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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 꿈에서 본 거리일 거야

  • Editor. 이우석
  • 입력 2021.03.0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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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카이는 정말 간만이다. 
해변을 걷고 펍에서 맥주를 마시던 그날이 
몇 년을 돌고 돌아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왔다.

어젯밤 난 런던에서 IPA에 취한 채 시내를 걷다 지쳐 돌아와 버렸다. 꿈이었다
어젯밤 난 런던에서 IPA에 취한 채 시내를 걷다 지쳐 돌아와 버렸다. 꿈이었다

●Ticket To The Tropic


지금 나는 런던 트라팔가 광장(트라6가였던가?) 앞 ‘타이거타이거’ 펍에서 럭비 유니온 경기와 손님들을 번갈아 구경하며 코츠월드 IPA를 마시고 있다. 늦은 점심으론 고기파이를 먹었고 저녁은 광어 튀김 한 조각과 맥주로 그냥 때울 셈이다. 호텔이 퍽 가깝지만 일찍 돌아가기 싫었다. 영국 일정 중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호빗족을 위해 고안된 작은 침대 하나에 갈색 호마이카(Formica) 탁자만이 덩그러니 놓인 이비스 버짓 런던 트라8가 호텔은 창문도 작고 스탠드도 어둡지만 피카딜리역과 가깝고 바깥 도심의 풍경도 나쁘지 않다. 제법 분위기가 좋지만 많이 마실 순 없다. 내일 아침 일찍 히스로 공항으로 가 곧장 카이로로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클래스로 업그레이드했지만 라운지를 이용할 시간은 없다. 면세점에서 유심칩도 사야 하고 ‘폴스미스’에 들러 여름옷도 좀 준비해야 한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젊은이들이 템스 강변에 앉아 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젊은이들이 템스 강변에 앉아 있다

뭐, 아침 식사는 홍차 한 잔이면 된다. 그제 사 둔 독일 잡곡빵(Volkornbrot)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딱히 맛있진 않지만 건강에 좋아 보이긴 한다. 먹는 코르크(?)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완벽하게 ‘방수 처리’가 된 그 빵은 메모판으로 쓰기에 딱 좋지만 가져갈 순 없다. 짐은 아예 풀지도 않았으니 눈뜨자마자 호텔 바로 앞 카페 ‘잇피리어드(EAT.)’에 앉아 홍차 한 잔 마시고 택시를 불러 출발하면 된다.


이집트에선 카이로와 수에즈를 차례로 들러야 하지만 기분이 좋다. 이틀 후 바로 필리핀 보라카이로 떠나는 그야말로 ‘열대행 티켓(Ticket To The Tropic)’을 끊어 놓은 덕분이다. 생각해 보니 보라카이는 정말 오랜만이다. 화이트 샌드비치 스테이션의 그 노천 바비큐 식당은 아직도 잘 있을까. “세븐 혼드렛 뻬소(700페소) 바베큐 쁘리 쁘리(바비큐 무제한)~” 행인들을 연기 자욱한 가게 안으로 끌어들이려 목청껏 지르는 가게 종업원들의 고함 소리가 귓가에 생생하다. 그곳에 가자마자 마스크부터 벗어던지고 얼음을 넣은 컵에 ‘싼’ 미구엘 프리미엄을 따라 마셔야지. 그게 열대 스타일이니까. 어마어마한 석양이 태평양에 잠기면 저녁이 밤으로 이어지고, 그 밤을 충분히 즐겨야겠다. 에어컨과 실링팬이 동시에 돌아가는 리젠시 호텔에선 죽음보다 깊은 잠을 취할 수 있을 테니까.

런던의 겨울은 으슬으슬하고 담배는 사납도록 비싸다. 이제 그만 호텔로 돌아가야겠다. 

산미구엘 맥주 맛이야 마스크를 걸친 지금도 즐길 수 있지만 뭔가 아주 다르다
산미구엘 맥주 맛이야 마스크를 걸친 지금도 즐길 수 있지만 뭔가 아주 다르다

●지난 오늘들의 잔상


하하하. 여기까지 모두 ‘뻥’이다. 어제 새벽의 꿈에서 겪은 이야기다. 써 놓고 즐거워지기는커녕 주룩 눈물이 난다. ‘구금’ 생활이 1년이 지났지만 당최 실감나지 않는다.


이런 꿈을 꾸게 된 것은 순전히 페이스북 탓이다. 친절한 페이스북은 아침마다 ‘○년 전 오늘’의 내 포스팅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술에 잔뜩 취해서 올린 포스팅, 그래서 전혀 기억도 나지 않는 사진 한 장도 빠뜨리지 않는 그 섬세함에 감격하고 또 일기를 쓰지 않아도 됨에 감사한다. 저커버그씨.
(페이스북에 따르면) 몇 년 전 오늘의 나는 체코 플젠 필스너우르켈 지하 발효실에서 차가운 라거 맥주를 마시며 황홀해하고 있었다.

 

그 이듬해엔 카타르 도하 구도심 바자르의 연기 자욱한 카페에서 파인애플향 물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도하 바자르의 이발소 앞은 예전의 강남역 뉴욕제과처럼 굉장히 번잡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5년 전 어느 날의 ‘고증’에 따르면 미국 샌디에이고 라호야 비치에 모인 물개 떼를 보고 난 후,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생크림을 수북하게 올린 12중 팬케이크에 메이플 시럽을 듬뿍 짜며 혈당을 올리는 데 열중하기도 했던 것 같다.

참으로 반갑고도 서글픈 ‘오늘들’이다. 신기한 사실은 그 ‘오늘’ 중에 내가 서 있던 상파울루 세(Se) 광장이나 파리 샹젤리제 거리를 가득 메운 이들 중 마스크를 쓴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단 사실이다(도쿄 지유가오카에는 몇 명 있었다). 요즘 지구별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정말이지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할 수밖에 없다.


바로 지난해는? 뭔가 잔뜩 독이 올라 불평 중이었다. 중국 어딘가에 역병이 돌고 있다는데 대체 그게 뭐기에 중국 정부가 호들갑을 떨고 있냐는 식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해외 출장이 줄줄이 취소되고, 야심차게 기획했던 ‘홍콩에서 술 먹고 오기’ 무박 4일 상품이 어그러진 시기였던 것 같다. 불과 1년 만에 이렇게 연금(?)될지는 예상치도 못한 채 툴툴대기만 했다. 정말 멍청이였다.

초벌의 어둠으로 칠해진 해변 거리는 분주했다. 다만 응당 그곳에 있어야 할 나는 이불 안에서 발버둥치고 있었을 뿐
초벌의 어둠으로 칠해진 해변 거리는 분주했다. 다만 응당 그곳에 있어야 할 나는 이불 안에서 발버둥치고 있었을 뿐

●열대 거리를 헤매며


암흑의 세월은 길었다. 나도 그 생활에 꽤 익숙해졌을지도 모른다. 편의점 측의 배려 덕분에 필스너 우르켈도, 팬케이크도 지금도 집에서 충분히 먹고는 있지만 옛 포스팅 속에서처럼 만족스럽진 않다. 속은 다리미라도 삼킨 것처럼 묵직할 뿐이다. 얼마 전 페이스북의 ‘오늘’에 필리핀 보라카이가 떴다. 아마 그때는 휴가 중이었고, 페이스북 친구들을 약 올리느라 올렸던 사진 몇 장이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온 것 같다. 죄책감 탓이었을까, 아니면 업보라고나 할까. 기어코 빌어먹을 꿈까지 꾸고 말았다. 

열대행 티켓을 사서 들어간 필리핀 보라카이 해변과 석양은 여전했고, 꿈인 것 역시 여전했다
열대행 티켓을 사서 들어간 필리핀 보라카이 해변과 석양은 여전했고, 꿈인 것 역시 여전했다

5인 이상이 모이면 안 되는데 해변을 걸었고 펍에서 맥주를 마셨다. 그게 끝이다. 아침 최저 영하 19도 파주시의 침대 위에서 물개처럼 허리만 빼죽 세운 채 꿈속의 열대 거리를 비몽사몽 그리워할 뿐이다. 해외 여행이라니, 그것도 열대 보라카이 해변이라니. 보통은 꿈의 내용을 금세 잊어 버리는 편이고 대부분 흑백으로 꾸는 것 같은데 이날 보라카이의 꿈은 4K UHD 비디오처럼 생생했다. 다시 되새길 수 있을까 싶어 잠을 청했지만 이어진 꿈의 배경은 어느 치킨집이었다. 이젠 꿈에서도 5인 미만 거리두기를 염두에 둘 정도로 큰 스트레스가 뇌 속에 버티고 있나 보다. 


오늘도 페이스북 덕분에 핀란드 키틸라의 추억을 돌이켜보며 몸서리를 쳤다. 이러다간 현실이 더욱 우울해질 것 같기도 해서 다시는 매년 리마인드 포스팅이 나오지 않게 죄다 지워 버릴까도 생각했다. 간밤에 쓴 러브레터나 취한 상태에 남긴 카카오톡처럼 아침에 소멸되어야 속이 편할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관두기로 했다. 왠지 아깝기도 하거니와 이것도 삶의 일부이겠거니. 암울한 최근 1년의 어두운 포스팅도 두고두고 ‘오늘’을 미래에 전할 테니, 그것을 보고 위안을 받을 수 있을 때를 기대하고 있다. 꿈이라도 좋으니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어서. 

 

*이우석의  놀고먹기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인스타그램 playeatlab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김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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