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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온도

  • Editor. 손고은 기자
  • 입력 2021.02.19 10:58
  • 수정 2021.02.19 1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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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다원
대한 다원

그늘진 마음에는 볕이 필요하다.
초록 마을 보성에서 언 몸을 녹였다. 

 

●겨울은 가고 봄이 온다


제한된 여행의 크기와 비례하게 마음은 무채색으로 변해갔고, 나는 어떻게든 차갑게 식어가는 마음에 온기를 채우려 애썼다. 어느 날엔 노래를 불렀고, 또 어느 날엔 그림을 그리다가 술을 마셨다. 그러다 결국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았는데, 그건 바로 식물을 곁에 두는 일이었다. 작은 생명체를 하나둘 집에 들이자 생기가 돌았다. 바라만 보아도 싱그러운 기운을 얻었고, 새싹이라도 쑤욱 틔우는 날이면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초록이 주는 에너지는 이토록 엄청났다. 파란 마을 대신 초록 마을을 찾아가보기로 생각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대한다원 차밭은 봄부터 초여름 사이에 연둣빛 새잎으로 가득해 싱그러운 모습을 뽐낸다
대한다원 차밭은 봄부터 초여름 사이에 연둣빛 새잎으로 가득해 싱그러운 모습을 뽐낸다

내가 아는 초록 마을 중 하나는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다. 165만㎡에 이르는 녹차밭과 삼나무가 사시사철 초록 물결을 그리는 대한다원이다. 1939년 개원한 대한다원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폐허가 됐지만 1957년 이후 차근차근 약 300만 그루의 나무와 차밭으로 거듭났다. 압도적인 규모와 이국적인 풍경에 각종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심심치 않게 등장했고, 이런 이유로 보성 하면 녹차밭을 연관 검색어로 떠올리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 테다. 

 

차밭을 오르는 길은 세 갈래로 나뉜다. 차밭 가운데로 중앙 전망대가 위치하는데 일직선으로 곧장 오르는 길이 가장 빠르다. 하지만 여유를 가지고 초록의 숨결을 좀 더 느끼고 싶다면 중앙전망대부터 바다전망대까지 돌아가는 길을 걷자. 참고로 오른쪽으로 가면 향나무 길을 만나고, 왼쪽으로 가면 편백나무 길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의 가장 높은 곳엔 남해 바다까지 내려다볼 수 있는 바다전망대가 자리한다. 


차밭은 사계절 내내 초록의 싱그러움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겨울의 차밭은 새로운 생명을 기다리는 시기다. 따뜻한 봄날, 건강한 어린잎이 자라려면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야 한다. 겨울과 봄 사이, 그날 오후 차밭에는 다소 찬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차밭에서는 여유가 느껴졌다. 언젠가 겨울은 지나고 봄이 올 것이라는 걸 안다는 눈치다. 차밭에 연둣빛 물결이 생겨날 즈음이면 잃어버린 여행도 되찾을 수 있을까? 간절한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구름은 걷히고 해가 반짝 빛났다. 

녹차 잎을 먹고 자란 돼지로 만든 떡갈비
녹차 잎을 먹고 자란 돼지로 만든 떡갈비

●초록으로 채우는 하루 


초록색 녹차밭 풍경으로 눈의 피로를 풀었으니 이제는 녹차로 허기를 채울 차례다. 보성에는 녹차 떡갈비가 있다. 녹차 잎을 섞은 사료를 먹고 자란 돼지로 만든 떡갈비다. 녹차에는 지방을 분해하는 성분이 함유돼 있어, 돼지의 지방을 분해하고 육질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은 물론 잡내를 없애주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한우 떡갈비의 경우 녹차의 카테킨 성분이 소고기의 마블링을 없애기 때문에 소에게 녹차 잎을 먹이지 않고 양념에 녹차 가루를 섞어 만든다. 녹차 떡갈비로 보성군 맛집에 등극한 곳이 바로 ‘보성 녹차 떡갈비 원조’다. 참숯에 노릇하게 구운 녹차 떡갈비와 함께 약 스무 가지 반찬을 선보이는데 이곳에선 떡갈비가 나오기 전부터 화려하게 오른 반찬만으로도 밥 한 공기 비우는 일이 흔하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한옥으로 추정되는 고택이 숙박시설을 겸한 카페 ‘춘운서옥’으로 다시 태어났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한옥으로 추정되는 고택이 숙박시설을 겸한 카페 ‘춘운서옥’으로 다시 태어났다

떡갈비 식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카페로 변신한 고택이 자리한다. 춘운서옥. 글과 그림이 있는 초봄의 구름과 같은 가옥이라는 의미를 담은 곳이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한옥으로 추정되는 고택은 1987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52호로 지정됐다가 관리상의 어려움 등으로 문화재 지정이 해제됐다. 그러나 지난 2011년, 보수공사를 거쳐 전통 가옥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카페와 숙박시설을 겸한 춘운서옥으로 다시 태어났다. 약 6,611㎡ 규모의 부지에는 모과나무와 소나무 등 20종 이상의 수목이 잘 자라고 있다. 그 모습이 한옥과 함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잘 가꾼 정원을 지나 카페로 가는 길이 다소 멀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춘운서옥

춘운서옥은 다시 찾고 싶은 곳이다. 한 번만으로는 그 매력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날 나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녹차가루를 골고루 묻힌 초콜릿과 따뜻한 녹차 라떼를 마시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춘운서옥을 다시 찾는다면 그날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해가 질 무렵부터 어둠이 내려앉은 밤까지 눌러앉아 생각에 잠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예 이불을 펴고 하룻밤을 보내고 와야지, 라고도 생각했다. 다향으로 가득한 하루다.

보성 녹차로 만든 녹차 라떼
보성 녹차로 만든 녹차 라떼

●소설 따라 벌교 


소설은 허구적 이야기지만 분명 현실을 반영한다. 우리가 소설 속 주인공들의 말과 행동에 때때로 공감하거나 분노하는 것도 전부 주변 어디에선가 일어날 법한 일이기 때문이다. 

태백산맥 문학길
꼬막거리
꼬막거리

소설 <태백산맥>도 보성군 벌교읍을 배경으로 여수·순천사건부터 한국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의 시대적 상황을 담았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10권에 걸쳐 간행된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이야기는 해방과 전쟁을 거친 격동기, 벌교를 무대로 펼쳐진다. 그리고 지금도 벌교 읍내 곳곳에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 누비고 다녔던 거리와 건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태백산맥>이 소설이지만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철다리
철다리
태백산맥 문학관
태백산맥 문학관
소화의 집
소화의 집

여전히 남아 있는 흔적을 쫓아보기로 한다. 벌교역을 기점으로 벌교천을 따라 태백산맥 문학관과 소화의 집, 현부자 집, 소화다리, 보성여관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 길을, 사람들은 태백산맥 문학거리라 부른다. 특히 보성여관은 <태백산맥> 소설을 잘 모르더라도 누구에게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다. 소설 속에서는 ‘남도여관’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는데, 실제 지금도 이곳은 벌교를 찾는 이들에게 특별한 숙소이자 카페,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보성여관
보성여관

판자벽에 함석지붕을 얹은 전형적인 일본식으로 지어진 건물은 원형 그대로 보존돼 특별한 가치를 지녔다. 다다미방을 갖춘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도 좋고, 차 한 잔의 여유를 누리며 근대 문화의 매력에 푹 빠져도 좋겠다. 2층 다다미방에서는 판소리나 실내악 등 공연과 인문학 강연 등이 열리기도 한다. 한쪽에는 <태백산맥> 이야기를 원고지에 필사할 수 있도록 꾸민 작업실도 마련돼 있다. 사각사각. 잠시나마 조정래 작가의 글을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옮겨 적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잔잔해진다.

현부자 집
현부자 집
소화다리
소화다리
홍교
홍교
채동선 생가
채동선 생가

보면 볼수록 친근한 동네다. 1980년대 소설에서 등장하는 건물과 다리와 같은 흔적이 대다수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만큼 시간이 흘렀지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코로나19로 태백산맥 문학관이며 현부자네 집 등 문을 닫은 곳들이 꽤 있지만 벌교천을 가로지르는 기찻길이며 벌교 시장 앞에서 과일이나 해산물, 채소 등을 팔고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정겹다. 마을 구석구석을 걷다보니 왠지 소설 속 주인공 소화와 정하섭의 애틋한 모습이 생생하게 눈에 아른거린다. 

 

▶태백산맥 문학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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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체험한 우수여행상품
참좋은여행 [녹차향기 가득한 보성 당일여행]

 

보성 글·사진=손고은 기자 koeun@trave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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