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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친구들은 어디에서 무얼 할까?

  • Editor. 이우석
  • 입력 2021.04.01 0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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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자유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우리는 모두 비밀스런 아지트에 꽁꽁 묶여 버리고 말았다.

 

●여행을 막는 무장단체


십수년간 정기적(기계적)으로 여행을 가며 먹고 살아온 직업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길이 막힌 지 1년도 넘었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여행 결핍증에 시달리다 못해 정신줄을 놓고 살아간다. 이를테면 외딴 산장처럼 생긴 비밀 아지트 내 인질 의자에 묶여 있는 기분이다. 

 

입에는 더러운 발수건으로 재갈을 물렸고 두 손은 의자 뒤로 전선에 꽁꽁 묶였다. 악취와 오십견 탓에 둘 다 견디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나를 꼼짝달싹 못하도록 해 놓은 자는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는 무장단체 ‘COVID-19’의 행동대장이다. 섬세하고 꼼꼼한 그는 문을 닫고 나가기 전에 내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설사 아스트라제네카 특공대가 널 구하러 오더라도 다신 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거야. 여행을 간다고 하면 모두가 댓글로 널 비난할 테니.” 


멍하다. 가렵기도 하고 살짝 현기증도 났다. 졸음이 쏟아진다. 문득 “언제 다시 한 번 오자”로 끝냈던 친구들과의 수많은 여행들이 떠올랐다. 아니, 친구보단 ‘일행’이 더 적확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친구들과의 거리두기’ 정책 탓에 당분간 일행이란 없을 테니 말이다.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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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의 추억


생각해 보니 많은 이들과 여행을 했다. 사실 취향이 비슷하면야 딱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생소한 음식을 먹지 않으려는 이, 아침 일찍 일어날 수 없다고 미리 못 박는 이. 심지어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자도 있었다. 어쩌랴. 일행이자 동행인 걸. 여행길엔 임시 가족이니 말이다. 그들을 배려해 나 또한 꽤 무난한 음식을 골랐고, 서두르지도 않았으며 혼자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믿기 어렵지만) 어떨 때는 하루에 세 끼밖에 먹지 못한 날도 있다.


가는 곳마다 폰을 들이밀며 사진을 찍어 달라는 여자, 운전대만 잡으면 미하엘 슈마허라도 된 듯 과속을 일삼던 남자가 있었다. 여자는 항상 사진을 검수(?)한 다음 바로 그 사진을 지워 남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고, 남자는 (과속 단속 카메라에) 늘 찍혔을 테지만 그 사진은 2주 후에나 경찰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아! 트윈베드룸으로 드릴까요?” 가끔은 한 숙소에서 둘 이상이 자야 할 때도 있었다. 미소를 살짝 머금은 프런트 직원은 자신의 앞에 선 두 명의 투숙객 중 누가 ‘이 밤의 패배자’가 될 것인지를 단번에 알아보는 것 같았다. 누가 고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트윈베드룸은 언제나 내게 고통을 줬다. 침대는 두 개일지 모르지만 화장실과 방은 하나뿐이다. 그 방 안에 섬유소 섭취가 절실해 보이는 K와 비강 안에 증기기관을 장착한 N과 함께 밤을 보냈다. 코를 골려면 깰 때까지 줄곧 고는 것은 그나마 낫다. 쌔근쌔근 잠이 들다 해녀보다 오래 숨을 멈추는 경우는 밤새 나를 ‘체포의 불안’에 떨게 했다. 호텔 서랍의 묵직한 스탠드나 두꺼운 가죽표지 성경책, 젖은 수건은 수면을 방해하는 모든 일행을 후려치라고 놓아 둔 호텔 측의 배려임에 틀림없다.

공항이 이렇게나 비정기적인 장소가 될 줄은 몰랐다 ©Unsplash
공항이 이렇게나 비정기적인 장소가 될 줄은 몰랐다 ©Unsplash

●석방의 날을 고대하며


목포에 갔을 때는 자면서 말을 하는 친구 Y도 있었는데, 난 그 내용이 몹시나 궁금했던 나머지 밤새 깊은 상상을 해야 했다. 분명히 전후 사정이 드러나는 말이면 모르겠지만, 깊이 잠든 그는 “그러면 안 돼”라고만 되풀이 했다. 귀에다 대고 살짝 물어도 봤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나는 첫 문제를 풀지 못한 수능시험장의 우등생처럼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말았다. 다만 ‘바다사자’처럼 모든 옷을 홀랑 벗고 있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할 수 있었다.


여행을 가자면 처음부터 짐을 굉장히 많이 가져오는 일행도 있었고 아예 얄팍한 가방 하나 달랑 메고 온 이도 있었다. 가만 살펴보면 굉장히 큰 캐리어(죽은 고라니를 두 마리 정도 넣을 수 있을 것 같은)를 질질 끌고 다니는 이들도 있다. 대부분 체구가 왜소하고 벤티 사이즈 커피도 들고 마시지 못할 정도로 연약해 매번 운송을 도와줘야 했다.


여행을 갈 때면 언제나 꽤 멋을 내고 다니는 친구 H도 있었다. 그 크고 불편한 가방에 도대체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비행기를 탈 때면 언제나 초과 요금을 냈다. 여행에 꼭 필요한 벼루나 ‘도란스(변압기)’, 절구, 컬링 스톤이 분명하겠지만 차마 물어볼 순 없었다. 그런 H가 부산역에 도착하자마자 초량동의 168계단을 가자고 했을 때, 나는 울화가 치밀어 그를 그 예쁜 리모아 가방에 집어넣고 초량공원 으슥한 숲속에 버려둘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언제쯤 우리는 석방의 날을 맞을까. 날고 싶다 ©Unsplash
언제쯤 우리는 석방의 날을 맞을까. 날고 싶다 ©Unsplash

신기한 일은 내 얄팍한 가방에는 칫솔이며 면도기, 양말 등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었고 그의 대형 캐리어백에는 충전기나 속옷 등 중요한 물품들이 모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내 불쌍한 스마트폰 충전기는 방을 오가며 각각 20%씩 출장 충전을 해 줘야 했다. 기가 막히고 억울해서 아침에 H에게 물었다. “혹시 가방 안에 메트로놈과 지진 진도계가 있으면 빌려 줘.” “어! 여기 있어. 내가 일부러 챙겨 왔지”라고 대답할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없었다. 그럼 뭐가 들어 있었을까. 댓돌? 족욕기? 커피 로스터?


묶여 있는 동안 별의별 여행의 순간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그들도 나처럼 어딘가에 잡혀 있겠지? Y는 질문 고문을 받고 있을 테고, K는 화장실에, H는 가방 속에 각각 갇혀 있으리라. 우리 모두가 한 번에 풀려날 순간을 기다리며 지금 나는 근사한 석방 소감을 연습 중이다. 

 

*이우석의 놀고먹기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인스타그램 playeatlab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김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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