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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별’나게 뜬 성주

  • Editor. 천소현 기자
  • 입력 2021.07.30 08:45
  • 수정 2022.05.2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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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밖숲의 여름은 보랏빛 맥문동 그늘 속에서 무르익어 간다 ©성주군

이제야 ‘뜬’ 언택트 여행지. 알고 보니 
속이 꽉 찬 참외처럼 달고 맛나다.
이제라도 떠서 고맙다. 

인생숏 명소가 된 성밖숲
인생숏 명소가 된 성밖숲

●올여름의 할 일은
성밖숲 맥문동


성주를 언택트 여행지로 뜨게 만든 일등공신은 경산리 성밖숲이다. 52주의 왕버드나무로만 이루어진 숲이 주는 압도감은 규모가 아니라 각 나무마다의 위엄이었다. 성주읍의 남쪽을 둥글게 휘감아 도는 이천(伊川)변엔 휴식, 낮잠, 운동, 데이트 등을 즐기는 사람들이 한가한 숲속 오후를 보내는 중이었다. 이런 일상이 겹겹이 쌓인 300~500년 노거수의 모습에 누군가 ‘나이테가 밖으로 터져 나왔네’라고 말했다. 노쇠한 나무에 대비해 공원 곳곳에 후계목을 키우는 중이다. 나무를 잘 몰라도 ‘참 좋은 숲’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곳인데, 긴 세월 속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다 있었다. 처음 숲의 시작은 조선시대 마을 아이들이 병에 걸려 죽는 등 흉사가 이어지자 풍수에 따라 마을의 비보림(裨補林)으로 밤나무숲을 조성한 것. 하지만 임진왜란 후 밤나무를 모두 베어 내고 왕버드나무를 심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나이테가 밖으로 흘러나온 것일까
나이테가 밖으로 흘러나온 것일까

외로운 당산나무가 아니고 든든한 비보림이라 그늘 다툼은 하지 않아도 된다. 성주 사람들은 너른 그늘 아래 달디단 참외를 깎아 먹으며 아이에서 어른이 된다. 특히 맥문동 보라꽃이 일제히 일어나는 8월이면 성밖숲은 ‘인생숏 성지, 성주’를 찾아온 외지인들까지 넉넉하게 품어준다. 김경인 시인은 ‘올여름의 할 일은 모르는 사람들의 그늘을 읽는 일’이라 했다. 성주를 지켜 온 비보림 그늘에, 각자가 놓고 간 그늘까지 더해져 어둠이 더 짙지만, 다행히도 맥문동은 그늘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다. 이곳 초록과 보라의 대비는 인공적이지도, 자극적이지도 않다. 바람이 불 때마다 다르고, 하루하루 또 다르다. 숲은 그렇게 매일 다르다. 

맥문동이 깔아 준 보라색 양탄자
맥문동이 깔아 준 보라색 양탄자 ©성주군
성밖숲에서 가장 큰 왕버드 나무. 수십 명을 그늘에 감춰 준다
성밖숲에서 가장 큰 왕버드 나무. 수십 명을 그늘에 감춰 준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무덤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 


별이 빛나는 이름, 성주(星州)의 명칭은 성산가야(星山伽倻)와 관련이 있다. 고려 충렬왕 때 성산가야의 ‘星’ 자와 고을의 ‘州’ 자를 따서 성주라 칭하기 시작했다는 것. 6가야 중 하나였던흔적은 성산(해발 389.2m) 주변 353기의 고분으로 드러났다. 주차장에서 가까운 무덤은 장학리 별티유적과 차동골 유적 일부를 전시한 것이고 산기슭의 봉분들은 원래의 것이다. 

올해 5월에 개관한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
올해 5월에 개관한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

올해 5월에 정식 개관한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은 흥미롭게도 요즘 젊은 엄마들 사이에 핫 플레이스다. 1층 로비에 있는 어린이 체험실과 가족 쉼터에서 아이들은 신나게 놀고, 어른들은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인근 구미와 대구의 젊은 엄마들에게는 성주에 새로 생긴 어린이 놀이터 ‘놀벤져스’ 1호, 2호와 함께 이미 성지순례 코스가 되었다고. 입장 인원과 횟수를 제한 중이라 주말에는 한 달 후까지 예약이 이미 꽉 찬 상태였다. 

전시관 로비엔 성주를 상징하는 별이 떠 있다
전시관 로비엔 성주를 상징하는 별이 떠 있다
성주에는 353기의 성산가야 고분이 있다
성주에는 353기의 성산가야 고분이 있다

전시실 안에 복원된 별티 1호분은 중앙에 큰 무덤 주변으로 8기의 작은 무덤이 50여 년의 시차를 두고 하나씩 추가된 것인데, 좀 더 깊이 들어가자면 중앙의 석실과 부장곽이 철(凸)자형으로 붙어 있는 구조가 성산가야만의 특색을 보여 준다. 기록과 유적이 부실한 성산가야는 삼국유사의 여섯 가야 중 존재감이 약한 편이지만 1976년 가암리에서 발견된 4세기의 금동관은 엄연한 독립소국의 존재를 증명한다. 껴묻거리로 발굴된 2,000점 이상의 토기와 장신구, 무기, 농공구 등이 전시되어 있지만 아쉽게도 1920년 일제강점기에 이뤄진 조사는 ‘발굴’이라 쓰고 ‘도굴’이라 읽을 정도로 중요 유물 보존과 보고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어린이 체험실 놀이 중에 ‘유물을 지켜라’라는 게임이 있었는데, 화면 속 도굴꾼이 일본인인 이유가 여기 있었다. 


운영시간: 화~일요일 09:00~18:00(동절기 17:00까지) 
입장료: 무료  

 

●이것! 있으면 최고 명당
세종대왕자태실


요즘 아가들의 탯줄은 기념도장 속에 봉인된다. 그러면 조선 왕실 아기씨들의 태(胎, 태반과 탯줄)는 어떻게 보관되었을까? 엄격하게 격식을 갖추어 봉인한 뒤 명당에 묻는 것이 풍습이었다. 좋은 곳에 묻어야 왕실과 나라가 번영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한반도 곳곳에 태실이 흩어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성주 월항면에는 19기의 태실이 한곳에 모여 있다. 태실을 여기저기 지정하면 그만큼 많은 백성들의 땅이 몰수될 것을 염려한 세종대왕의 애민정신 덕이었다고. 

흥미로운 사실로 가득한 태실문화관
흥미로운 사실로 가득한 태실문화관

솔숲 사잇길을 따라 태봉 정상에 올라서니 세종 20년(1438년)에서 24년 사이에 조성되었다는 19기의 태실이 가지런히 모여 있었다. 세종대왕의 적서(嫡庶) 19 왕자 중 큰아들인 문종(文宗)을 제외한 18 왕자와 원손(元孫)인 단종(端宗)이 각 태실의 주인이다. 모양은 비슷하지만, 사연은 다 다르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다섯 왕자의 태실 상부 석물은 모두 파괴되었다. 반대로 세조의 태실 옆에는 즉위 이후 가봉비가 추가되었다. 태 주인들의 현실 상황이 태실에도 실시간으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사료적 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지만, 의외로 성주만큼 태실을 잘 관리하는 지자체도 드물다. 

태실이 한곳에 모여 있는 건 드문 일이다.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
태실이 한곳에 모여 있는 건 드문 일이다.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

화가 나는 사연이 있다. 태실이 위치한 땅은 길지(吉地) 중의 길지이고, 태가 모셔진 백자 항아리는 누구나 탐낼 만한 보물이었다. 이 두 가지를 목적으로 1928년 일제는 조선 왕조 54기의 태실을 파헤쳐 한곳에 모아 버렸는데,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태실이 그곳이다. 평지에서 봉긋 솟아오른 땅에 장태해야 한다는 전통도 깡그리 무시한 무덤 같은 모습이다. 그 후 전국의 태실은 대부분 훼손되거나 사라졌고, 태봉산, 태봉리 등의 지명으로만 남았다. 복원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노력이 더해지고 있지만, 땅이 얽힌 문제는 늘 복잡하다. 명당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고. 

세종대왕자태실 인근에 조성된 생명문화공원
세종대왕자태실 인근에 조성된 생명문화공원

성주군에는 월항면 이외에도 가천면 법림산에 단종대왕태실(세자로 책봉된 후 이전되었다)이, 용암면 봉산에 태종대왕태실이 있다. 성주군이 전국에서도 가장 많은 태실이 모여 있는 세종대왕자태실 근처에 생명문화공원을 조성한 것은 2016년의 일이다. 전국에 산재한 태실의 미니어처와 쉼터가 곳곳에 조성되어 있고, 해설사가 상주하는 태실문화관에서는 조선왕실의 출산의례, 태실의 조성, 태실의 구조, 장태지로 태를 옮기는 봉출의식, 주무 관청 등 고증된 역사뿐 아니라 여러 나라의 태문화까지, 태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미 소문난 으뜸 태교여행지인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태실 수호사찰인 선석사의 태실법당
태실 수호사찰인 선석사의 태실법당

공원을 거닐다 염불 외는 소리에 이끌려 사찰로 들어섰다. 세종대왕자태실의 수호사찰로 지정된 선석사다. 순조 4년(1804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제거하지 못했다는 바위 하나가 지금도 절마당 한가운데 삐죽 솟아 있는데, 이 때문에 선석사가 되었다고. 생명문화공원이 조성될 때 선석사에는 태실법당이 함께 건립됐다. 금항아리에 자녀의 탯줄을 보관하는 데 있어서 왕가의 핏줄은 무용하다. 현금 앞에서 다 평등하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해야 할까. 느티나무 큰 그늘과 바람을 즐기다 배꼽시계가 울리고 나서야 떠날 생각이 들었다. 태어남과 동시에 어머니와 연결되던 태는 끊어졌지만, 끼니 거르지 말라는 어머니의 걱정을 배꼽이 기억하는 것이다.

운영시간: 화~일요일 10:00~17:00  

▶참외로 만든 레어템 카페 옐롱


성산 기슭에서 성주를 내려다보니 하다. 어딜 가나 비닐하우스였다. 전국에 보급되는 참외의 70%가 성주에서 난다. 그 정도면 일찌감치 참외 캐릭터가 있었을 법한데, 성주 참외 마스코트 ‘참별이’는 의외로 아직 베이비다. 올해 2월에 태어났다. 다양한 참외 가공식품은 참샘영농조합법인이 운영하는 카페 옐롱에서 구입할 수 있다. 참외청, 참외잼, 참외 말랭이 등도 레어템이고, 참외앙금으로 속을 채운 참외빵은 감쪽같이 참외를 닮았다. 참외빵, 참외구움과자 등을 구매하면 참외청을 넣은 참외 스무디를 주는데, 이게 참 달고 시원하다. 성주까지 갈 수 없다면 전국의 빽다방의 매장에서 맛볼 수 있다. 

운영시간: 10:00~19:00

 

●문턱 낮은 명품마을
한개마을


성주 여행의 숨은 테마 하나가 생(生), 활(活), 사(死)다. 태어남(세종대왕자태실)과 죽음(성산동 고분) 사이, 560년을 이어온 생활의 흔적이 영취산 아래 한개마을이다. 성주읍에서 멀지 않은 한개마을은 성산이씨(星山李氏) 집성촌이다. 세종 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입향한 것이 마을의 시작이니 영취산(322m) 아래 명당에 자리한 것은 당연지사. 지금도 75호의 전통가옥이 남아 있는데 그중 200~300년간 지탱해 온 10호의 고택이 경북 민속문화재이고, 마을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255호)다. 마을 앞에 백천이 흐르는데, ‘한개’는 큰 개울이라는 뜻이다. 

돌담으로 이어진 한개마을 고샅길
돌담으로 이어진 한개마을 고샅길

한개마을엔 남의 집을 힐끔거리는 불청객의 민망함이 없다. 마을 입구 안내소부터 해설사가 동행하며 고택의 문턱을 낮춰 준다. 성주에선 어딜 가나 노련한 해설사를 만날 수 있었다. 질문이 깊으면 대답도 깊고, 구경이 우선이면 눈높이를 맞춰 준다. 

북비(북쪽문)로 유명한 응와종택
북비(북쪽문)로 유명한 응와종택
흙, 나무, 그늘을 좋아하는 마을 고양이
흙, 나무, 그늘을 좋아하는 마을 고양이

3km가 넘는 고샅길 사이를 걷는 동안 응와종택(응와 이원조), 한주종택(한주 이진상) 등의 이름난 유학자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승희(李承熙) 선생에 얽힌 이야기들이 술술 풀어진다. 대표적인 이야기는 응와종택 북비문에 관한 것이다. 사도세자 호위무관이었던 돈재 이석문(1713~1773년)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는 영조의 명을 거역한 죄로 삭탈관직을 당해 낙향했는데, 이후 사도세자를 그리며 북쪽으로 문을 냈다는 것이다. 그 문이 아직 남아 있어서 응와종택은 북비(北扉, 북쪽 문)고택이라고도 불린다. 다 옮길 수 없는 이야기가 있기에, 고택 5호에서 운영하는 한옥 숙박을 추천한다. 짚공예, 전통놀이, 한복 체험 등 다양한 체험도 가능하다. 인사를 잘하면 고택의 툇마루마다 엉덩이 도장도 찍어 볼 수 있다. 

 

●별고을 백성들의 저녁
성주역사테마공원


성밖숲에서 시작된 여행은 성 안에서 끝이 났다. 어스름 푸른 저녁이 되자 성벽을 따라 조명이 켜지고, 어디선가 흥겨운 음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다목적 광장엔 건강 체조를 즐기는 어르신들이 오와 열을 맞춰 움직이고, 바닥분수엔 꼬마들이 온몸을 맡긴 채 샤워를 즐기고 있었다. 준공 후 첫 여름을 맞이한 성주 역사테마공원의 저녁은 활기가 넘쳤다. 

첫 여름을 맞이한 성주역사테마공원 분수
첫 여름을 맞이한 성주역사테마공원 분수

역사테마공원은 둘레가 2.1km에 달했다는 성주 읍성의 일부를 복원한 것이다. 성주 읍성은 고려 때(1380년) 토성으로 축조되어 조선 때(1560년)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당시 성주는 구미와 칠곡까지 모두 관할하는 영남의 큰 고을(성주목)이었다. 기록으로만 남았던 읍성의 북문(성지문)을 포함한 270m 구간이 복원되면서 많은 것들이 함께 되살아났다. 성주 사고(史庫)는 조선 전기 전국 4개 사고(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중 하나였다가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이다. 전통연못 중에서 드물게 2개의 섬이 있는 쌍도정은 겸재 정선의 <쌍도정도(雙島亭圖)>를 토대로 다시 복원한 것이다. 저 멀리 가야산이 그림 속이나 현실이나 같은 모습이다. 

복원된 성주읍성 북문 구간, 아파트와 묘하게 어울린다
복원된 성주읍성 북문 구간, 아파트와 묘하게 어울린다

읍성의 일부가 복원된 것은 큰 성취다. 관광지로 고립되지 않고 주민들의 생활공간이라 다행이다. 가야산 능선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저녁 산책에 나선 주민들의 실루엣이 더욱 또렷해졌다. 역사책에서 빠져나와 직접 걷고, 보고, 만지는 성주는 훨씬 입체감이 있다. 둥근 참외, 동그란 고분, 태실을 품은 태봉의 곡선 등 처음 만난 성주의 촉감은 둥글었다. 못 다한 성주의 이야기는 가야산에 있다. 그건 또 어떤 촉감일지 궁금하다.  

주소: 경북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516  
운영시간: 연중무휴 

 

*이 기사는 성주군청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글 천소현 기자  사진 김민수(아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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