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

이우석의 놀고먹기

  • Editor. 이우석
  • 입력 2021.07.01 08: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행에는 늘 언어라는 문제가 있다.
파파고가 해결할 수 없는, 그 어떤 문제에 대하여.

이걸 어떻게 읽나 이 사람아
이걸 어떻게 읽나 이 사람아

볼륨 4의 목소리


여행에는 늘 언어 문제가 걸리게 마련이다. 한때 서점에 ‘나라별 여행 실용 회화’ 코너가 길게 있었던 이유다. 시원스쿨 출신처럼 몇 개 국어에 통달한 ‘언어의 달인’이 아니었던 나는 무수히 많은 해외 여행지에서 황당한 일을 겪었다. 생애 마지막으로 토플 시험을 본 것이 김영삼 대통령 때인 1997년이었으니 그 수준이야 오죽할까. 다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업종별 전화번호부만큼 어마어마한 두께의 얼굴 가죽을 지녔다는 것과 모든 나라 사람들이 꼭 영어를 잘 하지는 않더란 것이다. 40여 개국을 둘러본 결과, 미국인과 중국인은 보통 누구에게나 자신들의 언어로만 줄곧 이야기하려는 경향이 있다. 마더텅(Mother Tongue, 모국어)의 자부심이랄까. 뭐 그런 것일 테다. 

대체 어떻게 주문하라는 것일까
대체 어떻게 주문하라는 것일까

듣던 대로 프랑스인들은 자국의 지명이나 이름에서 틀린 발음을 들으면 이를 잡아내 다시 말해 보라며 가르치려 했다. 반면 일본인이나 독일인, 오스트리아인, 노르웨이인 그 외의 유럽연합 사람들은 꽤 진정성 있게 들어주려 했다. 부탄 사람들은 생각보다 꽤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으며 피지 군도는 각국에서 영어 유학생을 유치할 정도로 영어 학습기관이 짱짱하다. 두 군데 모두 퀸이나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처럼 단어 하나하나가 고두밥처럼 살아 있어 그나마 잘 들리는 영어를 썼다. 리을(ㄹ) 발음을 또르르 굴리는 라틴권이나, 진주나 산청 등 서부 경남식 악센트를 그대로 입힌 인도인들의 영어는 그나마 낫다. 영어에 성조(聲調)가 살아 있거나 자국의 색이 강한 곳도 많다. 타갈로그(Tagalog)가 녹아 있는 필리핀이 그랬고 일본은 아예 제3의 발음법을 창조해 사용하고 있었다. 헷도혼(head phone)이나 라지오(radio) 같은 사례다. 귀를 파다 튀어나오는 재채기 같은 잔기침 언어를 쓰는 헝가리와 몽골 등 몇몇 나라와 팀 버튼이 만든 것 같은 말을 끊임없이 내뱉는 북유럽 라플란드(Lapland)인들은 영어에도 그 발음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BAP, 밥이라고 써 있는 것 같다
BAP, 밥이라고 써 있는 것 같다

영어권 국가에서라도 사실 상관없다. 누군가 내 눈을 응시하며 솰라솰라 떠들어대고 있을 때, 상견례 자리에 나온 예비 신부처럼 미소를 머금고 가끔 고개를 끄덕여주면 된다. 잘나가는 시누이를 만난 새댁처럼 25초마다 한 번씩 볼륨 4의 목소리로 “예스”나 “와우”를 해주면(상황에 따라) 꽤나 친절하고 영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다. 일본어의 경우 “하이, 혼토? 나루호도” 등이다.

몰디브 글자, 실제로 보고 읽는다
몰디브 글자, 실제로 보고 읽는다

 

여기서 담배 피울 수 있나요? 


봄날의 비염처럼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말을 걸어오는 경우도 있다. 이도 저도 귀찮아질 때는 “암 베리베리 쏘리, 아이 캔트 스픽 잉글리시 앳 올”을 먼저 ‘채권 압류 딱지’처럼 입에 붙이고 나서 가끔 허공을 향해 웃어 주면 그다음부터는 다소 편하게 생활할 수 있다. 


억울했던 적도 있다. 스위스 발레주에서 취리히(Zurich)를 가기 위해 열차표를 끊는데 몇 번을 말해도 당최 알아먹지 못했다. 모두가 비웃으며 ‘쥬릭’이라 말해야 한다고 했을 때다. 업신여김을 당한 채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난 분명 지리 시간에 ‘취리히’라고 배웠단 말이다. 교과서에도 시험문제에도 나온다고, 이 자식들아! 

러시아에선 무슨 과자인지 굳이 먹어 봐야 알게 된다
러시아에선 무슨 과자인지 굳이 먹어 봐야 알게 된다

표정으로도 말하고 눈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게 사람이다. 언젠가 미국과 적대적인 나라 이란에 있을 때는 두서너 명이 만나 서로 한국말과 이란어를 썼지만 아주 진지한 대화가 통했다. ‘주몽’과 ‘대장금’ 이야기를 제외하고 과연 무슨 얘기를 그토록 오래 했을까는 지금도 의문이었다. 대신 영어가 공용어나 필수 과목이 아닌 나라에 가면 일행 중 내가 가장 ‘떠버리’가 됐다. 브라질이나 키르기스스탄, 중국 내륙 후베이성에서 그랬다. 아주 살판났었다. 두터운 얼굴을 방패 삼아 실전에서 많은 언어로 떠들었다. 중국어는 물론, 광둥어까지 지껄였지만 특유의 생김새 탓인지 그들은 자기네 지방 사투리인 줄로만 여겼다. ‘어라, 요것 봐라?’ 자신감이 붙은 후에는 여러 나라를 섭렵하며 거침없이 떠들어댔다. 포르투갈어로, 스페인어로, 러시아어로도 농담했고 주문도 했다. 때론 칭찬을 듣기도 했다. 비행기 안에서 내게 가장 유익하고 절실한 회화를 미리 달달 외워 온 덕이다. “Kann ich hierrauchen? Je peux fumer ici? ¿Puedo fumar?, 在哪裏可以抽菸, Вы можете здесь курить”뭐 이런 것들인데, 이 말은 흡연자라면 꼭 알고 있어야 하는….

그림같다는 말은 풍경에 쓰면 좋은 것이고 글자에다 하면 터무니없이 어렵다는 뜻이 된다
그림같다는 말은 풍경에 쓰면 좋은 것이고 글자에다 하면 터무니없이 어렵다는 뜻이 된다

 

연어를 찾아 헤매는 새벽녘의 곰


태국의 골뱅이 문자나 아랍어 표기(Arabic Alphabet)야 뭐 그냥 그림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몰디브의 잡지는 아예 점자 같은 동그라미로만 이뤄져 있었는데 그걸 읽으며 삼매경에 빠진 현지인을 보고 눈을 의심한 적 있다. 알파벳을 쓰는 나라에선 그래도 거의 읽을 수는 있겠다 싶었지만, 그중에도 가끔 깜짝 놀랄 철자를 쓰는 경우가 있다. 그리스 선착장 전광판에선 감마(Γ)나 시그마(Σ)가 있어 깜짝 놀랐다. 마치 수학의 정석 2-1권을 들여다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노르웨이어에는 모음 A 위에 작은 동그라미가 있어 낯설었고, 스페인에선 거꾸로 된 물음표(¿)가 왜 문장 앞에 있는지 한참 고민했다. R과 N이 뒤집힌 러시아 키릴문자는 아주 오래전 누군가 로마에서 알파벳을 가져오다 실수로 종이를 뒤집은 게 그대로 굳혀진 것일 거란 의심이 들었다.

특히 핀란드인들은 우리와 비슷한 우랄계 언어(수오미어)를 쓴다지만 굉장히 어려운 알파벳 철자 조합을 쓴다. 예를 들어 레스토랑 앞에 적힌 ‘좌석 안내시까지 기다려 주세요!’가 있을 법한 자리에 ‘Odottakaa Ystavallisesti Poytiinohjausta’라고 안내되어 있다. 철자의 자모가 아주 난리가 났다. 과연 몇 명이나 그대로 쓰고 읽을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핵미사일 발사장치 같은 아주 중요한 보안 권한을 필요하는 패스워드에나 쓸 법한 불규칙한 자모의 배열이다. 

이게 아니라니까, 파파고야
이게 아니라니까, 파파고야

원고를 쓰다 키보드에 얼굴을 붙이고 잠이 든다면 깨어난 후에 화면에 가득한 ‘수오미어’를 발견할 수 있다. 너무도 추운 나머지 손이 덜덜 떨려 모음 자판을 2번씩 두드렸을까. 몇 자 틀려도 모를 것임이 분명하다. 오타가 작렬하는 툰드라의 나라다. 최근 이 말이 맞나 싶어 파파고에 넣고 돌려 봤다. 국내 어떤 외고나 과학고보다 공부를 잘한다는 파파고 아닌가. 그런데 그 유식한 파파고가 이를 이탈리아어로 감지하더니 다시 이상한 말로 번역했다. ‘포이티노하우스타의 예스타발리 6세’ 그럴 리가 있나. 식당 앞에 무슨 왕 이름 같은 해석이라니. 손님은 왕이라 그런 것일까. 차라리 영어를 좀 더 공부해 둘걸.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쯤 돼야 글로벌 사회지
이쯤 돼야 글로벌 사회지

성경에 따르면 이 세상 언어가 달라지게 된 것은 바벨탑 공사장에서부터라는데 아마 핀란드인은 그중에서도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나 보다. 공부를 좀 했대도 실수하기 마련이다. 바이링구얼(이중언어 사용자)이 아닌 이상엔 어려운 게 당연하다. 인류의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던 1999년 어느 늦은 밤, 아니 새벽 도쿄 히비야(日比谷) 역 인근에서 나는 연어를 사 먹은 적 있다. 당시 종로 청문 일본어 학원(중급반)을 열심히 다니고 있었던 터라, 가끔 아는 문장을 현지인들에게 썼다 먹혀들면 그리도 기분이 좋았다. 읽고 쓰고 말하고 대충 알아듣는 것에 단단히 재미가 들었다.

몇 잔 걸치고 얼큰한 상태에서 도쿄에 유학 중이던 후배를 만났다. 알바를 마치고 온 후배가 느닷없이 불고기 덮밥(규동)을 먹고 싶다길래 24시간 규동 체인 ‘스키야’를 찾아 들어갔다. 식권 자판기가 있길래 후배에게 커다란 규동을 한 그릇 사 주고, 난 자신 있게 술 한 잔을 주문했다. 마침 초겨울 도쿄 날씨도 으슬으슬해 따끈한 청주 한 잔이 당겼다. 음. ‘사케(サケ)’가 연어(?)인 줄은 절대 몰랐다, 그날까지는. 술(酒)은 사케(さけ)라 읽지만, 보통은 오사케(お酒)로 존칭 접두사를 붙인다. 아무튼 연어구이라니. 졸지에 나는 북미의 가을 강가에 나온 곰이 되어 버렸다. 연어가 미치도록 좋은 나머지, 술 취해 비틀거리는 오징어 다리를 끌고 연어구이를 찾아 먹는 새벽녘의 곰이라니.

부드럽고 촉촉한 주황색 살점을 꾸역꾸역 입안에 밀어 넣으며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어학 공부에 매진하리라 결심했다. 지금이야 아무런 쓸모도 없는 걱정이지만, 완벽하게 마스터한 어학실력을 곧 보여 주리라. 외국어 3개 국어 정도는 공부할 테니 그 땅에 제발 상륙하게 해주세요, 신이시여. 플리즈! 오 마이 갓. 

 

*이우석의 놀고먹기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인스타그램: playeatlab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강화송 기자

저작권자 © 트래비 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최신기사
트래비 레터 요즘 여행을 알아서 쏙쏙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