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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포도는 시어 터졌을 거야”

이우석의 놀고먹기

  • Editor. 이우석
  • 입력 2021.01.01 14:07
  • 수정 2021.01.04 19:5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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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여행에 대해 불평하기로 한다. 뭐, 예전에도 일이라서 했지. 그리 좋아했던 건 아니다.

목가적으로 보이는 알프스 언덕에는 사실은 벌레도 많고 소똥 냄새도 많이 났다. 당장 못 떠나서 하는 불평이 아니다. 암, 그렇고 말고
목가적으로 보이는 알프스 언덕에는 사실은 벌레도 많고 소똥 냄새도 많이 났다. 당장 못 떠나서 하는 불평이 아니다. 암, 그렇고 말고

●여행의 걸림돌


이럴 줄 예전엔 전혀 몰랐다. 예전만 해도 내게 여행의 가장 큰 장애 요인은 질병, 천재지변, 테러가 아니었다. 2017년 초 지카 바이러스가 창궐할 때 쿠바를 갈까 진지한 계획을 세운 바 있다. 머리가 작아지는 줄 알았다고 주변에 둘러댔다. 고백컨대 같은 해 가을, 라스베이거스 콘서트 총격 사건 직후 패키지 상품을 검색한 적도 있다. 항공권 포함 3박 4일에 70만원대 가격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도널드 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에서 일어난 가장 놀라운 일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클린턴 여사처럼 깨끗이 포기했다.


내게 가장 큰 걸림돌은 아무래도 환율과 물가였다. 여행이란 무조건 돈이 든다. (내 와이프처럼) 집에 가만있어도 많은 돈을 쓰긴 하지만 여행을 떠나면 평상시보다 더 쓰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물가가 비싼 나라를 다녀온 후 가난한 여행자는 닌자 표창처럼 날아드는 신용카드 고지서 세례에 가슴 철렁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야만 한다. 

시원한 몰디브 해변에서 받아드는 아침상. 바닷바람이 눅눅해서 김 따위는 도저히 먹을 수 없을 정도다
시원한 몰디브 해변에서 받아드는 아침상. 바닷바람이 눅눅해서 김 따위는 도저히 먹을 수 없을 정도다
자그레브의 군밤 장수 할아버지는 내게 유럽에서 가장 비싼 군밤을 팔아 치웠다
자그레브의 군밤 장수 할아버지는 내게 유럽에서 가장 비싼 군밤을 팔아 치웠다

●대포보다도 강하게 남은 기억들


자연과 일상이 다른 나라를 가는 것은 여행의 매력, 심장이 오그라드는 물가 비교도 재미있는 일이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스위스 발레주의 근사한 산장 호텔에 묵으면서 1초당 숙박요금을 계산해 보는 일이란, 심심한 전원 속에서 할 수 있는 일 중 꽤 흥미로운 일이다. 착각하고 미니바의 칫솔이라도 사용한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익스트림 스포츠를 한 것처럼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친구들에게 나눠 줄 에멘탈 치즈를 사올까 했지만, 차라리 그 돈이면 국내에서 젖소를 사서 키우는 게 나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포기했다. 맛은 너무도 익숙했지만, 마카로니와 감자는 내가 아는 가격이 아니었다. 보기에 좋은 풍경이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단지 스쳐 지날 뿐인 관광객에게 스위스는 알려주었다.


대림절 축제가 한창인 크로아티아의 한 공원에서 썩 달달한 군밤을 사고 거스름돈을 기다리다, 군밤장수에게 꿀밤을 몇 방 먹이고 싶은 생각이 든 적도 있다. 밤나무 묘목을 샀대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수도 없이 되뇌다 잠이 들었다. 아마도 그는 자그레브에서 가장 비싼 빌딩을 소유하고 있진 않을까. 다음날 올라간 구도심에선 예정대로 정오에 울려 퍼진 커다란 대포 소리가 깊은 감명을 주었다. 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튀긴 민물 생선을 삶은 콩과 함께 차린 점심 플레이트의 빌(bill)지였다. 그 얇은 종이가 두터운 철갑 대포보다 더 강한 기억을 남겼다.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scream)’ 속 주인공이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마도 식당에서 고지서를 받아 들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절규였든 비명이었든 모두 해당된다. 북구 최고 부국인 노르웨이는 높고 근사한 빙하처럼 장대한 물가를 자랑한다. 노르웨이어에는 ‘싸다’는 단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현지인들처럼 수돗물을 마시고 신선한 과일과 함께 맛좋은 대구 수프 정도를 챙겨 먹자면 알뜰하게 다녀올 수 있다. 관광지이자 역사적 장소인 베르겐에선 모두들 놀란 눈을 하고 있다. 너무도 멋진 풍경과 그만큼 ‘합당한’ 가격이 그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온통 리조트 섬 투성이인 몰디브는 모든 재화를 타국에서 가져와야 하니, 아시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축에 든다. 하지만, 달력 그림처럼 아름다운 한 리조트에서 ‘건축설계용 지우개’를 넣고 조려 낸 쇠고기 스튜를 먹고 난 후, 편견이 눈 녹듯 사라졌다. 적어도 소금만큼은 엄청나게 저렴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정부에서 그냥 공짜로 나눠 주는지도 모른다. 소금에 대한 보편적 복지가 잘 이뤄지고 있는 나라인데 다른 물가 관리는 잘 이뤄지지 않고 있는 듯했다. 산호 모래 사장에서 맛보는 아침식사야 늘 그럴 듯하다. 다시 한 번 되묻겠다. 남자 기자 둘이 먹는 근사한 해변의 아침 식사에 당신은 80유로를 지불할 만큼 부유한지를.

빨리 파산하고 싶다면 런던에서 택시를 타고, 서서히 망하고 싶다면 전철을 여러 번 타면 된다
빨리 파산하고 싶다면 런던에서 택시를 타고, 서서히 망하고 싶다면 전철을 여러 번 타면 된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침이 고이는 


해외여행을 많이 다니니 다양한 질문을 받는다. 가끔은 생각지도 못했던 물음도 있어 ‘늘 아는 척’해야 하는 날 곤란케 한다. 그중 상당한 재력가인 누군가가 내게 “빨리 파산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어요”라 물어 본다면 지금의 나는 2초 만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 니스 외곽에 머물며 늘 택시를 타고 다니며, 담배를 3갑씩 피우세요”라거나 “보스턴에서 진찰을 받고 미뤄 왔던 간단한 외과수술을 받으세요. 아, 물론 넉넉히 입원 가료 후 퇴원하셔야 합니다” 등이다. 언젠가 템즈 강변 야경을 구경하자고 탄 런던 택시(Black Cab). 하지만 일행 모두 미터기 숫자만 바라보고 있었던 기억이 이제야 어렴풋이 난다. 하긴 런던에선 지하철만 자주 타도 서서히 파산할 수 있다.


도쿄에서 이용하는 재화의 물가는 대체적으로 편차가 큰 편인데 특히 음식과 숙박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 크기는 공중전화 부스만 하지만 가격이 꽤 저렴한 비즈니스 호텔을 이용하면 그나마 파산 속도가 늦다. 하지만 욕실이 딸리고 TV와 테이블이 있는 중심가 호텔에서 자려면 예금 잔고 중 많은 부분을 써야 한다(그래 봤자 집보다는 훨씬 못하다). 가장 확실히 물가 편차를 느껴 보려면 긴자에서 후구(복어) 코스를 먹거나, 새로 옮긴 스키지 시장에서 ‘이쿠라우니죠토로돈부리(연어알 성게 참치뱃살 덮밥)’를 주문하면서 ‘오모리데구다사이(곱빼기로 주세요)’라고 살짝 말하면 된다. 잘 먹고 나서 ‘계산서의 복수’를 겪어 봐야 한다. 그래야 다시 여행 가기 싫어진다.

해외 출장길에 치즈 등 선물을 요구하는 동료나 친구가 있다면? 차라리 서울에서 뭔가를 사 주거나 미리 시비를 걸어 절교하는 편이 낫다
해외 출장길에 치즈 등 선물을 요구하는 동료나 친구가 있다면? 차라리 서울에서 뭔가를 사 주거나 미리 시비를 걸어 절교하는 편이 낫다

2006년 다녀왔던 우즈베키스탄이란 나라는 정말 희한하다. 통용 화폐의 최고 단위 100숨(cym)이 약 1,000원 정도. 신용카드가 통용되지 않을 것이란 현지 여행사의 조언에 무려 500달러를 바꾸는 바람에 난 검은 봉투에 가득한 지폐 약 550장을 일정 내내 짊어지고 다녀야 했다. 전통시장 바자르에서 아코디언을 살 때 80장을 꺼냈고 사슬릭과 우표를 사며 10여 장을 꺼냈지만 결국 250여 장이 남았다. 그들은 끝내 내 ‘숨’을 다시 달러로 바꿔 주지 않았다. 숨이 막히는 순간이었다. 같은 CIS 국가인 키르기즈스탄으로 이동해서 사용할 수 있을 거란 안일한 생각을 했지만, 그들은 철저하게도 자국 화폐 ‘솜’을 사용하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 물가는 쌌지만 결국 여행경비는 (지금도 갖고 있는) 무거운 종이 쪼가리로 인해 비싸게 먹혔다. 숨조차 쉬기 어렵다. 밭을 가는 김태희고 뭐고 난 그들에게 커다란 기여를 한 외국인임에 틀림없다. 낙전수입이랄까.


제길, 다행이다. 여행을 못 가니 돈이 굳고 있다. 아무도 믿지 않을 테지만 정말 여행을 가기 싫어하는 소리다. 진짜다. 그 포도는 떠올리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그래서 끔찍이도 신맛이 날 테니까. 난 따지 않으련다. 여행은 돈이 많이 드니까. 정말로. 

 

*이우석의 놀고먹기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인스타그램 playeatlab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김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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