래, 상주, 문경에라도 온 것처럼 난리가 날 듯했다.


어제였나. 한 여름날 꿈처럼 그간 기억들이 스쳐 지났다. 상황은 딱 18년 전, 직업으로 처음 여행했을 때다. 매우 빠르게 빠져든 지난 기억 속에서  ‘그땐 전혀 알지 못했던 가치’를 깨달았다. 그리고 후회 섞인 복기(復碁)를 지금에야 하고 있다.


그래, 난 여행기자였다! 신문사에서 여행과 맛있는 음식에 관한 글을 썼다. 한 17년 했다. 빠닥빠닥한 여권에 입국 도장이라곤 고작 대여섯 개 정도(아! 일본은 스티커였으니 도장은 고작 두서너 개였다) 찍혀 있던 2004년 봄. 별안간 여행 담당을 맡았다. 매주 여행면과 레저면을 마감해야 했고 식도락 칼럼을 써야 했다. 니콘 쿨픽스 한 대를 사서 대천을 갔고, 다음 주는 강릉을 갔다. 대구에서 나고 서울에서 자란 탓에 ‘여행은 역시 바다’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신이 났다. 매주 가방을 챙겼다. 정말이지 여행을 떠나는 줄 알았다. 떠나는 날이면 꼭두새벽 잠이 깼다. 나날이 소풍이었던 셈이다.


해외도 많이 갔다. 먼저 홍콩을 갔다. 코즈웨이 베이도 가고 빅토리아 피크도 올랐다. 그리고 보름쯤 있다가 별이 뚝뚝 떨어지는 몽골 초원을 갔다. 몽골을 다녀온 기자가 몇 없을 때였다. 꽤 운이 좋았다. 그때부터 줄곧 여행을 기록하고 살았다. 우리 매체에서 여행이란 그리 인기 있는 담당은 아니었지만, 사실은 하고픈 이들이 많았다(점점 많아졌다). 버틸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의 도전을 수성했다. 2019년 12월31일 퇴직하는 날까지 여행과 식도락 담당으로 사직원을 낼 수 있었다.

때론 기내식이 나올 타이밍에 문을 열고 피지의 하늘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오만과 너스레 가득한 ‘넌 안 가 봐서 모르지!’
여행기자의 상식이 아닌, 무논리의 불만을 터트렸다.

 

때론 힘들기도 했지만 퍽 그럴싸했다. 모든 것이 ‘일’이었다곤 하지만 가끔은 굉장히 즐거운 경험을 했다고 회상(?)한다. 예를 들어 2004년 10월11일 저녁쯤 나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비비하눔 모스크 앞에서 갓 구운 샤슬릭에 보드카를 마셨다. 친구들은 합정동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2015년 이란 이스파한 시오세 폴 다리가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테라스 식당에서 맛본 늙은 양다리 구이는 지금도 ‘여러 면에서’ 잊을 수 없다. 단골인 괴테가  파우스트를 썼다는 라이프치히의 아우어바흐켈러 식당. 악마에게 1톤의 소금을 받고 영혼을 팔아 버린 게 분명한 이곳의 주방장이 ‘짜게 구운 지우개’를 내왔지만 여행의 추억만큼은 좋게 남았다.


어딘가 떠나 있었지만 소외라기보다는 피신에 가까울 정도로 운도 따랐다. 한반도가 태풍 매미에 휩싸였을 때 나는 리우데자네이루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카페징요를 마시며 남반구의 봄을 즐겼으며, 어느 추운 초겨울 밤에는 카이로 칸엘칼릴리 시장 골목 엘피샤위 카페에 앉아 물담배를 피우며 민트차를 마셨을 뿐이다. 몇 년 전 가을엔 한낮 기온이 40도가 넘는 요르단 제라시에서 북어처럼 말라 버릴 뻔하다가 또 바로 두어 달 후엔 핀란드 키틸라의 영하 43도 강추위에 오로라를 기다리다 냉동식품이 될 뻔한 추억도 있다. 마터호른과 희망봉도 올랐으며 마추픽추 중앙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하다못해 수에즈 운하와 삼협댐에도 가 봤다. 지리 교과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지명에 발자취를 남긴 셈이다.

이틀 새 2m의 눈이 내린 아오모리의 겨울 속에서도 난 여행자였다
남해 바다에서 잠시 요트 키를 잡았을 때도 방랑자가 아닌 여행자였다

모두에게 귀한 여행을 탕진하듯 다니다 보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으쓱대다 못해 오만해졌다. 누군가에 호통치듯 내 여행을 자랑했다. 사사건건 ‘넌 안 가 봐서 모르지’로 일관했다. 털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커피란 파울리스타처럼 뜨거운 것만이 진리인 척 굴었고, 한정식은 강진에서만 먹는 것이라 강변했다. 돈가스를 먹고 있을 땐 잘츠부르크의 슈니첼을 얘기했고 소고기를 먹을 땐 장흥삼합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남들이 부러워할수록(정말 부러워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공격성은 더욱 심해졌다. 인스타그램의 ‘좋아요’ 개수가 계급장이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여행의 소중함을 까맣게 잊은 때가.


생각해 보면 내겐 너무 과한 여행의 기회가 있었다. 공항을 시청역보다 더 자주 드나들었고 KTX는 당시 내가 가장 자주 탄 전동 열차였다. 산지에 매주 갈 수 있으니 서울에선 생선회를 먹지 않았다. ‘한국의 만두나 우동 따위’는 그저 포만감만을 위한 것이라 여겼다. 지갑엔 늘 약간의 유로화와 100달러 지폐, 그리고 넓적한 1,000엔짜리가 들어있었다. 어차피 또 나가겠지 하는 생각에 재환전을 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미처 느끼지 못한 ‘호사’를 당연한 ‘배당’ 정도로 생각하고 지냈다. 


좁은 마음속 오만이 가득 차면 불만으로 삐져나오게 마련이다. 당연히 비이성적 투정도 무논리의 불만도 따랐다. 여행기자로서의 상식적 비판을, 그때 전혀 하지 못했음을 고백해 둔다. 여행이 일이었으니, 그 일의 소중함을 미리 알았더라면 지금 이처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땐 어려서 그러지 못했다. 어쨌든 기계적 입국 도장은 세 권의 여권을 꽉 채웠고 지구본을 룰렛처럼 빙빙 돌려 못 가 본 곳이 나온 이에게 끔찍한 벌칙을 준대도 불안하지 않게 됐다. “이번에 가족여행을 떠나는데 어딜 가야 할까?” 여행이 귀한 친구들의 진심 어린 질문에도 “여행사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눈 감고 클릭하다 제일 먼저 열리는 데를 가라”라며 오만한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미안했다. 친구야).

 

남들 부러워할 사진만 찍어대는 ‘천민 여행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

 

더욱 여행이 귀해진 시기. 타는 듯한 금단의 갈증에 시달리다 다시금 여행이 무엇인지 돌이켜보고 있다. “격리돼도 좋으니 당장 나가고 싶어요.” 작가 생활을 하는 후배가 소주잔에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동시에 모두 태양광 작동 인형처럼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동병상련이라고 엉덩이 가려움증에 시달리는 이들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모두들 허가되지 않으니 더욱 절실함을 느끼고 있다.


누구에게나 여행은 그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영양제였고 빛나게 하는 광택제였다. 그들이 여행작가든 효도여행을 떠나는 부모든 상관없다. 어느 누구라도 마음대로 여행하지 못하는 작금의 현실이 우울할 뿐이다. 남들이 ‘덜’ 가 본 어디를 가고 또 무엇을 하고, 또 SNS에 자랑하고. 그런 여행만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겉으론 일을 한다지만 사실 내면에는 제어할 수 없는 과시욕이 사납게 으르렁대고 있었다. 입국 도장을 모으기 위해, 남들 부러워할 사진만 찍어대기 위해 떠나는 ‘천민 여행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 


‘캐리비안베이 따라온 시어머니’ 같은 여행에도 엷지만 진한 소중함이 서렸음을 알게 된다. 다행인 것은 아직 너른 우리 땅이 남아 있단 사실이다. 비록 봄꽃의 릴레이는 놓쳤지만 여름이 미처 지나지 않았다. 당장 부산을 가고 목포를 가련다. 대구 동성로에서 커피를 마시고 태안에서 저녁을, 전주에서 해장을 하고 싶다. 사치품이 아닌 생필품으로서의 여행을, SNS ‘좋아요’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누려 볼 작정이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본 명소를 ‘확인차’ 한곳씩 다니기도 했다. 물론 세계사 교과서에 사마르칸트 비비하눔 궁전은 나오지 않았다.

수많은 여행을 일기에 새겼지만 내 여행은 8기통 승용차나 고급 만년필 따위가 아니었다. 생존에 절실한 소금이나 돼지고기였다는 것을 18년째에야 겨우 깨달았다. 역병 덕(?)에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짙은 화장으로 미장하듯 서너 겹 바른 여행이 열병을 앓고 나서 비로소 뽀얀 생얼을 되찾은 셈이다. 나는 파리 생제르맹 카페, 레 되 마고(Les deux magot)의 카페올레 대신 망원동 이디야 커피숍에 앉아서, 아직 내게 남은 수많은 여행을 기대하고 있는 중이다. 

 

이우석의 놀고먹기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지난해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 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글·사진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  에디터 천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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