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럭저럭 시월입니다. 오로지 옷장 관리의 관점에서 계절의 변화는, 귀찮다면 귀찮고 재밌다면 재밌는 일인데, 올해는 꽤 집중해서 그 일을 해냈습니다. 출장과 여행 위주로 구입했던 흡습, 건속 기능성 옷들이 기능 한 번 제대로 뽐내지 못한 채 내년을 기약하게 되었습니다. 등산, 요가, 클라이밍을 위해 산 옷들도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한 건 마찬가지고요. 청바지와 티셔츠, 잠옷만 생고생을 했습니다.
내친 김에 다림질이 귀찮아 손도 대지 않았던 옷들을 꺼냈습니다. 늘어놓고 보니 옷을 살 당시의 마음이 하나씩 기억납니다. ‘공식 석상’을 위해 목돈을 들인 정장은 아직도 긴장한 모습이고, 민폐 하객이 될 순 없다며 마련한 원피스는 주뼛거리고, 노련한 강사로 보이려고 주문한 블라우스는 어깨가 축 처져 있습니다. 저를 담았던 옷들은, 그 당시의 마음 모양대로 굳어져 있더군요.
꽤 긴 시간을 들여 꾸깃꾸깃한 주름을 폈습니다. 또 긴장되고, 주뼛거려지고, 도전이 필요한 시간이 찾아올 테고, 그러면 빳빳하게 리셋된 옷들이 어떤 기능을 하지 않겠습니까. 내일은 ‘트래비아카데미’의 첫 온라인 수업을 위해 다림질한 블라우스를 입고 제집 거실 책상 앞에 앉을 겁니다. 반들반들하도록 교복을 다림질해 주셨던 어머니의 마음이 이제야 읽힙니다.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때와 장소에 맞는 옷을 잘 고를 수 있다면, 그 옷이 우리를 도울 겁니다. 그러자고 그동안 열심히 옷장을 채워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현명하고 적당하게 여행하는 방법도 옷장에 넣어 두셨을 겁니다. 거기 없다면 여기 <트래비>의 서랍에 넣어 두신 겁니다.
< 트래비 > 부편집장 천소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